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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울대 지원자는 침묵의 봄을 가장 많이 읽었나?

by 신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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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문재인 정부가 했던 교육 정책 중 최악의 실수는 대입에 독서 활동을 미반영하기로 결정한 일입니다.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고 거의 탐독에 가까운 독서 열정을 지닌 그가 왜 이런 반독서적인 입시 정책을 시도했을까요? 그는 정말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독서 대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푸는 게 국가 경쟁력에서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요? 수학이 사교육과 전체 사교육비에 미치는 영향을 정말 몰랐을까요?

원래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논술 붐이 일면서 반짝 열풍이 불었다가 지속적으로 장지 우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신 수능 때문이죠. 즉 객관식 오지선다가 입시와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독서는 시간 대비 효율성이 아주 떨어지는 투자입니다. 입시가 전부인 청소년기에 독서가 국력이고 책을 읽은 민족이 발전한다 등등은 다 구두선이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서에는 어느 정도 강제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그 독서의 강제성을 유일하게 밀어붙인 주체는 바로 서울대죠. 서울대는 문과는 물론 자연계도 자소서 독서 항목에 독서 활동을 지난 20년 동안 계속해서 담았습니다. 일단 이게 올해로 끝이죠. 그리고 내년부터는 자소서도 사라지고 학생부 독서 활동도 대입에 미반영됩니다. 즉 올해 고 2부터는 열심히 와우고 열심히 찍으면 교양과 진로 차원에서 독서를 3년 동안 한 권도 읽지 않아도 얼마든지 서울대에 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셈이죠.

그런 차원에서 해마다 입시 웹진을 업데이트하는 서울대가 올해는 지원자가 많이 읽은 책 22학년도 버전만 새로 올린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독서가 학업은 물론 인생을 살면서 너무나 중요한데 이 중요성을 교육 및 입시에서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소리 없는 항의 같이 느껴졌죠. 물론 23년도 입학생까지 자소서를 썼으니 내년에도 올라올 수 있겠지만 자소서가 사라지는 첫 해에 서울대가 그 정보를 올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웹진에 올린 글에는 올해가 마지막인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더군요.

참으로 슬픈 업데이트인데요, 이제 내용 이야기를 해보죠. 22년도 서울대 지원자 중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놀랍게도 60년대 베트남 전쟁 때 쓰인 환경 서적인 ‘침묵의 봄’입니다. 20년도에 3위, 21년도에 2위, 22년도에 마침내 1위를 기록했습니다. DDT는 아예 접해본 적도 없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왜 수많은 신간과 고전을 놔두고 이 책을 가장 많이 읽었을까요? ESG와 빌 게이츠가 쓴 최신의 책 등 환경 관련 좋은 책들이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이 책은 특히 자연과학대와 농생과대 지원자들이 많이 읽었습니다.

환경은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고 심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돈과 기술의 문제입니다. 왜 빌 게이츠가 환경 문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큰 이유가 뭘까요? 그가 세계 최고의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ESG란 단어를 만들어서 전 세계 기업들을 긴장시키고 친 환경 아니면 미래는 없다고 기업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이도 다름 아닌 세계 최대 ETF를 운용하는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입니다. 워런 버핏은 기술 기업에 무지하지만 탄소포집 기술을 가진 몇몇 업체들은 초기 단계에 들어가 친환경이 실제로도 돈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죠. 가구 공룡인 이케아가 이케아에너지로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 뛰어든 것도 그 사례 중에 하나요.

파타고니아 사장의 자서전이 경영대 지망자가 가장 많이 읽은 책 2위에 오른 것도 친환경과 기후변화에 청소년들이 유달리 관심이 있다는 증거겠죠. 실제 서울대 경영대에 올해 합격한 제 제자는 학생부를 2학년부터 ESG(그 해 처음 등장했습니다.)로 도배해 놓고 독서 활동에 심지어 우리나라 친환경 산업 전문 애널리스트 유병화 씨의 산업 리포트도 적기도 했습니다. EGS 지표 평가 시스템을 공동으로 개발해 학생부 진로 활동에 적은 학생도 있었죠.

결국 ‘침묵의 봄’이 서울대 자소서 독서 활동 넘버 1로 등극한 사실과 파타고니아, ESG 등의 책들이 실제로 서울대 지원자를 중심으로 많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환경 문제가 실제 고등학생들이 느끼기에도 정말 심각하다는 증거가 되겠죠. 지구가 지옥처럼 되고 있다는 느낌은 생존 경쟁의 치열함보다 더 뜨겁습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인 기후 위기, 대형 산불이나 갑작스러운 한파 등의 환경 관련 뉴스를 보면서 실제 공포로 느끼고 있다는 뜻도 되겠죠. 앞으로 살 날이 오래이기에 평균 수명 100세라는 그 오래된 미래를 환경 재앙을 만난 디스토피아 SF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을 겁니다. 고용 불안, 소수자 혐오, 각자도생 등은 각자 입장에 따라 모두 다른 색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슈지만 환경은 MZ 세대 입장에서는 모두 한결같은 마음일 겁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망하고 가장 큰 피해는 이 망할 지구에서 오랜 시간 살아갈 우리 자신들이다.

물론 ‘침묵의 봄’이나 ‘오래된 미래’ 같은 환경 관련 고전들은 정말 좋은 책이죠. 길게 보면 소로의 ‘월든’ 역시 이 범주에 묶일 수 있습니다. 서울대 발표 순위에는 안 들어 있지만 이밖에도 좋은 환경 관련 고전들이 많이 올라왔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서울대가 매년 발표하는 독서 20권의 순위는 너무 유명하고 학생들이 책과 저자의 인지도를 너무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좋은 책은 영화나 음악보다 훨씬 더 스펙트럼이 넓은데 서울대가 딱 20권만 발표함으로써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모을 수는 있지만 학생들 관심의 폭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일리가 있죠.

친환경은 이념을 넘어 국경을 넘어 체제를 넘어 세대를 넘어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책을 안 읽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상인 것처럼 유포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서울대에 진학하려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친환경 서적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이죠.

독서가 입시에서 사라지는 첫 해를 앞둔 서울대는 아로리의 마지막 문장으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척 공감이 가네요. 입시에 필요 없다고 책 안 읽으면 사회에도 본인에게도 가장 큰 손해 중의 하나입니다.

“서울대학교는 앞으로도 계속 독서를 통해 생각을 키워온 큰 사람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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