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관심 있는 특히 현대 미술에 관심 있는 분들은 앤디 워홀과 장 미셀 바스키아를 모르실 수가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은 전 세계 미술가를 그림 가격 순으로 순서를 매길 때 각각 2위와 6위를 기록할 정도로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들입니다. 피카소와 달리라는 두 스페인 작가와 함께 20세기 후반의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상징이 바로 두 사람이죠.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초상화(초상화라고 하기에는 그렇죠. 그는 사진을 찍어서 확대한 뒤 거기가 물감을 뿌려 작업하는 실크 스크린이라는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그림을 그립니다.)는 2억 달러에 가깝게 팔렸고 바스키아의 그림은 1억 달러에 팔립니다. 그런데 바스키아가 활동하던 시기 그가 엔디 워홀과 가장 가까웠던 시기인 82년에 그 그림은 2만 달러에 판매됐습니다. 5000배 오른 거죠. 10년에 1000배씩 오른 셈입니다. 비트코인 다음의 상승률 아닐까 싶습니다. 두 사람은 절친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뮤즈(바스키아는 완벽한 이성애자, 워홀은 완벽한 게이라 두 사람은 연인인 적은 없었습니다.)였던 두 사람을 이해하면 현대 미술의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그림은 일반 사람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매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그림은 신기해 보이지만 정말 잘 그렸다는 느낌은 받기 어렵죠. 그게 현대 미술이 돈 되는 이유입니다. 잘 그려서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더욱 유명해지는 거죠. 현대미술의 돈은 화제성과 인지도 두 가지로 좌우됩니다.
1) 이미 생전에 유명해진 인물이 사후에 더 유명해진다
워홀은 이미 생전에 최고 인기 스타였습니다. 그는 거의 엘비스나 마릴린 먼로 급입니다. 심지어 그는 미국 최고의 인기 코미디 SNL에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 지나가다 그를 보면 거의 모두가 그가 앤디 워홀인지 알아볼 정도였죠. 그는 본명이 엔드루 워홀라로 성에서 알 수 있듯 슬라브족인 체코 이민자 2세지만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미국 주류 사회로 스스로 들어갔습니다. 항상 언론이 좋아할 만한 발언들을 쏟아내면서 본인의 이름값을 올리고 덩달아 그림값도 올렸습니다.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이성과 잠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순수 동성애자로 살았지만 70~80년대 시대적 분위기, 특히 80년대 AIDS를 게이들에 대한 천벌로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되도록이면 커밍 아웃을 자제하며 남성 여성 스타 그림상 아트 딜러 그리고 돈 많은 이들과 친구가 되면서 뉴욕 최고의 셀리브리티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팝 아트는 가장 미국적이면서 대중적이면서 어찌 보면 가장 예술적이기도 해 평론가 언론 대중을 동시에 만족시켰죠. 그리고 인터뷰 잡지 인터뷰를 창간해 유명인들의 화제성 기사를 끝없이 배출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그에게 집중시켰습니다. 게다가 그는 죽음도 극적이었죠. 그가 21세기에 살았으면 최고의 유튜버가 되었을 겁니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위작 시비가 가장 많은 편입니다. 그만큼 그리기가 쉽다는 뜻도 되죠. 언뜻 보면 애들 장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놀라움이 동반됩니다. 초보자나 문외한도 느낄 수 있는 경이감이죠. 80년대 미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벽에 그린 낙서(그래프티)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피카소나 몬드리안 같은 느낌도 들면서 1만 년 전에 신석기 시대인들이 알타미라 벽화에서 그렸던 원시성을 간접 체험해주기도 합니다. 아이티의 유복한 회계사 아버지로부터 일찌감치 독립한 그는 20대 초반부터 약을 하며 그의 정신을 펑크 락과 추상화의 세계로 뒤범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81년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던 앤디 워홀을 시식당 밖에서 보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 즉석에서 그림을 판 것으로 워홀과 인연을 텄죠.
워홀에게는 두 명은 연인, 한 명은 그의 회사 직원이자 그가 전위 영화 ‘키스’(영화 내내 어떤 대사도 없이 수많은 입술들이 키스를 하는 장면만 모았습니다.)의 연출을 맡은 테드 존스라는 한참 어린 친구와 연인이었다 헤어지고 당시 파라마운트 영화사 부사장이었던 존 골드(에이즈로 사망)와 깊은 관계를 가지던 차에 워홀은 바스키아를 만났죠. 그리고 사랑을 느꼈습니다만, 완벽한 이성애자, 그것도 백인 여성과만 연애를 하던 바스키아와 연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바스키아의 자유로움과 그림 밖에서도 자유자재로 분비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그림 계의 지미 헨드릭스로 여겼죠. 앤디 워홀은 그를 위해 그가 지닌 인맥을 총동원해 그를 알리고 홍보해주었습니다. 앤디 워홀이 사후 발간된 그의 일기에는 바스키아에 대한 일방적인 연애 감정 때문에 괴로워하던 워홀이 드러나지만 바스키아는 그를 존경하는 멘토이자 그림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측면이 크죠.
2) 게이 다문화 유색인종 여성의 그림이 더 올라간다
워홀을 계기로 그림판에서 돈이 되는 그림은 콘셉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게이, 유색인종, 컬트적인 문제적 인간, 여성 등의 그림이 경매에서 비싸게 팔리는 세상이 왔죠. 백인 중심의 세계관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팝아트를 만나 동시에 협공을 받으면서 비주류적인 취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낼수록 그림 가격이 치솟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80년대부터 그림은 다른 예술보다 먼저 비주류로 진입했고 음악은 90년대 너바나로, 영화 등 2000년대 들어 한국 등 아시아 문화가 주목받으면서 백인 기독교 문화가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시절은 막을 고했습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나이 차가 32살이나 나지만 비슷한 시기에 죽었습니다. 워홀은 항간에는 에이즈로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담낭 제거 수술 후유증으로 87년 죽었고 1년 뒤에 바스키아는 헤로인 중독으로 쇼크사했습니다. 당시 그의 집안에는 혈관을 찌르던 헤로인 주사기로 도배를 이루고 그의 팔은 피범벅이었습니다. 워홀도 코카인 없이는 살 수 없던 약중독자로 그의 일기에 보면 코카이 때문에 코가 헐어서 죽을 지경이라는 고백이 나오죠. 한 사람은 게이로서 한 사람은 흑인으로서 겪는 삶의 지난함 때문에 둘은 마약 중독자가 된 겁니다..
공정과 인종차별 철폐,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 등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동성애자,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 그리고 여성 작가들의 그림이 주목을 받는 경향이 높아졌습니다. 이는 시대가 달라지면 그 시대가 원하는 그림, 그 시대가 비싼 가격을 매기는 그림도 달라진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그림은 경매 시장이라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시장 원리로 판매가 되며 시장은 마치 ESG가 화두가 되듯, 시장의 야수성을 감출 수 있는 진보적 가치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뜰 그림들은 반체제 비주류 성향을 띤 경우가 더욱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죠.
3) 영화 드라마 다큐 등으로 계속해서 제작되는 인물의 그림이 더 올라간다
미술품은 미술만의 논리로 가격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음악 영화 드라마 출판 등 다른 대중문화와 끝없이 소통하며 상호의존적으로 작용하죠. 바스키아의 그림 가격이 폭등한 배경에는 98년도에 줄리안 슈나벨 감독의 동명의 전기 영화가 흥행한 것도 한 이유가 되죠. 앤디 워홀로 데이비드 보위가 나왔고, 데니스 호퍼, 게리 올드먼, 윌리엄 대포 등의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입니다. 주연을 맡은 배우는 웨스트 월드의 주인공인 제프리 라이트였죠. 앤디 워홀 역시 그가 찍은 수많은 전위 영화들과 함께 동시에 유명해졌습니다. 그의 영상 미학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은 존 워터스 감독을 비롯, 영화 특히 할리우드에 반대하는 뉴 시네마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죠.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영화를 비롯해 그가 주인공 혹은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는 수도 없아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넷플릭스에서 그의 일기를 AI 성우를 동원해서 완벽하게 재현한 6부작 다큐도 공개됐습니다. 살아서도 유명했지만 죽어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이 미디어를 잘 활용했고 미디어 역시 그들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죠.
NFT가 잠시 겨울을 맞은 것 같지만 그림에 대한 열풍은 시들지 않았습니다.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두 사람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술로 돈 공부가 되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