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의 구작(2000년 집필)이면서 신작(국내 첫 소개)인 ‘외사랑’을 한 큐에 읽었습니다. 저는 안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없습니다. 89년 ‘방과후’부터 2021년 말에 나온 ‘허상의 어릿광대’까지 게이고가 쓴 책은 거의 100권을 훌쩍 넘깁니다. 해마다 3권 정도 장편 (이번 외사랑은 700쪽이 넘습니다.)소설을 쓴다는 이야기인데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요즘 들어 게이고가 예전 같지 않고 자기 복제에 빠져 있다고 해도 양질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도록 길게 배출해내는 작가는 동서양 통틀어 게이고 외에는 없을 듯합니다. 저는 이번 소설을 집어 들었을 때 혹시 ‘용의자 X의 헌신’을 우려먹은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죠. 일본 제목도 짝사랑인 ‘가따오모이’였고 외사랑처럼 순수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같은 계열이라 생각했죠. 그러나 전혀 다른 느낌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스포츠 마니아인 게이고가 쓴 조인계획(스키), 마력의 태동(야구), 잠자는 숲(발레)과 결이 비슷합니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는 스포츠에 과학을 잘 연결시키는데요. 이번에는 당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작품에서 영어 QB로 표현되는 쿼터백의 역할과 존재 의미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번 소설은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 미식축구를 배경으로 남자이면서 여자인 주인공의 살인사건을 놓고 대학교 동기들이 벌이는 심리 게임입니다.
아주 드물지만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으로 동시에 살면서 성적 정체성의 혼란이 극에 달하는 사람이 있죠. QB인 주인공 데쓰로는 대학 시절 풋볼팀의 매니저인 마스키를 당연히 여성으로 알고 성관계도 가진 바 있는데, 그는 알고 보니 XY염색채를 지닌 남성이었습니다. 고환여성화증후군, 생식샘발생장애 등의 질병으로 책에도 소개되는데 이런 경우죠. 태어날 때는 남자였습니다. 고환을 갖고 태어났는데 몸에 남성 호르몬(테스토스테론)이 거의 나오지 않아 완벽한 여성의 외모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다 성 정체성을 찾아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그 여성을 지키려다 살인을 벌이게 되며 친구들은 이 친구의 선택을 놓고 각자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서 주장과 논리를 펴죠. 이 괴정에서 게이고 특유의 돌발적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소설은 더욱 흥미진진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독자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 소설입니다.
저는 게이고의 책을 읽을 때마다 에코가 떠오릅니다. 에코도 뛰어난 추리 소설 작가였죠.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그 나라의 문학 수준을 알려면 그 나라의 추리 소설을 읽어보라”라고 주문했습니다. 추리 소설을 잘 쓰는 작가들은 문학적 완성도와 재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작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들은 일단 다른 소설보다 머리를 좀 더 써야 합니다. 뻔하지 않은 결론으로 독자를 이끌어가면서 놀라운 결말을 제시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럴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느끼도록 하려면 작가의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문학이 세계 최고인 이유는 셰익스피어나 조지 오웰 버지니아 울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가서 크리스티와 코난 도일이란 작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시아 최고의 문학 강국은 일본이죠. 일본은 에도가와 란포(게아고는 1회 란포상 수상자죠.)를 시작해서 미야베 미유키 그리고 국내 팬들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함께 가장 사랑하는 외국 작가이며 저도 극찬하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습니다. 물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나 ‘도키오’처럼 SF적인 발상의 따뜻한 책, ‘패러덕스 13’ 같은 묵직한 묵시록도 좋지만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소설을 쓸 때 가장 멋집니다. ‘외사랑’은 그의 작품 중에서는 중상 정도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지만 저처럼 2000년대 초반에 그의 세계에 입문한 독자들이 아니라 최근 들어 그의 책을 읽게 된 추리 소설 마니아들에게는 더욱더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입니다. 만약에 2000년 이전의 소설이 궁금하며 국내에서는 소개가 안 된 작품 중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진짜 실력을 맛보고 싶은 독자가 계시다면 작년에 국내 출간된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를 추천드립니다.
게이고는 자기 소설에서 재미만 찾으면 되지. 의미 같은 것 찾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인데요, 저는 이번 소설에서도 역시 의미와 메시지는 있다고 아니 넘쳐 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일본 사회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사회로서 일본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남성으로 성전환하는 수술 비율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하는 비율보다 높은 나라입니다. 일본은 선진국이며,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된 나라인 건 맞지만 일본의 여성들이 느끼기에 일본은 너무나 남성 중심적이고 마초적입니다. 여성으로 보이지만 남성이었던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서 남성 위주로 흘러가는 일본의 사회상을 여기저기서 엿볼 수 있어서 좋았고요, 또 한 가지 메시지는 인간을 고정된 성을 넘어 고정된 정체성으로 보지 말라는 행간의 의미입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끝없이 번뇌하고 갈등했던 마스키처럼 현대인 아니 모든 인간은 타인에게 각인된 자신의 정체성과 그 반대되는 내면 사이에서 끝없이 길항하는 복잡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어찌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있겠으며 또 그것이 변함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본인도 모르는 오묘한 것으로서 인간을 이해할 때는 어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연해져야 한다는 걸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끝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니까요. 추리 소설이 재미만 있으면 그건 반쪽 자리 추리 소설입니다. 추리를 하다 보면 인간의 내면도 파헤치게 되고, 그런 인간을 만든 사회와 환경도 연구해야 하니 추리 소설처럼 작가도 공부하면서 독자들도 공부하도록 만드는 장르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