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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진상 Dec 03. 2022

과학과 종교 중 무엇이 인류에게 필요한가? ‘더 원더’

최근 들어 넷플릭스에 좋은 드라마 영화가 쏟아져 올라오는데요, 도무지 볼 시간이 없습니다. 특히 10시간 가까이 투자하는 시리즈 물은 도저히 1편을 클릭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11월에 올라온 영화 중에 가장 볼만한 작품은 영국 영화 ‘더 원더’였습니다. 

배경은 1850년 대 아일랜드입니다. 아일랜드에서는 당시 대기근이 있었고 잉글랜드 정부의 방조 아래 사람들은 속속 아사했습니다. 아일랜드와 영국은 한 때 한 나라(지금도 북아일랜드는 영국입니다.)였지만 한국과 일본처럼 서로 증오하는 사이로 바뀐 계기는 이때부터입니다. 17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국 영화 ‘배리 린든’에서 주인공 린든은 아일랜드인으로 영국에서 귀부인을 만나 성공한 귀족으로 나오는데 그 당시에는 잉글랜드 귀족이나 왕족들의 노골적인 차별이나 업신여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 시작된 거죠. 당시 감자를 아일랜드인은 주식으로 했는데 단일 품종만 심었다가 유행병이 퍼지자 주식이 감자가 완전히 밥상에서 사라지고 길고 긴 고난의 행군을 거칩니다. 결국 백만 명 이상이 굶어 죽고 남은 300만 명의 아일랜드인 중 3분의 2인 200만이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 아일랜드의 한 마을에서 영국에 두 명의 전문가의 파견을 요청합니다. 수녀와 간호사죠.  둘의 미션은 한 소녀가 먹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기적을 검증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인간이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물만 먹고 버틸 수 있는 시간도 3주 정도가 한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4개월을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기적이고 성녀라는 게 마을 유지들의 주장이었죠. 

과학을 신봉하는 간호사는 비밀을 밝혀냅니다. 아침과 저녁애 그 소녀의 어머니가 키스를 하는 척하면서 입으로 먹을 것을 씹어서 넘겨주었던 거죠. 그 얼마 되지 않은 양으로 4달을 버텼으니 그녀는 사실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간호사는 이런 사실에서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진실을 밝힐 것을 아이 부모에게 강력히 요구하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에 대한 맹신 때문에 설사 자신의 딸이 하늘나라에 가도 이는 하느님의 뜻이고 일찍 세상을 뜬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이 일찍부터 필요하시기에 부르는 것이라는 답답한 소리를 하죠. 이처럼 과학 하는 사람과 종교 믿는 사람은 대화가 안 됩니다.

결국 간호사는 화재가 난 것으로 위장해서 소녀를 죽은 것으로 처리하고 소녀의 이름을 바꿔 자신의 딸로 삼은 뒤 자신을 지지하던 신문기자와 함께 호주행 여객선을 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 제목은 ‘더 원더’지만 일종의 냉소적 반어법입니다. 더 원더에 원더는 없고 무지몽매만 있다는 뜻을 감독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 했지만 과연 인류에게 종교가 더 필요할까, 과학이 더 필요할까라는 이슈에 대한 생각 거리를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종교가 인류에게 필요했던 것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것도 절대적이었죠.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둘은 자리 바꿈을 했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정상적인 모든 인간은 과학을 고를 겁니다. 종교는 과학의 시대에 그리고 앞으로 올 AI 시대 메타버스 우주로 여행 가는 시대에 맞지 않는 옷입니다. 물론 AI 시대라고 인간이 죽음을 완벽히 정복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과 두려움은 있을 것이기에 종교의 역할은 축소되지만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즉 죽음의 신비가 풀리면 그 순간이 종교의 마지막이 되는 날이죠. 물론 그런 날은 현재 과학 기술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고 당분간 우리에게 가까이 올 일도 없어 보입니다. 변함없는 사실은 인류의 진보는 언제나처럼 과학이 이끌어 왔고 과학이 인류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종교는 인류에게 멀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죠. 하나의 예외는 있습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더 원더‘에서 문제가 되었던 가톨릭과 개신교의 비이성적 행동보다도 이슬람교의 극단적 테러가 인류에 더 큰 해악을 제공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는 중동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근본적인 불신 때문에 기인한 것이고 이 문제는 종교가 아닌 정치에 의해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은 이슬람 세력도 원래 14세기 이전에 그랬듯이 이성적인 과학자들이 주류에 등장하는 날이 올 것이고 그날이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인류에게 보여주겠죠. 오히려 이슬람교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 면에서 개신교나 가톨릭보다도 더 실질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영화는 과학과 종교의 대결 구도에서 과학 편을 들었고 저도 역시 이런 결론이 마음에 들지만 모든 사람이 저와 같지는 않을 겁니다. 종교에 대해서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좋은 생각거리와 토론 가리를 제공하는 이 영화를 조용히 추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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