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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진상 Dec 07. 2022

진보의 시대는 끝났을까? 리프킨의 신작에 대한 아쉬움

제레미 리프킨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미래학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성향은 전혀 다르지만 다니엘 핑크와 레이 커즈와일과 함께 제가 그룹 A로 묶는 학자죠. 리프킨은 논술 강사를 하면서 그리고 서울대 자소서를 지도하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권하고 제시문으로 가장 많이 출제한 작가입니다. 이번작 ‘회복력 시대’는 지난번 ‘글로벌 그린 뉴딜’보다 더 재미있고 더 유익합니다. 내년부터 서울대 자소서가 사라지는 게 아쉽죠. 정말 고등학생들이 읽으면 딱 좋은 내용이거든요. 재미도 있으면서 교육적이죠. 지나치게 이상론에 치우칠 경향이 강한 시기에 리프킨의 주장은 복음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리프킨의 최대 강점은 일관성입니다. 첫 작품 ‘엔트로피’부터 최근작 ‘회복력 시대’까지 일이관지 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탐욕을 멈춰라! 때로는 육식을 비판하고 때로는 석유를 때로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지만 그의 왕성한 지력과 탐구력의 버팀목은 바로 간디의 이 말입니다. “지구는 모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지만 단 한 명의 탐욕도 만족시켜줄 수 없다.”

그런데 ‘한계비용 제로 사회’와 ‘제3차 산업 혁명’을 쓸 때까지는 그렇게까지 과학 기술과 진보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았던 그가 이번에는 약간의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이제 진보의 시대는 끝났다는 거죠. 이제는 지구가 야생으로 돌아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회복력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이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는 게 책의 요지입니다. “모든 인간의 자아는 개인적이지 않다. 사회적 관계적 자아가 진정한 자아다.”

즉 그의 주장을 뒤집으면 인간이 개인주의에 빠지면 탐욕적이 되고 탐욕은 지구를 망치며 한 번 망쳐진 지구는 절대 회복될 수 없으니 개인주의를 버리라는 논리 구조가 발견됩니다. 

그가 주장하는 관계적 자아는 유교에서 말하는 관계적 자아와 뭐가 다를까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관계는 타인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새포 외에 다른 존재 즉 박테리아 고세균 등 미생물까지 포함하는 정말 넓은 자아입니다. 우선 인간은 키메라 같은 존재로 DNA를 포함해서 자신의 절반을 미생물에 의존하고 있다는 근거를 댑니다. 이는 미생물학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니 새로운 건 없죠. 공감의 시대에서 선보였던 대안으로써 공감을 이번에는 타자만이 아닌 다른 생명체까지 확장한 게 이번 책의 특징입니다. 

환경과 공동체 지구 생명을 개인과 탐욕보다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는 이전 책과 다름이 없지만 디지털 그린 뉴딜까지만 해도 자본주의의 교정 능력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번 책에서는 완전히 자본주의와 이별한 느낌입니다. 

코로나가 리프킨을 더욱 왼쪽으로 이동시킨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바이든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그 어떤 미련도 갖지 않겠다는 의지도 엿보였습니다. 여전히 자본주의는 지구를 그저 하나의 자산으로 여기고 있으며 효율성의 증가와 노동자의 빈곤화라는 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기에 희망이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죠. 즉 산업혁명은 이제 그만둬야 하고 인류는 예전의 정령숭배 즉 애니미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죠. 화석 연료의 시대와 교묘하게 발맞춰가던 서구식 민주주의 역시 종언을 고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산업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그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정말 애니미즘 맞습니다. 모든 생명에 인간과 동등한 자격을! 이란 구호가 그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죠, 

그가 좀 더 과격해졌다는 증거는 그가 그렇게 부정하지 않던 자유에 대해서도 비판의 메스를 가할 때 정점에 치닫습니다. 대신 평등을 강조하죠. 진보의 시대에 평등은 자율성의 파생상품일 뿐이었지만 생명애 의식은 자유가 아닌 평등의 가장 심오한 표출이라는 거죠. 자율성보다 포용성이 더 중요하며 포용은 자유가 아닌 평등에서 온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공감의 진화는 결국 평등의 진화라는 주장도 합니다. 이 정도면 그의 철학은 왼쪽의 극단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가 마르크시스트가 아닌 이유는 이거죠. 폭력을 거부하니까요. 마르크스는 몰라도 레닌과는 절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도 선을 긋고 있죠. 그는 마르크스보다는 확실히 간디를 닮았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 대신에 그가 선택한 고전은 괴테입니다. 괴테 역시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를 외쳤지만 그는 철저하게 바탕에 공감을 깔고 있기 때문에 그가 멘토로 모신 거죠.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리프킨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독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만 대안에서 다른 겁니다. 마르크스 레닌이 증오를 선택했다면 리프킨은 공감을 선택한 거죠. 그는 말합니다. 

“회복력 시대에 우리는 공감 욕구를 심화하고 공감 확장의 다음 단계, 즉 우리 인간 종을 생명 가족의 일원으로 되돌려 놓을 생명애 의식에 닿아야 한다.”

결국 인류는 산업을 버리고 지구라는 집으로 귀환하라는 메시지인데, 저는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그가 이번에 내세운 대안에서 전혀 현실성이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와서 인류가 진보를 버리고 회복을 택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육식의 종말, 유러피안 드림,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그리고 전작인 글로벌 그린 뉴딜까지는 그래도 이상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현실을 부정이 아니라 이용하려는 자세가 보였는데 이번 책에서는 이상만 보이고 현실은 보이지 않습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수면제를 못 끊는 불면증 환자에게 당장 수면제를 끊고 잠 자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입니다. 수면제 끊으려다 환자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려거든 장기적으로 단계적으로 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그의 책의 대안 파트에 오면 갑자기 장기 단계란 단어가 사라집니다. 리프킨이 이 책에서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읽으면 희망이 생기기보다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감과 함께 왠지 모를 공허가 생깁니다. 회복력 시대가 정말 인류의 유일한 미래일 수밖에 없다면 그가 좀 더 “어떻게”에 대해서 고민하고 좀 더 많은 부분을 할애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리프킨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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