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감독은 특히 결투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의 영화 데뷔작이 바로 ‘듀엘리스트’였죠. 그의 최근작이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이며 그 사이에 4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창작력과 사극과 결투에 대한 관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결투의 리얼하고도 처절하면서도 치열한 두 남자의 싸움은 정말 박진감 있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유일한 흠이 마지막 게임인 오징어 게임에서 박해수와 이정재의 다소 허망한 싸움이었는데 그에 반하면 스콧 감독의 라스트 씬은 정말 보는 사람들의 호흡을 멈추게 할 정도로 잘 연출했습니다.
서양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결투에 관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결투로 죽은 유명인이 한 둘이 아닙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긴, 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 등 꽤 많습니다. 미국의 초대 재무부 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결투로 아들을 잃었죠. 결투는 명예이며 진실이며 자존심이여 권력이었죠.
에릭 재거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콧 감독의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는 중세와 근세를 잇는 14세기 후반 프랑스를 배경으로 결투가 서양인들의 명예이며 진실이며 자존심이며 권력이 되어버린 상황을 잘 묘사합니다. 세 명의 주인공이 각각의 관점에서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묘사하는 전형적인 라쇼몽 스타일의 영화였는데요, 동일한 장면을 카메라가 똑같은 각도에서 잡았는데도 전혀 다른 맥락이 전달되는 솜씨를 보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연출력은 나이와 상관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대체 전성기가 언제 끝날지, 아니 언제 올지 모르는 감독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결투는 당연히 명예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아담 드라이버가 자신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남편 맷 데이먼의 결투 신청은 당시 유럽의 정서를 보면 너무나 당연했죠.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그는 오쟁이 진 남편으로 수치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남성이 권력을 쥔 남자들 사이에서 이는 최악의 오명입니다. 결투를 당하는 아담 드라이버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호색한이라는 이미지로 불리면서 카사노바처럼 살던 그에게 강간이라는 죄는 치명적인 불명예입니다. 카사노바는 사랑을 나누는 거지, 일방적으로 사정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호색한 사이의 불문율입니다. 강간을 하면 어느 여자가 그에게 마음을 열겠습니까?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한 조디 코머에게도 명예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일단 카사노바 아담 드라이버의 입을 믿을 수 없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는 명예를 잃는 동시에 남편에 의해 목숨도 잃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던 거죠.
강간과 화간은 지금 같은 과학기술과 증거재판이 자리 잡은 시점에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영화에서도 맷 데이먼과 조디 코머의 섹스는 일방적이며 진정한 영적 소통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고 조디 코머가 아담 드라이버에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는 넘쳐나죠. 하지만 아담 드라이버 또한 조디 코머에게 성적 욕망으로 달려들었을 뿐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다는 증거 또한 넘쳐납니다. 보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관객도 저마다 다른 결론을 내릴 겁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중세 기독교 문명의 파장 아래 있었던 1380년대 프랑스는 진실을 곧 신이 말해준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은 신이 아닌 시법부가 진실을 결정하지만 완벽한 진실 앞에서도 현재의 과학과 사법제도는 무력할 때가 적지않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면 당시 유럽에서 결투를 벌여, 맷 데이먼이 이기면 강간당했다는 조디 코머가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되는 것이며, 만약에 아담 드라이버가 이기면 조디 코머는 무고죄로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는 극단적인 결정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결정은 왕도 할 수 없고 신의 이름으로 추기경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진실은 오직 신만이 알고 있고 신의 의지는 두 사람 중에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 결투를 통해 드러낸다는 믿음은 지금 생각하면 허무맹랑하지만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이었을 겁니다. 정의는 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갖기 쉽죠. 더구나 신의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지던 시대 아니었습니까?
자존심은 체면과 비슷하죠. 흔히 이익을 버리고 자존심을 얻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익과 반대되는 일종의 명분과 같은 것입니다. 영화에서 이익은 명예니까 자존심은 명예와는 다른 차원으로 해석해야 할 듯합니다. 맷 데이먼의 자존심은 내가 정조가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자기 믿음입니다. 맷 데이먼은 이번이 두 번째 결혼으로 사실상 패가망신한 상황에서 부잣집 귀족의 딸을 아내로 받아들였죠. 자존감이 무너지면 그는 모든 걸 잃는 상황입니다. 사랑 때문에 한 게 아니라 자존심 때문에 했던 결혼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그녀의 행동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겁니다. 아담 드라이버 역시 자존심이 있습니다. 불륜남이라고 불릴지언정 강간범으로 몰리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죠. 그리고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은 강간범이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자신도 설득한 이유는 바로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조디 코머 역시 자존심으로 질 리가 없습니다. 비록 남편과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못해도 친구들과 다른 남자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해도 절대 화냥년으로 몰리고 싶지는 않았죠. 그녀의 마음속은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만 당대의 통념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격이 매도되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일종의 자존심이죠.
결국 결투는 권력이 됩니다. 권력은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스콧 감독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힘입니다. 히틀러가 인류 역사 최악의 악마인 것은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유대인 600만 학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소련 영국 미국과 동시에 벌인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이 히틀러를 뛰어넘는 타고난 악마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여전히 사랑받는 지도자 1위인 이유는 그가 역사에서 승자이기 때문입니다. 맷 데이먼과 아담 드라이버는 승자로 기록되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펼쳤죠. 제가 볼 때 사상 최고의 결투 씬이었던 이 대결에서 맷 데이먼이 승리했던 비결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아담 드라이버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패배하면 잃을 게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 아내의 목숨, 자신의 명예, 태어나는 아이(사실 관객들은 그 아이가 아담 드라이버의 아이인지, 맷 데이먼의 아이인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5년 동안 임신을 못 하던 조디 코머가 아담 드라이버에게 강간 당했다고 여겨지는 시점과 묘하게 일치하죠.)의 운명 등 잃을 게 많습니다. 아담 드러이버 역시 명예를 잃고 자기 목숨도 잃는 상황이라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조금 더 맷 데이먼에게 많았습니다. 역사가 그리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군중이 철저하게 승자 편이라는 주장은 영화에서 맷 데이먼이 아담 드라이버를 죽이기 전까지 프랑스의 왕 샤를 6세를 비롯해 결투의 관전자들은 결투에서 유리해 보이는 아담 드라이버를 응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승리자와 패배자가 결정되면서 왕을 비롯, 군중들의 마음도 기울어진 거죠. 아담 드라이버가 이겼다면 그의 관점에서, 맷 데이먼이 이겼다면 그의 관점에서 정의는 쓰이고 왕을 비롯, 군중들은 그걸 믿는 겁니다. 그게 역사인 거죠. 역사에서는 승리자로 살아남은 자가 결국 진실을 말하는 법입니다. 반대는 아닌 거죠. 언제나 승리는 진실이고 믿음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뚜렷한 키워드를 제시하면서 관객들의 시선과 관점, 평소의 철학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려 있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감독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라 보는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가장 좋은 텍스트로서 재미 또한 리들리 스콧다웠던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