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란 키워드는 제가 생각하는 한국 최고의 시내아티스트이죠. 저는 넷플릭스에서 수시로 박찬욱이란 키워드를 넣어 봅니다. 그러면 지난해 말까지는 단 한 편만 검색되었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죠. 놀랍게도 다른 작품은 연말까지는 없었습니다. 평소 극장이 영화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그답게 넷플릭스와는 거리를 두려는 자세임을 간파했죠. 저는 헤어질 결심을 넷플릭스에서 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브로커와 비슷한 시기에 올라오더군요. 그와 동시에 아가씨, 박쥐,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에 올드보이까지 6편이 더 검색됩니다. 넷플릭스와 계약은 당연히 CJENM이 결정하는 거겠지만 계약 시 감독의 동의가 필수적일 것임은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저는 ‘헤어질 결심’을 박찬욱 감독이 넷플릭스와 다시 만날 결심을 한 날 보게 되었습니다. 박찬욱 다운 영화이면서 박찬욱 감독답지 않은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박찬욱 감독 영화답게 정말 이쁘게 배우들과 배경들을 담았기 때문이고요. 그 답지 않은 이유는 특별한 상징이나 알레고리 없이 작가주의 영화의 팬만이 아닌 상업 영화 팬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치 현대적으로 풀어쓴 프로이트 안내셔였다고나 할까요.
브런치에는 수많은 분들이 좋은 리뷰를 썼는데 저는 다음 세 가지 관점으로 영화를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1) 왜 제목이 안개가 아니라 헤어질 결심일까?
사실 영화에서 제목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술 영화는 감독의 이름, 상업영화에서는 주연 배우의 이름이 더 중요하죠. 책처럼 제목 때문에 그 돈과 시간을 들여 극장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목이 중요합니다. 헤어질 결심은 탕웨이가 극 중에서 한 말인데 그녀는 언제든 새로운 만남을 가질 때마다 헤어질 결심을 한다는 뜻이죠. 제가 볼 때 이 영화의 주제와 제목은 정훈희의 노래 안개가 더 적절하거든요 안개는 탕웨이와 박해일 사이에 놓인 그 존재이기도 하며 영화 전체의 색깔이기도 합니다. 안개처럼 뿌연 게 놓인 장벽입니다. 사실 연인 두 사람처럼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될 사이에 놓인 장벽이죠. 모든 미스터리 영화는 사실 안개와 가장 비슷합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절정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특히 그렇지요.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즉 박해일이 탕웨이의 죽음을 목전에 보며 울부짖을 때 안개는 걷힙니다. 안개가 걷힌 뒤 남는 두 글자는 사랑.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사랑 영화일까요?
2) 박해일과 탕웨이는 정말 사랑한 걸까? 박찬욱 감독의 독특한 사랑 해석
박찬욱 감독 영화에 사랑이 빠진 적도 없고 또 사랑만을 다룬 적도 없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인간에 일차적 관심이 있고 그들의 관계에 2차적 관심이 있지,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두 사람 사이의 길항은 3차적 관심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 염정아처럼 쉽게 사랑에 빠지는 통속 영화와도 거리를 두면서 그렇다고 사랑의 반대편으로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물론 모든 남자를 만날 때 미리 헤어질 결심을 하는 탕웨이 같은 배우는 사랑의 반대편으로 달려가 결국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박 감독이 이 영화에서 오직 사랑만 이야기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박 감독이 박해일과 탕웨이 사이에 사랑만 뿌려놓은 게 아닙니다. 박해일의 캐릭터에게는 일에 대한 신념과 가정에 충실하고 싶은 도덕성을 부여했고 탕웨이에게도 어쩌면 시리얼 킬러로서 죽음 자체를 즐기는 블랙 위도우의 심성을 집어넣었습니다. 도덕성과 직업의식이 투철한 경찰관과 누가 봐도 확실한 꽃뱀 사이코 패스인 탕 웨이에게서 사랑이 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영화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사랑으로 치닫습니다. 물론 사랑의 완성인 육체관계까지 두 사람이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를 향해 완전히 포개진 상태입니다. 수갑 찬 두 사람의 포스터 이면에는 두 사람의 격렬한 포옹이 관객들에게도 보입니다. 그렇다면 불륜에 관한 영화일까요?
그런데 사랑인지 불륜인지 이용인지 도파민의 탐닉인지 영화는 도통 결론을 내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차피 당사자 두 사람이 아닌 제삼자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게 사랑이라는 감정이니까요.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는 것도 감독의 임무가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생각이죠. 박 감독은 젠체하며 “너희들 찾아봐라”라고 메시지를 숨기는 감독이 아니라 그렇게 주제와 메시지를 찾는 관객들을 조롱하며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감독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박 감독은 그 자신의 영화 철학과 인생철학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겠죠. 어쩌면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러면서 사랑에 관한 영화다. 그의 말 역시 틀린 말이 아닙니다.
3) 왜 헤어질 결심을 여러 번 보는 사람이 많았을까?
박찬욱 감독은 호불호가 확실한 감독입니다. 그 자신도 호불호가 분명하고 관객들도 그렇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탈리아의 작가 알베르트 모라비이와 프랑스 작가 조이스카를 위스망스를 좋아합니다. 제가 볼 때는 보르헤스도 꽤나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는 미셸 우엘벡처럼 위스망스의 팬으로서 위스망스의 대표작 제목처럼 그야말로 거꾸로 서서 세상을 보려고 하며 관객들에게도 그런 자세를 원하는 감독입니다. 그런데 정상인들은 물구나무 선 채 세상 보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그의 영화는 세 번씩 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처음에는 스토리에 집중하고 두 번째는 미장센만 보며 세 번째는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물구나무서서 모든 걸 잊고 새롭게 봅니다. 이 영화도 정말 여러 번 본 사람이 많습니다. 난해해서 여러 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여러 번 보는 거지요. 그만큼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다른 감독과 결이 다릅니다. 그가 찍으면 미스터리가 러브 스토리와 섞여서 기기묘묘한 마치 영화 속 가상공간 미포 같은 그런 세계가 탄생합니다. 이게 진짜 메타버스죠. 영화는 실제를 모사하지만 박찬욱의 영화는 언제나 실제 같지만 실제는 아닌 그런 세계입니다. 그래서 칸느가 그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