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에는 좋은 다큐가 많습니다. 어찌 보면 넷플릭스는 전 세계 전 영역을 커버하는 국제 EBS와도 같은 지식 채널인데요. 우주 자 들어가는 다큐는 무조건 보는 저에게 모건 프리먼의 중후한 목소가가 깔린 ‘우리의 우주’는 정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다큐였지요. 그런데 1편을 보다 접었습니다.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안타까워서입니다.
1편은 아프리카의 세렌게티가 나오고 주인공으로 치타 에미와 새끼 두 마리가 나오거든요. 새끼 두 마리가 너무너무 이뻤습니다. 그러나 이쁘다고 자연이 혜택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오직 적자생존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동물이 치타지만 치타가 사냥할 수 있는 동물 가젤도 초식 동물 중에서 가장 빠른 동물입니다. 일종의 군비경쟁인 셈이죠. 그래서 에미는 가젤을 잡아먹으려다 번번이 실패합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먹고사는 존재로 못 먹으면 굶어 죽는 수밖에 없죠. 사실 아사는 인류에게서 가장 흔한 죽음이었으며 가장 비참한 죽음이기도 했죠. 그런데 제가 이 다큐를 도중에 끈 이유는 제작진의 태도입니다. 치타들이 굶은 시간을 보여주면서 24시간 경과 48 시간 경과 이런 식으로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너무나도 귀여운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치타 새끼들이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아사할 거라는 내레이션을 띄웁니다. 어린 치타가 성인 치타가 될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5%라는 통계도 덧붙이면서요.
결국 사흘 만에 어미는 사냥에 성공하지만 두 마리의 새끼 중에 한 마리는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눈물이 나더군요. 저는 아직 고양이는 키운 적이 없는 개빠입니다. 13살짜리 포메라니안을 친딸처럼 사랑하고 있지만 고양이 특히 새끼 고양이들은 정말 예쁩니다. 포메인 딸에게도 안 먹이는 참치 통조림(저희는 큰 딸이 강아지에게 사람 주는 음식 절대 못 먹이게 해서요 사료와 영양제 껌만 줍니다.)을 딸과 함께 길고양이 다니는 길목에 숨겨 놓아 개딸의 공분을 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파트에서는 절대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하지만 생선 남은 게 있으면 버리지 않고 고양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길목에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양이는 키우지 않았지만 누가 길고양이를 해코지한다는 기사를 보면 내가 기르는 고양이가 다친 것처럼 가슴이 아프기도 하죠. 그런 제가 보기에 이 다큐는 너무 잔인했습니다.
근데 같은 개빠이면서 고양이도 이뻐하는 마눌님은 견해가 다르더군요. 다큐 제막진은 자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저라면 굶어 죽기 직전의 치타 새끼들에게 치킨이라도 사다가 먹일 텐데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사실 개입 금지는 저도 자연을 배경으로 다큐를 제작하는 사람들 내부의 규율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논리라면 다큐에서 나온 또 다른 끔찍한 장면 누 떼가 강을 건너가고 그중에 극히 일부지만 악어에게 산 채로 잡아 먹히는 누들도 인간이 개입해 구해내는 게 맞죠. 총을 가진 인간은 악어를 총으로 쏘든지 아니면 총을 공중에 쏴서 총소리로 악어를 내쫓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는 아무 눈물도 흘리지 않는데 치타 새끼들이 굶주리는 걸 못 보는 저의 연민은 철저하게 선택적이며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모든 동물 중에서 개와 고양이만은 특별하다고 말할 논리적 근거보다는 그 반대 근거가 훨씬 더 정교하죠. 논술 강사 출신인 제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치타 새끼 한 마리가 굶어 죽는 걸 본 이후로 밥맛도 떨어지고 다큐도 더 이상 보기 싫어진 저는 넷플릭스를 나왔습니다. 인간을 넘어서 자연 전체로 시각을 확대할 때 소위 자비심이 개입하는 경계를 어디까지 두어야 할까요. 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늑대 포함)와 고양이(고양잇과 동물도 다수 포함)만은 예외로 두자는 저의 마음은 솔직히 말해서 잘못된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