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진상 May 28. 2022

말콤 글래드웰은 왜 도쿄 대공습을 재검토하려 할까?

말콤 글래드웰은 책이 나오자마자 반드시 읽는 작가입니다. 심리학과 역사 경영학을 넘나들면서 그는 저널리즘과 학술적인 경계를 허물어버렸죠. 그는 양질의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재미있는 논픽션을 양산해내는 작가입니다. 논픽션을 소설처럼 쓰는 작가죠. 무엇보다 교육적이죠. 저도 학생들과 수업을 많이 했습니다. 아웃라이어, 티핑 포인트, 블링크,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까지는 학생들과 같이 읽었죠. 요즘은 대입에서 독서가 빠지면서 학생들이 책을 안 읽어 지난 2020년 나온 타인의 해석은 학생들에게 권할 기회가 없었네요. 지난번 책이 역사 최고의 거짓말쟁이 히틀러의 이야기였다면 이번 신작 '어떤 선택의 재검토'에는 2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한 축이었던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쟁 우리가 태평양 전쟁이라고 기억하는 그 전쟁 이야기입니다. 왜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히틀러라는 명백한 책임자가 있는데 아시아에서 일어난 태평양 전쟁에는 그런 절대적인 책임자가 없을까요? 미군이나 전쟁 총지휘관이었던 루스벨트도 일본과의 전쟁이 히로히토 천황과의 전쟁이나 심지어 도조 히테키 휘하의 군벌과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일본과의 전쟁이었죠. 하지만 독일과의 전쟁은 그들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독일이 아닌 히틀러와의 전쟁이었죠. 그 차이가 왜 과거 반성에 성공한 독일은 유럽의 패권국이 되었지만 한 때 미국을 뛰어넘을 것으로 여겨지던 일본은 경제력이 급속히 후퇴해 아시아에서 중국은 물론 한국에게도 추월당할 걱정을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제공합니다. 일본에서는 모두의 책임이기에 아무도 책임을 진 인물이 없었던 까닭이죠. 

말콤 글래드웰은 일본이 시작했지만 막상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태평양 전쟁에서 놀랍게도 책임자로 이 사람을 지적합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발발한 책임자가 아니라 전쟁을 끝낸 책임자죠. 바로 공군 장성 커티스 르메이입니다. 그가 내린 선택을 과연 최선이었는지 검토하는 게 이 번 책의 집필 의도입니다. 르메이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커티스 르메이는 원래 유럽 전선에서 독일 공군과 싸우던 미국 육군 항공대(당시 미국에는 공군이 없었습니다.)의 수장이었죠. 민간인을 폭격해 런던 폭격의 복수를 하려는 영국 왕립 공군과 그는 생각이 조금 달랐는데요, 43년 독일 로젠부르크 공습에서 당시 미군 폭격기의 주력인 B-17의 80% 가까이를 잃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43년까지는 괴링의 독일 공군이 그럭저럭 독일 영토를 방어할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죠. 결국 민간인을 좀 더 죽여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다소 위험한 쪽으로 생각이 바뀐 거죠. 이 생각을 실천할 상황이 마침내 도래합니다. 44년에 그는 유럽에서 태평양 전선으로 호출됩니다. 44년은 독일이 스탈린의 뚝심에 밀려 우크라이나를 잃을 무렵이었고 미국 영국 연합군도 독일 영토 바로 바깥인 룩셈부르크 벨기에 등지에서 거칠게 독일군을 밀어붙일 때였습니다. 

독일의 패배는 기정 사실화되었고 문제는 일본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탈환하면서 2만 가까운 병사를 잃었는데 본토인 규슈에 상륙해 본격 육상전을 펼칠 경우 자체 시물레이션 결과 사망자가 50만 명에 이를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총 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자가 10만 명, 히틀러의 독일군 중 5분의 1(5분의 4는 동부전선에서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은 소련군과 싸우는 중이었죠,)과 싸워 3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만약 본토 상륙전을 벌였다면 아시아 전쟁의 사망자가 유럽 전선을 추월했겠죠.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공군력 덕분이죠. 

당시 항속거리가 9000km에 이르던 B-29는 실전 배치 전이어서 3200km였던 B-17로 일본 본토를 공격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마리아나 제도(괌 사이판 포함)를 미군이 탈환하기 전에는 1600km를 날아 일본 본토를 공격할 비행장을 미군이 확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죠. 인도와 중국을 거쳐 일본 본토를 몇 번 폭격했지만 히말라야 산맥을 넘기가 대단히 어려워 실패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결국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탈환하면서 전쟁을 이길 확신을 갖게 된 셈이죠. 일본도 이를 잘 알고 마리아나 제도 사수에 총력을 기울였고 이 제도를 지키던 일본군 전원이 옥쇄라는 전쟁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항상 누군가에게는 위기가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기 마련입니다. 르메이에게는 이 전쟁을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 않고 빨리 끝낼 임무가 주어진 거죠. 즉 공군력을 이용해 도쿄 등 일본의 대도시를 폭격해 민간인을 죽음에 몰아넣은 뒤 일본이 항복하도록 하자는 전략이었죠. 르메이는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전쟁은 악이다. 그 악을 끝내기 위해서는 때로는 악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전쟁이 끔찍한 이유는 그 강도 때문이 아니라 지속성 때문이다.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명분이라면 민간인 폭격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그래서 그는 42년 미국이 개발한 네이팜탄을 44년 가을부터 45년 봄까지 계속된 대도시 공습에 집중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일본은 당시 대도시에 나무로 지은 집들이 다닥다닥 밀접해 있어서 소이탄이 터지면 소방차가 출동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폭탄 투하에서 대형화재로 이어지는 데에는 불과 6분이 걸렸습니다.) 불이 번졌죠. 45년 3월에 있었던 도쿄 대공습 때는 당일 하루만 10만 명이 죽었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은 사망자 숫자를 가볍게 뛰어넘는 기록입니다. 르메이가 주도한 일본 대도시 폭격에서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공습으로 일본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일본 군부는 원폭 두 발,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소련 군의 참전에 절망을 하면서 본토 사수를 포기하고 항복을 경정하게 되죠. 

결과적으로는 르메이의 선택이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미군의 사망자 숫자도 줄이고 일본의 사망자 숫자도 줄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일본의 역사가 중에서는 르메이 덕분에 전쟁이 빨리 끝나서 일본이 독일이나 우리나라처럼 분단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쟁이 그 해 8월에 끝나지 않았다면 그 해 가을부터 일본에서 아사자가 속출해 수백 만 명이 굶어 죽었을 텐데 전쟁이 빨리 끝나 맥아더가 일찍 상륙해 식량을 공급하는 바람에 집단적 기아를 막았다는 일본 역사가들의 주장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일본 정부는 그에게 대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는 일본의 아돌프 아이히만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그를 자신들을 죽인 원수, 심지어 한 때의 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정도죠.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요? 뭐가 문제여서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선택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그는 르메이 선택의 정당성을 성경에 비유해 비판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자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마귀가 예수를 이글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열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내가 만일 내게 청하면 네 것이 되리라.”

르메이는 글래드웰에 따르면 다 가질 수 있다.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6km 상공에서 보이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죠.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휴머니즘을 버리고 전쟁에서 조기 승리를 통해 예상되는 더 큰 피해를 줄인 것이 악마와 손잡은 행위일까요? 물론 생각보다 쉽지 않은 대답입니다. 결과론적으로 원자폭탄의 발명과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의 패배는 확정됐지만 만약에 일본이 전세를 뒤집어서 승리했다면 르메이는 전범으로 재판에서 100%의 확률로 사형당했을 겁니다. 르메이는 승부의 추는 기울었지만 확실하게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더 작은 악과 손을 잡은 거죠. 제가 르메이였어도 그 상황이라면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이건 제가 일본에 피해를 입은 한국인이고 우리를 구해 준 미국이 고마워서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최선의 추구가 아닌 최악을 피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르메이는 선을 행하기 위해서 악을 행한 수많은 역사 속 현실주의자 중 하나였을 뿐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책과 달리 글래드웰이 이번 책에서는 그 특유의 새로운 시각, 날카로움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글래드웰도 확실히 나이를 먹나 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300억 자산가의 계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