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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노바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인간의 미련

by 신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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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B(탄생)과 D(죽음) 사이의 수많은 C(선택)의 연속이다.” 이 말은 진리이기는 하지만 책에서 발견하면 너무나 진부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영화에서 확인할 때는 우선 반갑죠. 그와 동시에 너무 신선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미 촬영된 필름을 극장에서 보는 예술로 모든 선택이 관객이 극장을 찾기 전에 완료된 상태죠. 그런 영화에서 다양한 선택,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쉽지 않다는 점은 익히 알기에 그런 영화가 있다면 시도 자체가 신선하다는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2009년작 ‘미스터 노바디’를 만났을 때 반갑기도 하면서 무척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통적인 내러티브에 익숙한 관객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도대체 뭐가 진실인지 헷갈릴 수도 있었지만 저처럼 영화에서 생각의 자유를 간절히 원하는 관객들에게는 사고의 근육을 키워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1) 미스터 노바디는 노바디이면서 왜 에브리바디인가?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매력은 소재가 신선하고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꽤나 가볍고 날렵하게 풀어간다는 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희극인데 안에 담긴 내용은 비극인 경우가 많죠. 인생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그는 다른 영화들, ‘토토의 천국’, ‘제 8요일’, ‘이웃집에 신이 산다’ 등에서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는 영화에서 음악을 아주 잘 쓰는 감독인데요, 이 영화에서도 가브리엘 포레의 파반느 같은 서정적이고 슬픈 클래식 넘버부터 버디 홀리의 경쾌한 로커빌리 송 ‘에브리데이’까지 경계를 허물며 인간 존재의 필연적 양면성을 그려내죠.

‘미스터 노바디’의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에서 지닌 인생의 모호함에 대한 은유이자 희롱입니다. 관객들은 시종일관 질문합니다. 일반적인 영화팬들이라면 짜증이 날 수도 있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극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습니다. 다 보고 나면 끝까지 품었던 관객의 궁금증이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며 시간의 불가역성을 비웃고 있죠. 우선 2092년 인류가 노화와 죽음을 극복한 시기에 117세로 자연 사망하는 유일한 인간 니모 노바디가 정말 실존했는지부터 의심스럽습니다. 솔직히 모든 관객들은 영화의 시작점인 9세 소년이 이혼하는 부모 중에서 아버지를 선택한 건지, 어머니를 선택한 건지 그 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등장하는 배중률을 뒤집는 수많은 모순적인 설정들이 치매에 걸린 노인의 기억을 뜻하는 건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되죠. 영화는 확실한 건 이 세상에 없다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에 철저히 충실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완전히 열려 있는 영화로 시작해 열린 영화로 끝납니다. 영화 고빗사위마다 선택의 기회를 주인공이 아닌 관객들에게 주며 관객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도록 유도하는 영좌죠.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요, 일단 저는 세 가지 관전 포인트를 잡아 영화를 양자적 세계관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첫 번째 관전 포인트 왜 노바디일까요? 이 이름은 관객에게 두 가지를 시사합니다. 사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죠. 특별하게 태어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습니다. 그런 인생에 지쳤기에 사람들은 게임이나 영화 등에서 대안을 찾는 겁니다. 도마엘 감독은 영화 팬의 이런 심리를 잘 간파하고 노바디인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또 극복하고 싶은 바로 그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모두가 노바디이지만 때로는 특별한 삶을 선택하여 섬바디가 되고 싶은 그 마음이죠. 그런 선택의 기로가 인생에는 최소 한 번은 있습니다. 바로 인생의 반려자, 영화에서 말하는 대로 유전자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이성의 유전자의 절반을 받아들일 때죠. 미혼자든 비혼자든 그 고민을 안 한 사람은 인류 역사에 없었을 겁니다.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죠. 그 선택은 노바디가 하는 스페셜한 선택입니다. 영화는 주인공 노바디가 어린 시절 동네에 살던 세 명의 여성들에게 동시에 사랑을 느끼고 그 각각의 사랑이 실현되었을 때 어떤 모습이 될지를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결국 평행 우주 이야기인 거죠.

노바디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한 번 이상은 후회를 합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런 면에서 영화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에브리바디 즉 모든 사람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죠.

2)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세게는 정말 존재할까?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이 들 수 있습니다. 내가 하지 않은 선택, 그 선택에 따라 생길 수 있었던 또 다른 미래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걸까? 주인공 노바디가 아버지를 선택했다면 어머니를 선택한 뒤 벌어지는 인생 즉 영화에서 노바디가 죽기 직전 애타게 불렀던 이름 안나와의 모든 인연은 원래 없었던 것일까? 만약에 어머니를 선택한 게 맞다면 영화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앨리스와의 삶 그 자체가 허구였다는 뜻인가? 또 다른 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 보지 않은 길’은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도 안 되는 일, 있을 수 없는 일과 동의어였지만 에르빈 슈뢰딩거의 사고 실험 이후 평행 우주 혹은 대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은 물론 물리학의 세계에 깊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미치오 카쿠 같은 끈이론의 대가부터 시작해 거의 모든 이론물리학자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평행 우주 즉 다세계가 이 우주의 진리일 수 있겠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끈이론은 수학적으로 완벽한데, 끈이론에서 내놓은 우주에 대한 해는 놀랍게도 무한이라는 결과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거죠. 즉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단 하나가 아니라 무한개일 수도 있다는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이 우주 말고 또 다른 우주에서는 내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또 다른 자식을 낳아 또 다른 직업을 갖고 살고 있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모르죠. 어느 누구도 평행 우주로 건너간 사레도 없고 평행 우주에서 왔다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사후세계나 귀신처럼 현재 과학이 정답을 아직까지는 알려주지 못한 문제입니다.

저는 물리학자가 아니기에 결국 이 문제를 문화 심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다른 선택이 정말 가능할까 라는 건 사람들이 문화를 통해 현실을 잊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영화를 보는 이유이기도 하고 게임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인생이 더 좋아질 수 있었다고 믿는 모든 이들의 희망인 거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지만 어딘가 다른 우주에서 나는 부자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내가 그 평행우주로 건너가 지금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욕망은 이미 평행우주란 개념이 나오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 희망과 욕망이 있었기에 영화 소설 게임 때로는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까지 계속해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즉 내가 선택하지 않아 사라진 가능성의 세계는 어쩌면 영원히 증명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또 다른 무언가를 찾고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갖고 있는 많은 이들 때문에 늘 언제나 인간의 머릿속에서 존재하며 떠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죠. 이 세상에서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사실은 “이미 지난 일이다.”라는 말일 겁니다. 이 말을 부정하고 싶어 사람들은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 시간의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영화라는 매체를 발명했을지도 모릅니다. ‘미스터 노바디’의 마지막 장면은 죽음 이전으로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죠. 영화가 시간의 불가역성에 도전하는 숙명적인 매체임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거죠.

3) 영화는 메타버스에서 어떻게 진화할까?

저는 시간의 가역성에 도전하는 영화는 결국 메타버스라는 미래를 만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메타버스란 개념은 양자역학의 부산물인 평행우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메타버스가 단순한 비즈니스 워드가 아니라 조금 더 생명력이 길게 유지될 거라는 생각은 메타버스가 인류의 영원한 꿈, 가진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라는 것과 너무도 상관관계가 크기 때문이죠. 지금보다 나은 뭔가를 상상하는 습관적 사고가 결국 평행우주라는 개념을 끄집어낸 것이고 메타버스 역시 이런 인간의 영원한 꿈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메타버스 시대를 맞아 모든 영화는 하나의 플롯으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만을 감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선택한 뒤 각기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될 겁니다. 라이나 마리아 릴케가 말한 대로 인간은 모두 똑 같이 시작하지만 모두 다르게 죽는다는 말이 바로 메타버스에서 구현이 되는 거죠.

자코 반 도마엘은 메타버스가 인구에 회자되기 한참 전인 2009년에 이 영화를 찍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관객들은 어렵게 느껴졌을 텐데 메타버스와 또 다른 현실에 익숙한 현재 MZ 세대라면 더 많이 이해하고 공감할 내용의 선견지명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죠.

메타버스에 어울리는 이 영화적 상상력은 넷플릭스의 디스토피아 SF 시리즈 ‘블랙 미러 : 밴더스내치’로 이어져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엔딩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보다 많은 관객에게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영화가 어느 방향으로 진화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궁금증이 들 수가 있습니다. 모든 관객에게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결말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관은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까요? 아니 존재할 수 있을까요? 관객마다 다른 결말을 보기를 원한다면 극장은 결국 사라지고 집과 휴대폰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현재의 넷플릭스가 미래 영화의 대안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원하는 스토리를 집이 아닌 극장에서 맞춰주려면 이 지구의 인간 수만큼 많은 저만의 영화관이 필요하겠죠. 저는 밴더스내치와 메타버스가 미래의 영화관이 된다면 지금 같은 테마파크 스타일의 극장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은 영화든 게임이든 발전하는 가상현실과 접목해서 이 멋진 가상현실은 극장을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죠.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서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이 세뇌되는 그런 세상은 포드 스타일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어울리는 그런 모델입니다. 영화는 그 시대에 태어났죠. 그러나 메타버스가 아니더라도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형 극장의 시대는 조만간 문을 닫을 겁니다. 소량생산과 소량 소비를 넘어 맞춤 생산과 맞춤 소비의 시대에 메타버스는 딱 맞는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메타버스는 인간의 능동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희망적이죠. 우리가 빚을 수 있는 더 나은 운명이 필시 존재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메타버스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길에 더 많이 관심을 갖게 되고 열망할수록 돈도 그에 맞게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영화의 미래 그리고 극장의 미래는 메타버스와 가상현실이라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고 확실히 굳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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