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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May 02. 2024

시세인정의 통찰

한국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민속학 작업들은 방송국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국악계도 분단 이래 본래 KBS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엘리트 지식인들이 국악과 민속을 배척하여 발 붙일 곳을 잃은 뜻 있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숨 돌릴 곳을 제공했던 것이 KBS였고 나중에는 유신 정부였다. 

방송국에는 그러한 '민중적' 전통이 2000년대 초까지도 남아있었던 듯하다. 

방송국에서 통하는 말 가운데, "시류를 반 보만 앞서야 한다"는 말이 있다. 

너무 앞서면 순수가 되어버리고 그러면 그건 방송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올이 쓴 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글은 『부와 권력을 찾아서』라고 번역된 벤자민 슈워츠의 책에 그가 쓴 서문이었다.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엄복의 천연론을 동경대학 유학시절에 마루야마 교수 밑에서 세밀하게 정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물론 원작인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와 상세하게 대조해가며 읽었다. 그러면서 그토록 쉬운 영어문장이 그토록 난해한 고문체 한어로 번역되는 경이로운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나카에 조민도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당시 통용되던 쉬운 일본말을 마다하고 어려운 한문으로 번역하여 민약역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어놓았다. 나카에 조민이나 엄복에게는 서양사상이 당대의 사대부 엘리트들에게 깔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들의 과제 상황은 서양사상을 민중에게 소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서양사상으로써 민중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소수엘리트의 심령을 사로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엄복은 팔고문을 저주했지만 그 자신이 팔고문의 중독에서 한치도 헤어나지 못했다. 엄복은 동성파의 학통을 이은 엘리트로서 자처하였고, 그의 생애 또한 엘리트로서의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도올은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사대부 엘리트"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는 옌푸나 조민이 결국 민중에게 무관심한 사대부 엘리트였다고 말하고 있다. 


옌푸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조민도 주자학 소양이 조금은 있었다. 그 "조금"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사서집주 정도는 외우는 것이 출발선이 되는 정도다. 그 소양에서 나오는 고문체 한어는 도올을 포함한 우리 전후세대에게 확실히 헉슬리의 영어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바로 우리가 "민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조민과 엄복 당대(엄복이 조민보다 7살 연하다)의 민중은 전후세대의 민중과, 헉슬리와 맹자 사이의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도올의 관점은 한학에 대한 맑시즘의 통속적인 비판을 연상시키는데, 한마디로 한학이 맑시즘과 달리 민중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올은 과연 "맑스는 사상이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개변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엄복은 해석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지난날 동아시아의 맑시스트들이 말했던 저 "민중을 동원"한다는 말의 의미와 그 배후에서 그것을 정당화해주던 "맑시스트 정치"는 거의 끝장이 났고, 재검토를 기다리고 있다. 맑시스트들은 어떤 정치를 위해 어떤 민중을 만들어서 어떻게 동원했는가? 맑시스트는 엘리트적이지 않았고 한학자들은 엘리트적이었다는 수준에서 이야기를 끝낼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맑시스트가 보기에 한학자는 엘리트적일 수 있었겠지만, 농민 나카무라나 인력거꾼 우시키치가 보기에는 맑시스트가 더 엘리트적일 수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1880년대의 민중은 아직 근대화되지 않은 조루리와 가부키와 신문과 정치소설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자유민권운동의 시기이기도 하다. 자유민권운동이 홍군을 창출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임을 한학자들에게 돌리는 것은 너무 난폭한 논의가 될 것이다. 조루리와 가부키와 신문과 정치소설을 즐기는 민중이라면 마오쩌둥조차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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