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헌터라는 영화를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너무 길고, 또 앞부분이 지루해서 중간에 보다 말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유투브를 켰는데 디어헌터가 무료영화로 올라와있는 것이다. 그래서 눌러서 어렸을 적의 로버트 드니로와 크리스토퍼 월컨과 메릴 스트립과 존 카제인을 보며 영화를 어느새 다 보고 말았다. 특히 크리스토퍼 월컨이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메릴 스트립도 의외로 아주 예쁘게 나왔다.
멸망하는 사이공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한 편의 꿈 같은 이야기다. tenderness. 강. 잿빛 이미지들. 전쟁 체험자들은 누구보다 전쟁을 되풀이하고 싶어하면서, 또 왜 누구보다 밋밋한 것들에 탐닉하게 되는 걸까. 밋밋한 잿빛, 밋밋하게 가라앉는 강, 천천히 흘러가는 배. tender하기 그지없는 디어헌터의 배경음악이 로버트 드니로의 공허한 표정 위로 흐른다.
한 편의 꿈 같은 이야기다. 인물들의 트라우마는 포로로 잡혔던 정글 속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그 테이프 레코더가 재생되는 곳은 이름 모를 프랑스 남자가 안내하는 대체가능한 실내의 도박장, 러시안 룰렛 장이다. 그곳에서는 돈과 쾌감을 위해 총으로 운을 시험하는 내기가 마작처럼, 농사일처럼 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천 년 후에도 그럴 것처럼 반복되고 있다. 이곳이 헤겔이 말하는 역사가 없는 곳이며, 시간이 흐르지 않는 아시아다. 변하지 않는 것은 도박장만이 아니다. 하지만 도박장만이 가장 아련한 공간이 된다. 마이크, 우리 옛날처럼 사냥 가야지. just like the old days. 하지만 모두들 이미 just like the old days일 수 없다는 사실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서 느끼고 있다. 마이크는 사슴을 끝내 쏘지 못한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을 다루는 이 아메리카 영화가 아메리카에 부여하는 한 가닥 도덕심의 상징 같은 것이다. 사냥이라고 러시안 룰렛이나 마작이나 농사일과 다르겠는가. 천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사슴이든 뭐든 사냥할 것이다.
그런데 왜 사슴은 쏘지 않은 마이크가 닉은 쏘는가? 물론 닉이 자기 자신을, 러시안룰렛의 와중에 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마이크였으니, 마이크가 쏜 것이나 다름 없다. 흰 정장의 아저씨가 프랑스어를 계속 유창하게 구사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성을 마구 어필하는 것은 아메리카인들이 프랑스에 대해 갖는 묘한 (대서양을 건너는) 오리엔탈리즘, 신비주의, 모더니즘이 결합된 그 프랑스의 이미지를 얄궂은 도박장까지 질질 끌고간다. 얄궂게도 마이크는 닉을 자신이 죽인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마이크는 닉을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기 위해 게임에 참여해서 충격 요법을 시도한 것이다. 마이크가 닉을 집으로 데리고 가려 한 것은 두 사람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입대하기 전에 고향에서 함께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마이크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멸망하는 사이공에 내려 닉을 찾아간 것이다.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바뀌었지만 도박장만은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이다. 똑같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지폐를 던지고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붉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똑같은 권총으로 똑같은 게임을 반복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약속과 변하지 않는 러시안룰렛이 겹친다. tenderness와 트라우마가 겹친다. 닉의 머리에 구멍이 뚫린다. 마이크는 닉을 얼싸안으며 통곡한다. 그의 통곡을 베트남인들은 재미있게 바라본다. 그것은 특별히 재미있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마이크의 통곡은 베트남인들의 아우성소리와 별로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은 아우성소리도 통곡만큼 재미있게 바라볼 것이다. War is a joke! 그것이 프랑스 아저씨가 했던 말이다. 그 말은 계시처럼 닉의 가슴을 꿰뚫었다. 닉은 그렇게 전쟁 너머로 나아갔다. 전쟁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서 전쟁 같은 현실을 매일 반복하는 것, 유희로서의 죽음을 반복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방법이다. 러시안룰렛 게임장에서 죽음은 적절히 통제된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트라우마 역시 전쟁 같은 현실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며, 죽음충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트라우마에 쓰일 에너지를 러시안룰렛에 모두 소진하는 한 닉에게 트라우마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닉은 참전한 동료들 그 누구보다 건강하다. 왜냐면 그는 자기 일신을 러시안룰렛 도박장으로 만드는 대신, 더 큰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신체인 러시안룰렛 도박장의 일원으로 참가하기 때문이다. 닉은 죽기 전에 one shot?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전쟁에 나가기 전 마이크가 했던 말이다. two shot은 pussy다. one shot이어야 한다. 닉은 two shot으로 자신을 죽인 셈이다. 하지만 마이크가 two shot으로 닉을 죽인 셈이기도 하다. 이미 러시안룰렛이 알려주는 인생의 묘미에 득도해버린 닉은 아마 one shot?이라는 말 속에 무한한 아이러니를 담아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이크가 다 캐치할 수 없었을 정도로. 마이크, 너는 pussy야. 아니라면 내가 pussy인 거겠지. 전쟁이 반드시 사냥이거나 러시안룰렛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이크나 닉에게 전쟁이 반드시 사냥이거나 러시안룰렛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 자신들에게조차 말이다. 전쟁과 정치를 결합하는 데 실패한 미국인 일개 졸병들에게조차 말이다. 전쟁이 사냥이나 러시안룰렛과 동일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이 무의미한 학살극이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도 아니고 의미도 아닌 그 어떤 설명되지 않은, 설명될 수 없는 중간지대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데 있다. 디어헌팅은, 러시안룰렛은 차라리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이고 몸부림이다. 전쟁은 그 자체는 사냥이나 러시안룰렛은 아니지만, 사냥이나 러시안룰렛을 사유하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나왔다. 멸망하는 사이공. 흐르는 강. 프랑스 아저씨. 추억 속의 도박장. 추억 속의 닉. 현실의 닉. 추억과 현실이 겹치는 그곳에서 마이크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다. 전쟁터가 아니라 바로 그곳, 멸망하는 사이공의 어느 외진 오두막집, 겉으로는 그저 불기둥에 휩싸여 모든 것이 멸해가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 오래 전 내가 겪었던, 내가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그리워한다는 사실조차 이제와서야 깨닫게 된, 멸망과 아무 상관도 없는, 멸망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은 반드시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멸망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전쟁을 겪은 자들에게 전쟁은 결코 멸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찾아헤매던 바로 그곳, 마이크가 만난 것은 사실 닉이 아니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떤 백인이었어도 좋다, 닉은 마이크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이크는 닉을 알아본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였던 게 아닐까, 마이크가 이상한 백인을 닉이라고 오인했던 게 아닐까,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마이크는 트라우마와 tenderness의 한가운데 있다, 그날, 닉이 러시안룰렛장에서 권총을 빼앗아 난동을 피우고 자신의 머리에 겨냥해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죽지 않은 채 권총을 던지고 뛰쳐나가 프랑스 아저씨의 차에 타서 달러를 거리에 뿌릴 때, 마이크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이크는 사슴을 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는 쏠 수 있고, 닉의 머리도 쏠 수 있다, 닉을 위해서라면, 닉을 고향에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위해서라면, 하지만 닉은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은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라면 아니다, 여기에서라면 모든 것은 확실하다, 오직 여기에서만 모든 것은 확실하다, 마이크는 닉에게 거듭 방아쇠를 당기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거라면 도대체 왜 경기에 참여한 것인가, 스티븐에게는 계속 당기라고 했는데 말이다, 당기지 말라는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이 들리기도 한다, 마이크는 드디어 그 날의 트라우마를 재연한다, tender한 통곡, tender하게 흐르는 피, tender한 시선들, 다르고 같은 것들, 다르면서 같은 것들, 마이크를 위한 최고의 연극, 두 번 다시 없을, 그러나 매일 반복되는, 연극이면서 현실인, 닉을 사랑하는, 닉을 사랑한다고 굳이 말해야 했던, 너무나도 말하고 싶었던, 정확히 권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눈 채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닉을 사랑하는 마이크, 닉의 러시안룰렛까지 사랑하는 마이크, 닉과 경험한 전쟁까지 사랑하는 마이크,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tender한, trauamtic한, 마이크.
다르게 말해, 이 영화는 마음이 불구가 된 미국인으로 본토에 돌아온 마이크가 베트남인이 되어버린 닉을 죽이는 영화다. 마음이 불구가 된 미국인이 베트남인이 되어 건강해져버린 자를 질투하여 죽임으로써 자신의 정신병을 치료하는 영화다. 이것은 패배주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정신상태가 패배에서 유래함은 물론이고 이런 정신상태에는 패배가 예정되어 있다. 패배한 자들이 언제나 더 오래 살아남아, god bless america를 부르며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맥줏잔을 기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