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보리누름이 시작되기 전 살이 오른 통통한 열매는 보기에도 넉넉하다. 낱알마다 하늘로 쭈뼛쭈뼛 세운 바늘 같은 수염은 사뭇 기세가 등등하다. 그런 보릿가시가 숭숭 뚫어 놓은 하늘 구멍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동남풍이다. 곡우를 지나면서 잦은 봄비에 청보리가 바짝 물이 올랐다. 미풍에 물결치듯 남실거리는 모습은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다. 백곡이 가장 왕성하게 생육하는 이때 아무래도 결실을 먼저 준비하는 것은 보리다. 절기상으로 망종을 전후해 땅을 내주어야 밭갈이를 하고 모를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리 베기와 모내기가 동시에 시작되는 이 시기는 부지깽이라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한다. 그만큼 일손이 부족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의미이다. 보리알이 여물어 가는 청보리밭을 반기는 것은 무엇보다 종달새다. 부화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모습은 장관이다. 낱알을 쪼려고 모여들었다가 인기척이 나면 후다닥 도망갔다. 새 떼는 멀리 붕개 큰 여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날았다. 절도골로 다시 선회하기까지 몇 번의 방향을 바꾸었지만, 끝까지 대오를 흐트러지지 않았다. 새 떼가 내려앉은 술이 큰아버지 논두렁의 완두콩도 함께 여물어 갔다.
청보리밭을 끼고 도는 야트막한 언덕배기에서 가끔 실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꺾어온 보리 대가리가 불에 그을리며 내는 연기였다. 아직 푸른 알곡이라 노릿하게 익으면 조심스럽게 비벼서 재를 털어야 했다. 쭉정이를 골라내면 마른침을 삼키던 입으로 냉큼 집어넣었다. 아사한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알갱이는 입안에서 몇 번을 굴러야 했다. 말랑말랑한 보리알을 우물거리고 있으면 허기진 봄날의 아지랑이도 같이 아른거렸다. 저쪽 연도를 떠난 도선이 월미를 지날 즈음 종달새 한 무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귓구멍이 성가시도록 울렁거렸다. 흡사 몇 개 보리알이라도 나눠달라 떼쓰는 악다구니처럼 들렸다. 모가지를 떼고 쓸모없이 드러누운 보릿대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피리를 만들었다. 줄기의 옆면을 면도날로 긋듯 정확하게 양쪽으로 갈라서 불어주면 맑은소리가 일품이었다. 피리는 길이와 모양에 따라 갖가지 소리를 냈다. 들판으로 울려 퍼지는 보리피리 소리는 여느 앙상블에 뒤지지 않았다. 쏴~ 청 물결이 굽실거리고 지나가면 자랄 대로 자란 청보리가 소롯길을 가렸다. 그 사이를 헤치고 울리는 보리피리가 늦은 봄날 들판 저 멀리 아스라히 퍼져 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