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반도와 사랑에 빠지다
요란한 치장으로 화려한 멋을 내는 번뜩임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무 누추해서 왠지 다가가기가 꺼려지는 그런 주저함도 없습니다. 기억 속의 수더분한 누이의 모습이랄까요? 갈래 묶은 단발 아래로 살짝 드러난 하얀 목선에 마음이 설렜던 오래 전의 그 누이 말입니다.
지금은 도시화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답동에 친구 집이 있었습니다. 농번기를 맞아 농촌 일손을 돕는 가정의 날에 우리가 찾은 곳입니다. 물론 별난 놈들과 함께하는 자율 봉사였습니다.
그러나 벼 베기보다 더 실한 기억은 친구 누나에게 싹텄던 흠모의 정이었습니다. 주말이면 어떤 구실을 핑계 삼아 찾아가곤 했지만 결국 진학을 하고 군대를 가면서 자연스럽게 잊혔습니다.
잊힌 기억에 대한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 어느 날 불현듯이 나타난 고흥반도와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사랑은 너무 강렬하고 온전한 것이라서 선택의 가분성마저 허용되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습니다. 잊고 살았던 아련한 그 무엇이 노스탤지어의 낡은 사진첩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반갑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한산한 길은 번잡함이 없어 한결 여유롭습니다. 단출한 일행은 서로 익숙한 사이라 은연중에 드는 편안함이 분명히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감흥도 편안한 마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맛에 취하고 경치에 취하고 그래서 서로에게 한없이 취할 때만이 진정한 여행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고 늘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묵직한 애마의 엔진이 언제나 그렇듯 가속을 경계하며 달리라고 발끝에서 신호를 보냅니다. 안전이 우선이라고 보내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여수에서 고흥반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얼마 전에 연결되었지만 방향은 보성군 벌교를 거쳐 들어가는 구도로입니다. 고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도로입니다. 아직까지 교통의 오지라 느린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아직까지 많이 미치지 못한 곳이기도 합니다.
서쪽으로 보성과 장흥 그리고 완도를 낀 보성만이 있고 동쪽으로 여수를 접한 순천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두 만을 양쪽으로 낀 고흥 반도의 북쪽 지협, 겨우 2km에 불과한 그곳을 통과해서 고흥으로 곧장 들어가는 도로가 15번 국도입니다. 곧은 신도로를 두고 기어이 느린 길을 택했습니다.
속도는 애초부터 이번 여행의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지쳐있는 빠름의 일상에서 섣불리 이탈할 수 없었던 느림의 여유를 이번 기회에 누려보고 싶었습니다. 시작부터 여행의 단조로움을 미루어 짐작케 합니다.
아무튼 호리병같이 생긴 낯선 반도를 길목부터 훑으며 고흥의 민낯에 천천히 반해볼 작정입니다. 그리고 이곳이 고향인 리오의 유년을 거슬러가는 시간 여행도 함께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리오의 입을 빌린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 기회에 내 고향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감 가는 산야를 접하며 어머니의 따뜻했던 품과 잊고 살았던 고향의 옛 정취도 어렴풋하나마 떠올려 볼 생각입니다.
내가 사랑에 빠진 고흥반도에서 말입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