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리오의 고향으로

어머니의 밭

by 강쌍용



소록도를 출발하여 77번 국도를 따라 풍양과 도화면을 거쳐 포두면에 이르는 길은 고흥반도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풍광입니다.

황톳길을 따라 이어진 도듬진 밭에는 작은 바람에도 일렁이는 자주색 도라지꽃이 유난히 눈길을 끕니다. 그 곁에 웅크리고 앉은 내 어머니 같은 누군가의 어머니가 세월을 가래질하듯 호미로 땅을 긁고 있습니다.

그냥 “어머니”하고 크게 불러봅니다. 필시 내 새끼 목소리는 아닐 터인데, 자식 같은 낯선 이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줍니다. 선한 구김살이 만들어낸 해맑은 얼굴입니다.

밭고랑으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아들과 딸의 도시 생활을 걱정하며 풀을 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쌓여가는 그리움 가슴에 꼭꼭 묻으며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자식들 생각에 애달픈 가슴은 새까맣게 타서 재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애닯고 그리워야 가슴이 타는지 모릅니다. 애달픈 과거든 그리운 과거든 그것은 축적된 경험이 펼쳐놓는 기억 속의 파편 같은 것입니다. 수시로 삐져 나오는 조각들 하나하나에 희노애락의 사연들이채색되어 있을 것입니다.

고향이라고 무작정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끄집어내기도 끔찍한 어렵고 힘든 시절의 파편이 자비 없이 날아들 때의 당혹감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아픈 상흔으로 얼룩졌던 유년을 담담하게 풀어내던 리오가 이따금 훔치던 눈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꽃이 피고 새가 울던 고향의 후덕한 자비는 그리운 것입니다. 멋모르고 달린 들판의 끝에서 아스라이 바라보던 노을빛 그리움 같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의 기억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을 거부 없이 품고 있는 넉넉한 곳이 바로 고향입니다. 나고 자라면서 겹겹이 포개진 진득한 흔적들이 세월의 지층에 흠뻑 절어 있는 안태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가슴 떨리던 수줍음으로 오취리의 갯벌을 건너던 소녀의 유려한 이야기가 마치 비밀처럼 깃들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잊힌 기억은 잊힌 대로 생각나는 기억은 생각나는 대로 저마다 과거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시간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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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복산 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산허리를 돌아 나가자 순식간에 오취리의 개펄이 펼쳐집니다. 어림잡아도 수만 평은 족히 되고도 남아 보입니다.

간조때에 맞춰 드러난 개펄입니다. 만조때는 바닷물이 차올라 바로 눈앞이지만 나룻배로 건너야 했다는 섬 아닌 섬마을 오취리입니다. 물론 지금은 사람이나 차가 왕래할 수 있는 방조제가 생겨 엄밀히 말하면 육지라고 해야 맞는 말입니다.

엄청난 조수 간만의 차이로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바닷물이 순식간에 개펄을 메우고 비우는 장관을 보지 못해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나마 드러난 개펄을 보는 것도 호사라 여기며 위안으로 삼습니다.

개펄을 막고 쌓은 방조제에 때 이른 코스모스와 구절초가 막 꽃잎을 드러내려 합니다. 개펄과 마주하는 끝없는 평야가 한때는 해창만이었습니다. 바닷물이 밀려들던 갯벌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둑을 쌓고 흙을 옮겨 만든 농경지라 하니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농사지을 땅이 모자라던 시절 개펄의 매립은 당시의 상황적 논리에 충분히 타당성을 갖추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간척지가 농산물의 생산에 일익을 담당했다 하더라도 매립 전 개펄의 가치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생태 변화의 부작용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중요성을 더해가는 개펄의 가치는 어떤 수치로도 환가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 개펄이라도 잘 보존해서 후대에 물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해 봅니다.

갯바람이 상큼한 짠 내를 풍기며 코끝을 스쳐갑니다. 잠시 차를 세우고 개펄을 향해 귀를 기울입니다.

둥글게 융기된 작은 성안으로 뻘구멍을 낸 바다 농게가 쉼 없이 들락거리며 먹이 사냥에 여념이 없습니다.

약육강식에 의해 강한 자가 살아남는 비정한 생존의 세계는 개펄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쉭쉭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가 나른하게 지친 몸을 기지개로 활짝 켜게 합니다. 덩달아 힘을 얻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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