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취리의 첫사랑

오취의 달밤

by 강쌍용



눈앞에는 끝 간데없는 방대한 오취리의 개펄이 펼쳐져 있습니다. 문득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어느 봄날 오취리의 첫사랑을 그려 봅니다.

청보리 새순이 물결을 이루고 흠잡을 데 없는 산비둘기 울음이 마곡산 기슭에 울려 퍼지면 개나리며 산수유도 덩달아 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피는 것은 꽃만이 아니었습니다.

주근깨가 도배질한 리오의 어린 가슴에도 연정의 꽃이 피었습니다. 뭔지 모를 아득한 그리움과 까닭도 없이 서럽던 불면의 날들이 한 움큼 쥐여준 것은 비로소 싹트는 사랑이었습니다.

애틋하게 삐져나오는 흠모의 정을 누르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내 오늘은 고백해 보리라!”

물 복숭아 멍울이 막 터지기 시작하던 15살 소녀는 작정하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앳된 얼굴에 착색된 야무진 결의가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깨문 입술의 발랄한 도발이 어찌 되었건 이 에피소드는 여행 내내 일행들의 입에 회자되며 부러움 가득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 애틋한 순애보에 공감하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첫사랑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던 머뭇거림으로 애만 태우던 시절이었습니다. 먼발치에서 혼자 수줍던 희미한 짝사랑의 낯 붉은 기억 말입니다.

망설임과 설렘의 뒤안에서 그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려봅니다. 그리워하는 지난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윤택해집니까? 결국 이루지 못한 미완의 사랑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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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길까지 기어 나온 뻘게를 피하느라 운전이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하찮은 미물이라 여기며 그냥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오취리 개펄의 낮 풍경에 비길 밤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달빛 그윽이 내려앉은 뻘 바다에 사뿐 바람이 일면 침잠하듯 흔들리는 뭍 산들의 실루엣이 기가 차게 아름다울 것이라 여겼습니다.

은가루를 뿌린 듯 출렁이는 윤슬이 점점 사위어가는 새벽 바다에 우두커니 서서 고요히 달빛 세례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 달빛은 언제나 그렇듯 막연함의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명쾌하게 실체를 드러내는 법이 없습니다. 허울에 미혹된 온갖 꼬드김이 자신을 향해 손짓할지라도 쉽사리 넘어가지 않습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 자세는 한결같아서 어떤 유혹도 수용하는 일에 있어 인색합니다. 오히려 견고한 테두리를 두른 채 그저 두루뭉술 인간사를 바라보며 밤하늘에 무심히 떠 있을 뿐입니다.

초연한 성자의 꿋꿋한 기상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로애락의 애타는 사념들을 저마다 달빛 속에 꼭꼭 저장해 두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압니까? 달무리 진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면 아직도 밤잠을 뒤척이는 소녀가 오취리의 짝사랑을 그리며 까마득하게 저 달을 보고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 세월의 바다를 그렇게 건너고 있을지 모릅니다.

달빛 내린 오취리의 개펄을 언제 한번 꼭 보리라 생각하며 길을 떠납니다.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서 더 간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나의 첫사랑도 살며시 떠올려보겠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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