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가슴에 품은 사랑

풋감의 기억

by 강쌍용



천천히 차를 몰아 나로도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고흥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낯선 객들의 탐방이 제법 긴 시간 이어집니다. 너부러진 호박잎이 밭둑을 뒤덮었습니다. 여기에 웃자란 자운영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서로 엉켜 초록 덤불을 이루었습니다.

자운영은 사실 꽃도 꽃이지만 예쁜 이름이 너무 좋아 산수유와 함께 가장 정감이 가는 꽃이기도 합니다. 자줏빛 꽃잎이 늦봄의 들녘에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릴 때면 사무치던 그리움도 함께 밀려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관대한 사랑의 징표를 확인하듯 자운영을 닮은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뿌연 안개가 서려 있었습니다. 좀처럼 실체를 확인해 볼 수 없는, 그래서 더 깊고 아프게 그리워했는지도 모릅니다.

리오의 기다리던 첫사랑 해후가 아마 무르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분위기가 어떠할지 다들 궁금합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마음으로만 짐작할 뿐 선뜻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끈한 차 한 잔에 담아냈을 첫사랑의 향기가 소담스러운 티파니의 홀을 잔잔히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홍조 띤 리오의 엉거주춤한 표정과 어색함은 오래전 첫사랑을 호기롭게 찾았던 당찬 기색과는 역력히 대비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의 무게만큼 가라앉았을 추억의 꾸러미를 다시 건져내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한 번의 만남으로 층층이 쌓였던 짝사랑이자 첫사랑에 대한 결핍을 해소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만난 그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나름의 자존감 또한 다분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이라 해서 사람들은 슬픈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 첫사랑이라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만나서 느끼는 소회는 서로 다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시들해지는 나이에 다시 맛보는 풋감 같은 첫사랑입니다. 완숙하게 절여진 홍시에서 느끼는 풋맛인지도 모릅니다. 오래 전의 풋풋한 기억을 초로의 감성에 덧칠할 수 있다면 인생은 좀 더 넉넉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일행을 찾는 리오의 전화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예상은 적중합니다. 외나로도의 실지렁이처럼 뻗은 아스팔트 길은 아직 한산합니다. 방향을 돌려 티파니로 향하는 모하비가 경쾌하게 질주를 시작하더니 어느새 마복산 기슭을 돌아 나갑니다. 한쪽으로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은 코발트색 바다가 검푸르게 펼쳐져 있습니다. 수면과 어깨를 맞댄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습니다. 막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햇볕에 납작 엎드려 마치 숨을 가다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뜻 룸미러로 보이는 베라 님의 표정이 상념에 잠긴 듯 고요합니다.

“나이 드는 것이 안타깝지만, 아름답게 늙어 갈 수 있다는 것 또한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한 일인 줄 모릅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생애를 관조하듯 던진 말입니다. 담담한 자세가 너무 겸손해서 숙연하기까지 합니다. 너그러움은 오랜 누이 같고, 자상함은 어머니와 같아서 한 번쯤 떼를 써는 응석받이가 되어도 아무렇지 않을 베라입니다. 어느 날이던가 하얀 모시옷을 하느작거리며 유유하게 다가오던 우아함에 깜짝 반한 적이 있습니다. 그냥 팔짱을 끼고 걸으면 연인이라 하여도 아무 손색이 없는 베라입니다.

구김살 없는 표정에 언제나 긍정의 힘이 넘치는 베라의 평소답지 않은 표정에 은근히 신경이 쓰입니다.

“베라 언니처럼 나이 들고 싶어요!” 모두가 닮고 싶어 하는 베라의 심경에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확실히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궁금하지만 쉽게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두어 번 왕래한 길이라고 어느새 지형이 눈에 익습니다. 저 멀리 물이 빠져나간 오취리 갯벌이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외발게의 거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나무랄 데 없는 아름다운 고흥입니다.


티파니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서는 중후한 한 남자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 뒤를 따라 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행을 맞이합니다. 함께 앉은 티 테이블 밖으로 팔영산 자락이 굽이치듯 휘어 돌며 해창만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던, 혹은 누군가의 가슴속에 내가 남아 있던, 모름지기 기억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드러내지 않는 애틋함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 심겨있는 젊은 날의 소중한 씨앗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슴 시린 세레나데의 변주곡이 꺼지지 않고 여운으로 계속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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