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 맺힌 아픈 기억
수심에 젖은 듯한 베라의 표정이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아픈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잘 지내지?”
“응, 그래. 오래간만이네?”
“......! 그렇지!”
“어딘데?”
“여기, 울릉도”
“울릉도는 왜? 멀리 갔네!”
“......!,......!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어.”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일!”
송진이 묻은 것 같은 끈적한 목소리에 약한 쇳소리가 섞였습니다. 건조한 음성이 확실히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왜 그러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뭔가 이상한 감은 있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은 얼마가 지난 후였습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허겁지겁 달려온 애가 난데없이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 소식 들었어?”
“아니, 무슨……?
무슨…… 일인데?”
표정으로 보아 예삿일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순간 전율이 일듯 불안한 예감이 송곳처럼 가슴을 찌릅니다. 예감이 현실로 변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예정된 수순을 밟듯 곧이어 들려오는 소리는 바라던 요행마저 송두리째 허물어 버립니다. 마치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끝 모를 현기증에 머리가 허옇게 셀 것 같은 혼란이었습니다.
“정말 소식 못 들었어!”
......?,......?
설마! 한 가닥 붙들고 있던 탱탱한 밧줄마저 여지없이 끊어져 버립니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확인이라도 하듯 딸의 단호한 음성은 소름이 돋도록 명확하고 냉정했습니다.
“아저씨가 돌아가셨대!”
“으응!”
아, 제발. 막연한 느낌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는데.
그가 왜 갑자기?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선 눈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해 놓는 방법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돌아가셨다고, 누가?”
“응. 방금 소식 들었어!”
“......!,......!”
“아저씨가?”
참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묵은지 같은 친구였습니다. 언제나 곁에서 힘이 되어주던 믿음직한 동행이었습니다. 어디서나 부르면 달려오는 의리 있고 정 많은 남자였습니다. 힘들다고 말하면 말없이 등을 두드리며 추슬러주던 듬직한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로 연인으로 때론 든든한 조력자로 늘 곁에 있어 주던 그의 부재를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날벼락같이 왜?”
저 멀리 갯논의 푸른 벼가 해창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치듯 누웠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결실을 위해 부지런히 모양을 다듬어 가는 중입니다. 언젠가 그와 함께 들었던 나나 무스쿠리의 어매이징 그레이즈가 음표마다 채색된 흔적을 들추듯 은은히 흘러나옵니다.
문득 이 평화로운 티파니의 아침으로 그가 걸어 들어오는 듯합니다. 성큼성큼 걸어와 콧노래로 장단을 맞추며 씨익 웃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곤 길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옆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나 이내 부질없음을 압니다. 감미로운 선율만 스쳐갈 뿐 그가 없는 세상, 그가 앉을 빈자리는 언제나 채울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설렘으로 만나는 리오의 기쁨이 있는가 하면 영원한 이별에 가슴 아파하는 베라의 슬픔도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극명한 삶,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사일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티파니의 창가에 베라의 눈물 한 방울이 살짝 맺혀 있습니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맺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