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긴 이별

by 강쌍용



해거름 녘이었습니다. 담뱃가게 골목길을 돌아나가던 그의 뒷모습이 참 쓸쓸해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그날따라 처진 어깨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지만 선뜻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그를 두고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런 탓에 보내고 나서도 마음이 불편해 한참 동안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까닭을 알 수 없으니 짐작만 할 뿐,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집요한 부산을 떨었지만 그럴수록 애만 탔습니다. 끝내하지 못한 질문은 이렇게 후회로 남았습니다.

리오의 첫사랑 해후를 지켜보는 베라의 물기 어린 눈이 상념에 잠긴 듯 다시 간석지를 바라봅니다. 물끄러미 시선을 준 끝자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필시 보고 싶은 친구의 환영이 어려 있을 것입니다. 안타까움만 더할 뿐입니다. 그가 떠난 빈자리는 너무나 크고 휑해서 쉽사리 무엇으로도 채우기가 힘듭니다.


한껏 빛을 머금은 컬러톤의 싱그러운 이파리가 잿빛 폴리싱 바닥에 잔뜩 그늘을 지었습니다. 군데군데 새긴 줄무늬가 눈을 어룽거리게 합니다. 현란한 멋스러움입니다. 더할 수 없는 쾌적함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차 맛은 깊고 향기로우며 감미롭습니다.

햇살 받은 머그잔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속절없이 부유하다 이내 사라집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던 그날의 충격도 수증기같이 사라지길 바라지만 쉬이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 한편 견고하게 터 잡은 기억의 성을 쉽게 허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어쩌면 그것은 마음속의 신기루로 영원히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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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잊히면 잊힌 대로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불쑥불쑥 떠오르는 순간들이 오늘처럼 오버랩될 때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은 숨길 수 없습니다.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오히려 매몰차게 잊히는 망각보다 때때로 함께했던 추억을 소환해 아련함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곁에 있어 줄 때는 그의 커다란 존재를 미처 다 몰랐습니다. 막상 떠나고 나니 느끼는 회한입니다. 더 할 말도 있었을 텐데 이어가지 못하고 끊어지던 모바일의 버튼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희야, 잘 지내라!”


긴 이별을 예감한듯한 그날, 그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해창만 저쪽에서 다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침잠한 베라의 눈가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이 막 떨어질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습니다.

이렇듯 누구도 불시에 다가올 이별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약한 우리들의 민 모습입니다.

절대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의 순간순간은 언제나 진지해야 하고 엄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생의 유한함이 주는 극치의 한계 앞에서 스스로 작아져야 하고 겸허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더 작아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홀짝거리며 마시던 차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냅니다. 솔가지 사이로 내려앉는 뜨거운 햇살이 남은 하루의 더위를 예고하듯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해창만 논길 사이로 기다랗게 뻗은 길이 돌아갈 방향을 가리키듯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해후가 끝난 티파니 홀을 나서며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마른 소금기로 착색된 베라의 하얀 눈시울 자리에 다시 생기가 감도는 듯합니다.

다시는 슬퍼하지 않으리라!

내려다보고 있을 하늘을 향해 조용히 기도를 올립니다. 푸른 바다의 윤슬이 눈부십니다.

초록의 바람 한 점 쏴~ 귓전을 스쳐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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