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밤비 내리는 하동길

근원의 슬픔

by 강쌍용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달려야 할 모하비가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뜬금없이 88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일행들의 수다에 잠시 정신이 쏠린 탓에 분명 나들목에서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귀가 시간은 자꾸 늦어집니다. 별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선 가장 가깝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구례로 나가 다시 광양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섬진강으로 흘러내리는 얕은 강을 따라가다가 어떻게 던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기억이 맞다면 길 양옆으로 늘어선 오래된 벚나무의 대열이 장관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동을 거쳐 국도를 타고 가다 가까운 나들목에서 다시 남해고속도로로 올려야 합니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한다면 아마 대구 쪽으로 방향을 잡아 줄 것입니다. 곧장 대전통영고속도로를 거쳐야 할 것이고, 진주 IC에서 부산으로 향하게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때론 과학적으로 축적된 기기의 편리함보다는 경험된 예측이 훨씬 유용할 때도 많습니다. 주저 없이 페달을 밟습니다. 여태껏 참아주던 빗방울이 한 방울씩 차창에 다시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뒷좌석에서 갑자기 리오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에서 어린 시절의 가난을 떠올리며 많이 힘들어했던 리오였습니다. 참 서러웠을 것입니다. 간간이 들려주던 슬픈 유년의 이야기 속에 언뜻언뜻 비치던 쓸쓸한 표정은 애써 감춘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명되지 않은 기억이 쏟아내는 통한의 눈물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을 고백한 리오의 눈물샘을 무너뜨린 것은 리오의 손금 때문이었습니다. 어지럽고 복잡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는 베라의 따뜻한 위로가 오히려 리오의 가슴을 온통 흔들었습니다.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졌습니다.

근원의 슬픔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늘 사람의 감정에 기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계기가 되면 삽시간에 분출할 수 있는 마그마와 같습니다. 내밀한 감정의 응어리가 용융되어 나올 때의 복받침은 너무 사무치는 것이라서 섣부른 위로로 그치지 않는 맹렬함이 있습니다. 손 쓸 틈도 없이 흘러내리는 거친 용암류의 진격과도 같습니다. 모두 소진하고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야 스스로 멎는 속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빗소리에 섞인 로사리오의 울음이 한동안 계속됩니다. 너무 깊고 절절해서 듣는 이의 마음까지 울게 만듭니다. 일행들은 그저 기다려 줍니다. 원천에서 분출된 눈물샘을 애써 막으려 기 보다는 어깨를 두드려 주며 공감해 줄 뿐입니다.

서로 교감하지 않으면 나누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눈물도 참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이따금 보이는 이정표도 눈물에 취한 듯 비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눈물로 쏟아낸 후련함은 이제 뒤끝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 내리는 밤길이 너무 한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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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맞아떨어집니다. 섬진강을 따라 늙은 벚나무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마치 길 잃은 객들을 안내하듯 비를 맞으며 길게 도열해 있습니다. 지리산을 왼편에 두고 밤길을 헤쳐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도 굵은 빗방울이 요란합니다. 사선을 그으며 차창에 부딪치는가 싶더니 이내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흡사 리오의 눈물방울 같습니다.

강변 중간중간에 이루고 있을 금모래와 이를 휘감고 흐르는 강물은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수면에는 수많은 동그라미가 새겨지고 있을 것입니다. 젊은 날 이곳을 거쳐 갔던 오래 전의 그날을 떠올려 봅니다. 아득합니다.

밤새 비가 내리면 물이 불은 섬진강에는 또 다른 모래톱이 생겨날 것입니다. 상류의 부산물이 퇴적된 또 하나의 흔적은, 어쩌면 우리 인생이 새기는 굴곡과 많이 닮았습니다. 어느 곳에 만들어질지 가늠할 수 없는 모래톱처럼 인생의 변곡점도 어디에서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차를 몰아갑니다.

하동을 들어설 무렵 겨우 리오의 울음이 멎습니다.

곧 평정심을 되찾아가는 리오가 대견스럽습니다. 애써 감추기보다 진솔한 슬픔을 뱉어낼 수 있는 순수야말로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내리는 빗줄기가 점점 심해집니다. 귀갓길을 재촉하는 초침도 덩달아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길게 뻗은 남해고속도로가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과 함께 하염 없이 비에 젖고 있습니다.

이제껏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며, 또 살아가야 하는 날들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는 귀중한 귀갓길입니다. 이렇듯 알게 모르게 인생은 성숙해 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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