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의 풍경
낯선 곳 낯선 경험은 누구에게나 호기심과 함께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선뜻 떠나기를 주저합니다. 이번 여행은 고흥이 안태 고향인 리오의 역할이 컸습니다. 훌륭한 길잡이였을 뿐 아니라 유년에 얽힌 아픈 기억까지 들려주며 이 여행을 기름지게 했습니다.
비록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무작정 즐거움만 추구하는 맹목적인 여행이 아니라 삶의 뒤안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숨 막히는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는 여유가 이처럼 생을 따뜻하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래 전의 고향과 어머니의 포근한 정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었습니다. 참 넉넉하고 여유로운 일정이었습니다.
아무리 풍부한 상상력이라 해도 경험은 언제나 사고에 우선합니다. 보고 느끼고 만지는 객관적인 체험은 막연함을 구체화시키는 명쾌함이 있습니다. 가봄으로써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의 묘미였습니다.
시골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당면한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지만, 위정자들이 더 많이 고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라 여겼습니다.
떠나는 농촌이 아니라 돌아오고 찾아오는 농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의 본질도 애초부터 흙과 바람과 물에서 시작된 것이고 보면 결코 허투루 여길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알찬 여행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가는 야박한 세태입니다. 이 여행의 빌미가 되어준 지난 몇 년간의 값진 봉사 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소박한 사옥 하나 마련하겠다고 시작한 모금운동이었습니다. 십시일반 조금씩 보태는 가운데 매실 따고 아로니아 따서 판매하는 일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르면 ‘힘들다.’ 말하지 않고 언제나 공동체를 위해서 흔쾌히 달려와 주었던 노고에 감사의 표시를 겸하고 싶었습니다. 더위에, 벌레에, 풀독에 온몸이 만신창이 되도록 땀 흘렸습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은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주었습니다.
코피를 쏟아가는 열정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교차했던 만감은 이윤 없는 봉사에 때론 의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어떤 결과물을 위해서 꼭 지금을 희생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적당히 생색만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어려운 길을 묵묵히 같이 걸어주었던 마음이 한없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러한 동행들의 노고를 알기에 문득 이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행복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잡아둔 초안을 뒤적거리며 투박하게 두드리는 좌판이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소박하게 마련할 우리 공동체의 아담한 집을 그려봅니다.
양지바른 사옥 낮은 담장 아래 희끗희끗 머리가 샌 할멈들이 오순도순 앉아 있습니다. 나누는 이야기에 흠뻑 빠진 표정이 너무 밝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십수 연도 더 지난 고흥 갔던 이야기입니다 어찌 재미나게 나누는지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담장을 고치던 용이 할아버지가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며 중얼거립니다.
“그래, 정말 그때가 좋았지!”
멀지 않은 훗날의 풍경입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세월은 너무 쏜살같아서 바로 내일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머지않은 훗날이란 바로 가까이 있는 내일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필력이 약해 재미나게 들려주지 못한 고흥 이야기는 기억을 다시 더듬어 갈 일행들이 보충하리라 생각합니다. 귀찮다 여기 않으면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재미도 쏠쏠할 것입니다.
두서없는 글 읽느라 짜증 났을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가면 자동으로 지워지는 파일이니 따로 수고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어제오늘 봄 같은 겨울 날씨라 이른 바람날까 염려됩니다.
막막한 밤바다 저 불빛 따라가다 보면 오취의 개펄 거친 숨구멍 소리 다시 들릴 것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