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저 계급론.

슬픈 장관.

by silvery rain 이혜영

나의 네 번째 알바는 한국은행이다.


그전에 주말 동안 단기 알바를 했다. 제약회사에서 거래 약국들에 광고문을 보내는 알바였다. 준비된 광고지를 곱게 접어 편지 봉투에 넣고,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이는, 현재는 거의 사라진 수공업 알바였다.

일도 힘들지 않았고, 점심도 맛있었고, 수입도 짭짤한, 꿀 알바였다. 점심을 먹고 약간의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높으신 분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우리를 불렀다. 그 아저씨는 특히 내게 관심을 보였다. 자기 조카와 내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다닌다는 이유였다. 나보다는 선배였던, 그 조카. 그가 누구인지는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알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후, 그는 그 제약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이런 족벌체제! 금수저 같으니라고!




금수저와 흙수저는 이제 신조어가 아니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에 등재된 언어가 됐고, 수저 계급론이란 단어가 지식백과사전에 등재되어있다.


수저론은 서양의 속담에서 유래한다.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

태어날 때부터 꽤 괜찮은 집안이어서 인생을 쉽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속담의 시대 배경은 신분제 사회였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왜 난데없이 신분제의 개념이 생겼을까?

신분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패배감과 절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사실 알고 있지만.) 사다리가 없어졌다. 개천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용이 정상에 오르자마자 사다리를 불태워 버렸다.

사다리를 없앤 명분은 학업 스트레스와 경쟁사회였다. 학업 스트레스를 없애고, 지긋지긋한 경쟁사회를 지양하자는 것.


-공부하기 힘들지? 하지 마. 학교에선 친구들과 뛰어놀아. 대학 가고 싶으면 학원 가서 공부해. 돈은 쫌 많이 들겠지만, 너라면 할 수 있어.

-공부해서 대학 가는 것도 힘들지? 눈치껏 하면 돼. 부모를 잘 만나면 좋은데...

아니면 다시 태어나는 것도 괜찮고.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의 지양을 위해 도입한 수시 지원과 수능은, 불안한 수험생과 학부모를 '학원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고, 각종 전형으로 '눈치게임'과 '편법'을 자행하게 만들었다.


-사법시험 준비하느라 아까운 청춘 낭비하지 말고, 판·검사하고 싶으면, 로스쿨 가세요.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돈은 쫌 많이 비싸요.


사법시험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청년들을 위해서, 시험을 아예 없애버렸다.


뜨거운 불 속에서 은은 960도에 녹고, 금은 1,063도에 녹지만, 1,200도를 버텨낸 흙은 아름다운 도자기가 된다.......?

그럼 모두 흙 해야 되겠네? 아름다운 도자기 되게.

그러려면 금과 은이 가진 성질을 모두 없애야 하는데, 어떡하나? 다 포기하고 모두 흙 해야 되나?


대안은 있다. 사다리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반지하와 지상을 잇는 사다리.

계층과 계층 간의 사다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다리.


사다리를 다시 만들어서 ‘금’할 놈은 ‘금’하고, ‘은’할 놈은 ‘은’하고. ‘흙’처럼 살고 싶은 놈은 ‘흙’으로 살면 된다.


능력 위주의 사회, 경쟁사회일 때는 몰랐다. 자신의 능력으로 뒤집기가 가능하고,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 사회인지.






아, 이제 한국은행의 얘기를 해야지. 우리나라 은행 중의 은행, 중앙은행, 돈 만드는 은행.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도 멋지고, 안은 고급스럽고, 식당도 끝내주는. 무엇보다,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던 곳.


80년대 말의 은행 직원들은 상고 출신이 대다수였다.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버는 것이 효도였다. 그래서 공부는 잘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 착한(?) 자식들은 대입 대신 취업을 선택했다. 그들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이 은행이었고, 그중에서도 한국은행은 상고의 수재들이 가는 첫손가락이었다.


한 집안을 이끌어갈 머리 좋은 그들. 형제자매를 공부시키고 먹여 살릴 성실한 그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를 봉양해야만 하는, 착한 그들. 하지만 그들은 착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착함을 강요받던 사회였으니까.

암튼 그 성실하고, 착한 은행원들은 거의 전부가 야간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남자 직원들은 대부분 법대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사다리 얘기가 나와야 하지만, 그 얘기는 그만둬야겠다. 죽은 자식 뭐 만지기니까.


사다리가 없어진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났을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한국은행에서 나는 업무 보조를 했다. 내가 하는 업무는 수백 장의 복사, 복사, 복사.

복사한 용지들을 본사와 지점을 오가며 배달.

일반은행 심부름.


당시의 은행, 특히 남대문 쪽의 은행들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수많은 상인과 직장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기 때문에 대기 시간은 최소 한 시간 이상이었다. 게다가 방송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 불릴지 모르는 내 번호에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가끔 내 번호를 놓쳐 뒤로 밀리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명이 부탁한 은행 업무를 보고 나면 시간이 엄청나게 지나있었고, 기다릴 뿐이었는데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곤 했다.


남대문과 명동 일대를 활보하던 어리숙한 내 모습이 떠오르면 우습기도 하지만 스릴감도 든다. 여러 건의 은행 심부름으로 난 꽤 많은 양의 돈을 가방 안에 넣고 다녔다. 촌스럽고, 어리숙하고, 여전히 고등학생 같던 나의 비밀을 남대문 명동 일대의 소매치기들은 꿈도 못 꿨을 거다. 내 가방 안에 숨죽이고 있던 거금의 비밀을.


여담 들어간다. 한국은행에서 흐뭇하고도 진귀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일 층높이로 쌓여있던 배춧잎 위에 앉아계신, 세종대왕의 찬란한 위용. 그 어마어마한 양의 만원 지폐 블록. ‘돈 벽돌’을 나르던 트랙터의 공룡 같은 모습.


참으로 흐뭇하고도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라 슬픈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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