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왕십리엔 전태일이 없다.

시키야!

by silvery rain 이혜영

나의 다섯 번째 알바는 공장이었다.


신입생의 설레는 첫 방학. 친구들은 산과 바다로 여행이나 수련회를 떠났고, 난 방학 다음 날부터 공장으로 출근했다. 다른 알바 자리는 시간제라 돈이 안 되는 관계로, 방학 동안만이라도 진득하게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방학 동안 죽어라 벌어야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웃픈 것은 방학 동안 알바 두세 개를 섭렵해 돈을 마련해도 남몰래 인상된 등록금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다닌 공장은 전태일 공의 청계천이 아니고 왕십리였다. 전철역 지명도 맘에 안 들었다. 너무 싼 티 나고 촌스러운 명칭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공장으로 일하러 간다는 것이 싫었다.

이건 내 솔직한 생각이다. 당시의 나는 하늘만 봐도 행복했고, 캠퍼스의 일렁이는 아지랑이에도 사랑을 느꼈고,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에도 설렜던,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대학 신입생이었다. 그래서 남들처럼 놀고 싶었고, 맘껏 책도 읽고 싶었고, 미팅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공장 출근이라니, 처음부터 망설여졌다.

왕십리에는 공장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곳이 서울 한복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고, 무질서했다. 다양한 공장단지를 지나 도착한 곳에는 회색 시멘트 알몸의 군수품 공장이 애처로이 서 있었다. 그곳이 내가 다닐 공장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내 또래인듯한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 중엔 휴학한 대학생도 있었다.

총알의 부품을 만드는 그곳은 쇳내가 가득했고, 쇠를 갈 때 나는 시끄러운 금속성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담당한 일은 너트에 막대를 끼우는 것이었다. 그 일은 복층구조의 천장 밑 다락방에서 여자들끼리 했다. 그 방은 허리를 펴고 서 있을 수 없는, 앉아서야 고개를 들 수 있는, 그런 방이었다.

가끔 남자 공원들이 올라와 일을 돕는답시고 노닥거렸는데, 그들은 너트에 막대를 끼우는 작업을 빗대어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역시 그런 쪽으로도 맹물이었던 나는 그런 말도 못 알아들었다. 따라서 나한테는 성희롱도 먹히지 않았다. 이 자리를 빌어 나보다 두 살 어렸던, 그노무 시키한테 한마디 하겠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누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따구 못된 말이나 씨부리고!

이노무 시키! 그땐 몰랐지만 이젠 다 안다.

이노무 시키야, 그때는 싸가지 없는 시키였지만, 지금은 좋은 어른이 되었길 바란다.

이노무 시키야!”




또 여담이다. 요즘은 성 인지 감수성이란 단어도 있고, 인터넷만 열면 성범죄에 대한 뉴스가 종종 눈에 띄지만, 당시엔 성범죄를 숨기기 바빴다. 따라서 성희롱을 당해도 성희롱인지 몰랐고, 가벼운 성추행-살짝 끌어안는다거나, 어깨나 다리에 손을 얻는 행위 등-의 경우에는 ‘이게 뭐지?’라는 찜찜한 기분과 알 수 없는 불쾌감만을 느낄 뿐, 말도 못 하고 속앓이를 하곤 했다.

대학가에서도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성적인 농담, 성적인 노래, 개인에 따라서는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접촉 같은 것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당하는 사람도 NO!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했지만, 가해자들은 NO. 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는 남자, 피해자는 여자라는 인식도 뿌리 박혀 있었다. 참 무지하고 비상식적인 사회였다. 제대로 된 성 의식을 갖추지 못한, 그 시대에 살았던 청년들이 현재 사회 지도층(?)이란 것이 되어 저지르고 있는 성범죄를 보면, 노란 싹은 키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암튼, 공장은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일이 힘들었다기보다는 문화가 나랑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있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진 못했지만, 피부가 하얗고 곱상하게 생긴 남학생. 묵묵히 일하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였던, 그의 암울하던 표정과 눈빛이 가끔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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