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내내 알바를 전전하며 학교를 다녔다. 1년 동안 남은 것은 알바 경험뿐이었다. ABC비스킷 같은 성적표를 받아 들고 한참 동안 고민을 했다. 결론은 휴학. 이제 돈 벌면서 공부하기에 지쳤다. 1년 동안 돈을 벌고, 그다음엔 학교만 다니자.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휴학하고 학생처의 소개로 증권회사 업무보조로 들어갔다. 하는 일은 증권시세 문의에 대한 전화응대, 업무보조... 이, 업무보조란 것이 참! 요망한 것이다. 업무보조란 명칭 하에 모든 것이 포함되니까. 복사도 업무보조, 은행 심부름도 업무보조, 탕비실 정리 및 청소도 업무보조, 스타킹 · 생리대 심부름도 업무보조, 커피 심부름도 업무보조, 담배 심부름도 업무보조... 말이 업무보조지, 마당쇠나 향단이의 역할이었다.
일단 증권시세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보겠다. 지금은 휴대폰으로도 증권거래를 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세상이지만, 당시는 직접 증권사에 가서 하루 종일 뻗대고 앉아 전광판 시세를 들여다보거나, 증시를 보러 올 수 없는 사람들은 시세를 전화로 묻거나 했다.
우리 알바생들의, 나 말고도 둘이 더 있었다, 책상은 제일 안쪽 부지점장과 같은 라인에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들의 눈엔 시세판이 있는 홀과 직원들의 뒷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장관과 가관을 오가는 경관이었다. 안개, 자욱한 안갯속에서 심각한 고뇌에 차 있는 사람들. 여기서 안개란, 담배연기를 말한다. 그때는 금연이라는 것도 없었고, 비흡연자에 대한 배려도 없었기 때문에 사방에서 담배를 피워댔다. 증시가 오르던 내리던 담배연기는 늘 변함이 없었다.
내 아버지도 흡연자였다. 하루에 담배 한 갑 반을 태우시던, 골초. 난 지금도 습관처럼, 가래가 낀 것처럼 헛기침을 한다. 아버지와 증권사의 흡연자들이 준 유산이다. 왜 유산이냐 하면,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그들도 돌아갔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담배를 피워댔는데, 폐암에 걸리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고객들 중에 진하게!라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나의 고객은 아니다. 나한테는 진상이었다. 그들(증권맨들)의 고객이 왜 나한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지,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게 바로 그것에 포함된 것이다. '업무보조.'
출근하다시피 증권사로 와서 하루 종일 앉아있던, 할 일 없어 보이던 그들. 그들이 사실은 백수가 아니라, 엄청난 돈을 주무르던 고객들이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난 1년 동안의 나는 알바로 단련되어 이젠 부당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줄 아는 싸가지를 지니게 됐다.
하루는 진하게! 가 커피를 리콜했다. 너무 싱겁다는 것이다.
얻어먹는 주제에!
짜증이 확 밀려왔다.
좋다. 진하게 타 주지.
물을 평상시의 삼분의 이만 넣고, 커피믹스 3개를 섞어-침도 섞고 싶었지만, 난 상당히 양심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패스- 갖다 주었다.
진하게! 가 맛보면서 하는 말,
"어! 좋았어. 앞으로도 이렇게!"
졌다. 진하게! 에게 징하게! 졌다. 돈 버는 놈은 뭐가 달라도 달랐던 모양이다.
한 번은 차장들 중의 한 양반이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나 말고 고등학생 알바한테.
"언니, 나 심부름 갔다 올게."
"어디?"
"담배 심부름."
"담배 심부름? 누가?"
"A차장님이."
"그래? 같이 가자."
갔다 와서 A차장님께 말했다.
"차장님, 담배 심부름은 좀 그래요."
"뭐가 그래?"
"우리 아직 학생이라서, 담배 파는 사람들도 이상하게 쳐다보고, 다른 사람들도 안 좋은 눈으로 쳐다보고. 좀 그랬어요. 창피하기도 하고."
"그래? 어! 미안해, 미안해."
어라? 이렇게 흔쾌히 미안하다고 하다니!
역시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해선 안 되는구나.
-무스 발라 넘긴 헤어스타일, 오지게 멋 낸, 비싸 보이는 양복과 구두, 어찌 보면 단호하고 어찌 보면 냉정해 보이는 표정, 짙은 향수 냄새-
약간은 비호감처럼 보였던 그가 사실은 호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 순간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런 경우, 버릇없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여담으로 고등학생 알바 얘기 좀 하겠다. 지금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인생친구가 된 아이다. 그 아이는 천녀유혼의 왕조현을 닮은 외모로, 눈에 확 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활달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에, 바른 생각까지. 그 아이는 전날 있었던 일들을 내게 얘기하곤 했다.
"언니, 있잖아요. 어제는요. 내 친구랑 영화를 봤다요. 천녀유혼을 봤는데요."
"언니, 있잖아요. 어제는요. 친구들이랑 우리 집에 모여서 놀았다요. 요즘 이 춤이 유행이다요."
탕비실에서 토끼춤, 말춤을 추던 그 아이. 내가 알바를 그만둘 때 같이 그만두더니, 알바한 돈으로 주식을 사서 열 배 이상 불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 유학을 가고, 유학 갔다 와서는 비행기까지 운행하는 여행사를 차렸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자, 다 접고 아이만 키우는 좋은 엄마로 살고 있다.
아이 엄마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 아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인생은 깨어있으면 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