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경력 1년 6개월 만에 바뀐 내 표정이다. 언제부터 무표정이 되었는지, 왜 무표정이 되어버렸는지 몰랐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는 자꾸 불만이 쌓여만 갔다. 월급 십여만 원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고, 때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무엇보다 날 화나게 했던 것은, 나와는 처지가 달랐던 사람들의 씀씀이였다. 한 끼 식사로 내 월급을 지불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 하룻밤의 파티로 내 월급의 10배를 쓰고도 뿌듯해하던 사람들. 그게 나를 화나게 했다.
'이런 불공평이 말이 돼?'라는 생각이 매일 머릿속을 지배했다. 게다가 시대가 날 화내라고 부추겼다.
내가 다녔던 증권회사는 명동에 있었다. 80년대 후반의 명동성당은 데모 장소의 메카였다. 오후에 학생들이 성당 주변으로 모여드는 낌새가 보이면 모든 창문을 닫고 평소와 같이 일했다. 하지만 마음만은 평소와 같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학생이었으니까. 하나둘 모여들던 학생들이 명동성당 일대에 운집하면 그때부터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들과 합류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난 등록금이 아쉬웠다. 그것도 날 화나게 한 요소 중 하나였다. 좋든 싫든, 모든 것을 돈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게 날 미치도록 화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하다. 그때의 피 끓는 청춘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화가 현재의 민주화일까? 그때 비명에 간 청춘들은, 자신의 동료였던 사람들이 누리는 현재의 영화를 예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현재의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나의 결론은 이렇다. 죽은 사람들만 불쌍하다.
너무 심각해졌다. 빵 얘기를 해보자. 명동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빵집이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바로 방'이었을 것이다.
오전 10시쯤 빵집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는 사람의 위장을 녹였다. 그중에서 페스츄리 안에 카스텔라를 품고 있던 빵이 있었는데 매우, 정말, 무지하게 맛있었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카스텔라가 쫄깃하고 바삭한 페스츄리 이불에 감싸여 있는 비주얼. 손으로 잘라 입에 넣으면, 따끈하고 바삭한 식감과 사르르 녹는 카스텔라의 식감이 동시에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알바생들의 고된 피로와 스트레스를 날려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런데 그런 동네빵집들이 자꾸 문을 닫는다. 우리 동네의 빵집도 그랬다. 미니 슈크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들던 곳이었다. 연세 지긋한 아저씨가 제빵을 담당하고 그의 부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손님들을 응대하거나 마주 보진 않았지만, 자부심 가득했던 그의 표정.
'어때? 이것들아! 내 빵 맛있지?'
그 지긋함이 사라지고 빵집이 젊어지고 있다. 프랜차이즈와 브랜드로. 젊은이들의 살길이 열리는 것은 좋지만, 나이 든 이들도 공존하면 좋겠다. LP와 CD의 공존. 클래식과 하드 락의 공존. 발라드와 댄스음악의 공존. 젊은것과 늙은 것의 공존. 기계와 인간의 공존. 인간과 동물의 공존. 그만하자.
하루는 지점장이 날 불렀다.
"미스 L"
외쿡 물을 많이 드셔서인지 지점장은 우리를 '미스 머시기'라고 불렀다. 그러다 불쾌한 내색을 팍팍 하니까 좀 바뀌기는 했다. 'L 양'이라고.
암튼, 날 왜 불렀냐 하면 심부름. 그것도 지점장의 럭셔리 차도 내주고, 운전기사까지 붙여준, 꽤 먼 곳까지의 심부름. 주식투자를 원하는 아주 바쁜 고객의 돈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1억.
그때의 1억은 현재 가치로 얼마쯤 될까? 지점장은 아주 오랫동안 신신당부를 했다. 조심하고, 서류 잘 받아오고 기타 등등. 운전기사 아저씨는 모르게, 비밀! 왜지?
멋진 검은색 중형차를 타고 출발. 조마조마할 것 같지만, 신났다.
아싸! 땡땡이다.
운전기사 아저씨랑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고객을 기다릴 땐 맛있는 음료수도 먹고.
'이런 애한테 큰돈을 맡겨도 될까?' 하는 미심쩍은 눈빛도 받아보고.
수표를 받아서 돌아올 땐 좀 긴장했다. 바람에 날려서 날아가 버릴까 봐.
중대한 '업무'를 해내고 증권회사 엘리베이터를 내렸을 때, 위풍당당한 나의 모습. 개선장군 같은 나의 모습~
"왜 이렇게 늦게 와? 얼마나 바빴는지 아니?"
한 학년 위인 언니 알바가 물었다.
"지점장님 심부름 갔다 왔다니까."
"어디까지 갔다 왔는데?"
"과천. 지점장님 차 타고 갔다 왔다."
"진짜? 뭐? 무슨 심부름?"
"돈."
"얼마나?"
"몰라도 돼. 암튼 엄청 큰돈이야. 비밀~"
"그런 심부름을 왜 너한테 시켜?"
"글쎄~"
‘그나저나 그 냥반은 도대체 날 어떻게 믿고 그런 심부름을 시켰대?’
잠시 고민,
'뭐, 그깟 돈 몇 푼에 인생을 날려버릴 나는 아니니까? 하긴 내 도덕성을 시험하기에 1억은 너~무 적은 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