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테見立て. 다시 봄이라는 뜻의 일본어 단어가 다시 떠오른 것은 동네 수육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을 때였다. 집집마다 하나씩 흔하게 있었던, 그러다 유행에 밀려 대문 밖에서 한뎃바람을 맞는 모습 역시 흔하게 보였던 자개장, 그 장의 문짝 하나가 식당 모퉁이 한쪽에 액자처럼 걸려 있었다. 위아래로 길어 수묵화를 배접한 족자 같았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표현이겠다. 그 문짝에는 검정을 배경으로, 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을 미묘하게 바꾸는 소나무와 두루미의 어울림이 새겨져 있었다. 다채롭다 할 수도, 모노톤이라 할 수도 없어 미묘하다고밖에 묘사할 수 없는 색이자 빛이었다. 그 문짝에 눈을 고정한 채 밥을 먹었다. 자개장의 문짝을 하나의 작품으로 다시 본 주인장의 안목에 경의가 일었다. ‘할머니 방의 유물’로 불리는 오명과, 그에 앞서 가구라는 원래의 용도를 잊게 한 그 안목에 말이다.
‘미타테’를 알게 된 것은 일본 다도의 완성자라 불리는 센노리큐千利休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는 과정에서였다. 그는 화려하게 빛나고 값비싼, 당물唐物이라 불리는 차도구들 대신에 농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먹먹한 색조의 잡기들을 다도의 자리에 대수롭지 않게 꺼내놓았다. 이 물건이 어디서 온 것인지, 이 물건의 원래 쓰임새가 무엇인지에 개의치 않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판을 살피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본디의 출처와 용도를 잊고 다시 봄에 온 맘을 기울인 까닭이다.
미타테. ‘보고 판단하다’ ‘고르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미타테루見立てる’의 명사형인 미타테를 문자 그대로 풀어 견見 옆의 서다는 뜻의 입立에 유의한다면 서서 본다는 의미가 된다. 見은 견해라는 더 너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입立 역시 입장이라는 더 나아간 뜻을 품고 있으니 어떠한 입장이나 상황에서 보는가에 따라 보는 바와 그에 대한 견해, 의견, 생각이 달리 생긴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보는 것. 남들이 보는 자리에서 비켜나서, 다들 그렇다 하는 견해에서 벗어나서 보는 것. 사물의 키가 낮다면 서 있는 내 몸을 그대로 낮추어 눈높이를 같게 하고 잠자코 보는 것. 매일 같이 보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안일한 마음과 식상한 눈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유심히 보는 것. 그렇게 보면 다시 보인다. 물건의 형태, 빛깔, 질감 같은 외형적이고 감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쓰임새 역시 다시 보인다. 하찮은 것을 귀하게 사용하게 될 수도, 귀한 것을 무심하게 다루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용無用의 미덕을 발견하게 될지도, 더 나아가 무용과 유용의 분별을 넘어서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 물건에만 해당할까. 우리가 지나고 있는 시간도, 우리를 담고 있는 공간도,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까지 다시 보인다. 혹, 서게[立] 되는 건 본다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나 자신을 둘러싼 모든 걸 새롭게 보려는 의지일까.
알맹이가 빠져 쓸모 없는 울퉁불퉁한 조개껍데기를 그 형태와 무용에 눈을 두지 않고 미묘한 빛깔이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원천으로 다시 본 이. 껍데기를 갈고 마름질하고 닦아내 보석으로 탈바꿈시켜야 하는 다단한 수고를 기꺼이 받아들인 이. 그이가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것에는 또 무엇이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흔한 것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은, 늘 지나치지만 단 한번도 오랜 눈길을 주지 않았던 그 흔한 것들은 흔하지 않은 눈으로 다시 봄에 의해 애초에 태어난 것들이리라. 이 세상 아무데나 있으나 아무렇게나 나온 것 하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