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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May 04. 2023

현玄과 소素

일정한 리듬을 내며 커피콩 갈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 서서히 절정으로 향하는 물 끓는 소리도 한 박자 거든다. 메마른 땅 위로 빗물이 길을 내듯 뜨거운 물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면 흙과 불과 물이 만나 함께 빚어낸 색감이 다소곳이 한 곳에 모인다.  


유려한 곡선과 부유스름한 빛깔을 수줍은 듯 드러낸 머그잔에 부드럽게 커피 물을 붓는다. 수위가 높아질수록 갈색의 농도는 점차 짙어지고 바닥의 깊이는 이내 지워진다. 커피 물의 현색玄色과 머그잔의 소색素色이 만들어내는 콘트라스트가 차라리 조화롭다.  


현玄은 검다는 뜻이 아니라 가물거린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깊은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에 오묘하다, 고요하다, 아득하다라는 뜻 또한 있는 것이다. 그 높이를 쉬이 가늠할 수 없기에 천자문에서 현은 하늘을 뜻한다. (누를 황黃은 땅을 뜻한다.) 이론이 깊어 깨우치기에 어려운 학문을 현학玄學이라고 한다. 깊고 어두운 음색을 지닌 거문고를 현금玄琴이라고 한다. 깊고 묘한 이치에 드는 문을 현관玄關이라 한다. 


엄마의 뱃속도, 리큐의 다실도 모두 현의 공간이다. 이 어둡고 깊은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새로운 의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동시에 현은 소멸의 시간이다. 그윽하고 신비로운 유현幽玄의 순간은 세간의 분별이 모두 사라지는 경지에 이를 때에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잉태하는 현의 공간 그 자체이기도 하다. 현의 세계에서는 시작도 끝도, 시간도 공간도 모두 자신의 윤곽을 잃어버린다.*

 

소素는 희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본디의 빛깔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꾸민 데 없이 소박하다. 또한 텅 비어 있는 색이기에 다른 색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처음이라는 의미도 있다. 창작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소재素材라 하고 색을 입히기 전의 단계를 소묘素描라고 한다. 물결 일지 않은 매일같은 하루하루를 평소平素라 하고, 타고난 재주를 소질素質이라 한다.  


하지만 본연의 성질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불변의 것이 아니다.**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은행잎은 때에 따라 초록을 띠기도 하고, 노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때문에 초록도 노랑도 모두 은행잎의 소색이 된다. 땅에 떨어지고 끝내 썩어 새잎을 위한 거름이 되면 은행잎의 소색은 흙색이 된다. 스스로[自] 그렇게[然] 된 색이다.*** 세사世事는 우리에게 하얀 것을 하얗게 유지시키는 유위有爲를 요구하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손때에 점차 누렇게 물들어 가는 것에 순응하는 무위無爲의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친다. 무위와 유위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잡으라고 가르친다. 


매일 아침, 커피와 함께 현과 소의 빛깔을 마신다. 현관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향하면 온갖 색깔이 내 감각을 뒤흔들지만 이 오묘한 것들로 하루의 정초를 삼았기에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


      

* 노자는 현을 모든 오묘함이 드나드는 문이라 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덕경』.

** 율곡은 불변의 이치를 본연지성으로, 변화의 양상을 기질지성으로 설명했다. 선후도 주객도 없기에 기氣 없는 리理도, 리 없는 기도 없다고 보았다. 불변과 변화를 모두 긍정한 것이다. 이 둘의 역학이 세계를 구성한다.

*** 하라 켄야原硏哉는 『백白』에서 이같이 말한다. “백은 색채가 아니다.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쉼 없는 변천, 즉 정보의 생성과 퇴행의 역동성을 생명의 발생과 쇠퇴, 혹은 에너지의 생명이라는 우주적 리듬에 호응시켜 생각하는 동안에 만들어진 하나의 논고이다.” 나는 하라 켄야의 백이 소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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