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는데 남편이 나를 보면서 한마디 한다.
"당신은 30여 년간 회사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식사를 빨리하는 것이 몸에 밴 것 같아.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먹었으면 좋겠어. 내과 의사가 말하는데 한 숟가락을 먹고 20번 이상 씹으면 위장에 탈이 안 난데"
나의 식사 속도가 빠르긴 빠른가 보다. 남편한테서 이런 말을 자주 듣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하고 밥을 먹으면 소화가 안된다는 등, 나의 연속적인 숟가락질을 보면서 남편은 내내 불편한 시선으로 "당신, 숟가락 좀 내려놔요"한다. 사실 난 걸음도 빠르다. 다리에 모터를 단 듯 걸음이 빨라서 함께 걷는 사람이 천천히 가자고 한다. 지난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평소처럼 딸과 빠르게 교회를 나왔는데,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우리를 찾나 싶어 딸을 보내려 하는데 남편이 씩씩거리며 걸어온다.
"가족이 같이 움직여야지 그렇게 먼저 나가면 어떡해!"
예배 후, 남편은 우리 식구 모두 교회 사무실에 들러 부장님께 인사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나를 찾다가 혼자 인사드리고 왔다고 한다. 제발 가족끼리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며 짜증을 낸다. 예배는 잘 드렸는데 남편 마음 상하게 하고 한소리까지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전화하지 그랬어. 난 인사하러 같이 가는 줄 몰랐어" 아마 다른 집은 이와 반대일 확률이 많지만 우리 집은 남편이 아닌 내가 빠른 탓에 느린 편인 남편과 사소한 다툼이 생긴다.
물건을 살 때도 어느 정도 찾아보고 나름 괜찮으면 에너지 낭비하지 않고 물건을 구입한다. 그러나 남편은 며칠째 고민하고 고민한다. "살 마음이 있고 시장조사했고 가격도 나쁘지 않으면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그냥 사"라고 주장하는 편이다. 이런 나의 행동을 '효율'이라고 믿어왔다. 나도 어디에 갈 때면 미리 계획해서 움직여야 하고, 최소 시간을 재어 보듯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한테는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으며 언제나 친절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과적 마인드나 세밀함은 남편에 비해 다소 부족하지만 그건 시간에 대한 견해 차이라 생각한다. 가능한 발품을 팔아 더 좋은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일에 내 시간을 많이 쓰고 싶지는 않다. 영화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남편을 만났을 정도로 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넷플릭스 덕분에 다양한 영화를 틈틈이 시청할 수 있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배속을 달리해서 영화를 볼 수 있다. 볼 영화가 많기에 난 배속을 빨리해서 보는 편이다. 인생의 소소한 재미보다 남편과 다른 '효율'을 따지면서 살아간다.
한동안 나의 블로그의 방향성을 고민했다. 그동안 쓴 글을 살펴보면 관통한 주제가 있긴 하지만 산발적인 주제들이 많다. 결국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슨 글을 쓰면 되는지 근본적인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고민 끝에 '도서 블로그'로 방향을 잡았다. 늘 내 책상에는 빌려온 책, 산 책, 받은 책이 다양하게 쌓여있다. 책 읽고 쓰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책에 치여 산다고 하더니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안방 한 모퉁이에 마련된 책상 위에 각종 책들이 위아래로 놓여있다.
난 다독을 하는 편이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책을 안 읽는 사람은 늘 읽을 책이 없고, 책을 읽는 사람은 읽을 책이 너무 많다'라고 한다. 나는 후자에 해당된다. 그래서 야심 차게 일주일에 읽은 책 중 3권 이상은 올리려 한다. 이 일은 나의 성장에도 필요한 작업이지만 언젠가는 네이버에서 도서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일주일 동안 읽은 책은 4권도 가능하지만 책을 정리해서 올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블로그에 읽은 도서를 정리하니 장점도 있었다. 같은 책을 2~3번은 읽게 된다는 것, 다시 정리하면서 좋은 문장을 마음에 새길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그러나 늘 시간이 문제였다. 도서 블로그를 하면서 일상의 글쓰기는 멈췄다. 그게 마음에 짐이 되었다. 책 리뷰의 길이는 길어질수록 나만의 글쓰기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다. 매일 A4 한 장 정도의 글쓰기는 유지하고 싶었는데, 우선순위가 바꿔버린 것이다.
책을 읽을수록 쓰고자 하는 열망이 더 생기니 어찌하면 그 과정일 수도 있다. 읽다 보면 쓰고자 하는 마음이 활화산같이 타올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책에 적힌 저자의 삶이 다 내 삶과 같다.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살고 비슷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구나! 조금씩만 다를 뿐 그들 역시 책을 읽고 쓰는 일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만, 끝까지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지난한 고통이 오히려 글로 녹여져 독자를 만난다. 그게 나와 다를 뿐이다. 여전히 나는 글쓰기의 고저장단의 감정을 겪고 있고, 자신만의 글쓰기 여정을 찾아가고 있다.
한 권의 책을 빠르게 읽고 다음 책을 읽으면 난 만족할까? 하루 동안 빠르게 책을 읽고 여러 권의 책 리뷰까지 쓴다면 나는 효율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어릴 때는 남들의 속도에 맞춰 급히 밥을 먹다가 곧잘 탈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그 속도가 내 속도로 자리 잡혀버렸다. 위장이 탈이 나 소화제를 먹으면서도 고질적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이제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나는 삶의 속도를 변경해야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니까. 이제 주위를 경쟁자의 시선이 아닌 아름다움을 음미하듯 안아야 한다. 좋은 풍경도, 좋은 책도, 좋은 시간도 향유하면서 살고 싶다. 좋은 책은 여러 번 읽을수록 내 입에 달게 느껴지듯이 작가가 수놓은 고단백 영양분을 시간을 두고 충분하게 음미하고 싶다.
어제 딸과 카페에 갔었다. 약간 비싼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가지 않았는데 딸이 그곳에서 '수플레 팬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서 다녀왔다.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하얀 테이블에 잘 차려진 음식을 놓고 딸과 먹으니 모든 것이 행복했다. 맛있게 팬케이크를 먹고 난 뒤, 하얀 테이블 위에서 딸은 수학 숙제를 하고 나는 책을 읽었다. 집이라는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읽어야만 책들과 사투를 버리곤 했는데, 지금 우리는 하얀 테이블과 하얀 의자에 앉아 슬쩍 바깥 전경을 내다보며 책을 읽고 있다. 글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간혹 이런 호사도 누리면서 살아야겠다.
비싸다고 잘 안 오는 곳인데 의외로 식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각 테이블마다 대화의 꽃이 피었다. 어떤 분의 소리는 너무 커서 나는 이어폰을 귀에 대고 책을 읽기도 했지만, 딸은 공부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딸은 카페 분위기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나오면서 내게 말하길, 앞쪽 테이블 앉은 언니들이 미대를 나왔는지 전공 관련 얘기를 해서 자신도 관심 있게 들었다고 한다.
딸은 전공을 시각디자인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술 학원에 다녀본 적도 없고 당연히 미술 실기대회에 나가본 경험도 없는 딸이다. 다만 잘하는 것은 영상을 잘 만드는 편이다. 출품도 했고 작은 상도 받은 경력이 있으니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방향을 '시각디자인'으로 잡는 것은 내심 불안했다. 그런데 남편은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싶어 한다. 자신이 어릴 때 그림에 소질이 있었으나 집안 환경이 어려워 포기하고 이과로 갔는데 적성이 안 맞아 힘들었다고 한다. 오히려 경제학과나 경영학과에만 갔어도 좋았을 텐데, 선생님의 권유로 화학과를 선택했는데, 대학교 4년이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편의 그런 경험 덕분에 약간 무모하지만 딸의 꿈은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난 오랫동안 다녔던 직장을 올해는 마무리하게 된다. 은퇴 이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나름 큰 계획이 아닌 소소한 계획은 세우고 있다. 하고 싶은 것, 해봐야 할 것 같은 것, 가보고 싶은 곳, 가봐야 할 곳 같은 곳, 배우고 싶은 것, 안 배우면 후회할 것 같은 것 등 그동안 배었던 습관의 틀을 조금씩 깨트려 자유로워지고 싶다. 어느 날은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머물다 오고 싶고, 어떤 날은 하염없이 걷고, 또 걷고 싶다. 벌써 할 일이 많다. 이런 나에게 남편은 한마디 할 것이다.
"이제 좀 쉬어. 인생을 왜 그렇게 살아"
이제 겨우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들어섰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다만 효율을 따지는 습성에서 천천히 책도 음식도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며 음미하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