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돌로미티는 동부와 서부로 나뉘는데, 동부는 베네치아와 가깝고 서부는 밀라노와 가까워서 여행을 어디에서 시작했느냐에 따라 돌로미티를 여행하는 순서가 결정된다. 우리는 인천에서 출발하여 밀라노로 입국했으므로 자연히 서쪽을 먼저 여행하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어디를 베이스캠프로 삼아야 하나 고민하다 결정한 곳이 볼차노였다.
서쪽 베이스캠프로 가장 인기가 높은 건 오르티세이다. 알페 디 시우시와 세체다뿐 아니라 사쏘룽고나 다른 유명한 여행지도 15~30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중심부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수기 숙박비는 그야말로 '헉' 소리가 날 만큼 비싸다. 게다가 대부분 산장 혹은 호텔이라 여행 초기 따로 방을 쓰고자 하는 우리는 다른 선택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렇게 결정된 게 볼차노.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다른 여행지들로 오가는 왕복 시간과 4일 동안의 주차비를 계산하니 차라리 방 2개를 포기하더라도 오르티세이에 머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숙소가 깨끗하고 마음에 들었던 걸 차지하고라도. 왜 이 말을 하느냐면, 베이스캠프를 볼차노로 정해두고도 정작 그곳을 제대로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첫날은 시르미오네를 거쳐서 와서 체크인하고 이것저것 마트에서 먹을 걸 사느라 그럴 시간이 부족했고, 둘째 날은 알페 디 시우시와 세체다 그리고 카레짜 호수를 다녀오느라 하루가 홀랑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실상 돌로미티에서의 마지막 날, 짧게나마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서 이곳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로아커(Loakor) 본점에만 잠깐 들렀다. 거기 가는 김에 발터 광장도 힐끗 구경했고. 여기서 처음으로 물 맛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당 수치를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는 아주 다디단 생크림 파르페를 맛본 후 사쏘룽고로 향했다.
사쏘룽고와 산타 막달레나를 여행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돌로미티는 산길이라 운전이 꽤 난도가 있다는 정보를 많이 접혔는데, 생각보다 수월했으며 무엇보다 나는 장거리 운전에 크게 피로를 느끼지 않아 더 괜찮았던 듯도 싶다. 가장 우려했던 건 성수기라 주차장에 차가 복잡하게 얽혀 사고가 나는 부분이었는데 그런 문제도 없었으니 방심이 스며드는 순식간이었다.
산타 막달레나의 동화 같은 풍경에 취해 있다가 볼차노로 향하던 시간에는 이미 해는 지고 사위는 어둑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운전을 했고, 그녀는 구글맵을 켰다. 딱히 맛있는 식당을 찾거나 하는 데 관심이 없는 나보다는 그녀가 맛집을 찾는 게 낫다는 판단하게 나뉜 역할 분담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천청벽력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영업하는 식당이 없다는 거다. 게다가 마트도 평소보다 빠르게 문을 닫는다고. 아뿔싸! 그제야 돌로미티 서쪽 마지막날이 일요일 었다는 게 떠올랐다. 분명 여행을 준비할 때 일요일이나 휴일에는 음식점이나 마트 등이 문을 안 열거나 일찍 닫는다는 걸 공부해 놓고도 홀랑 까먹어 버린 것. 안일함이 불러온 결과였다.
저녁 8시가 다 되어 볼차노에 도착했더니 세상에 정말 마트고 식당이고 불을 밝힌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눈에 뜨이는 건 막 문 닫기 직전이었던 케밥집과 젤라토. 저녁으로 젤라토를 먹을 수는 없으니 우리는 서둘러 케밥집으로 갔다. 사장님은 다소 피곤해 보였으나 굶주린 우리를 웃으며 반겨주었으며 유쾌하게 주문을 받고 빠르게 케밥을 만들어 주었다. 생수 두 병과 케밥을 포장해서 가는데 어찌나 안심이 되었던지.
그런데 아직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숙소를 들어가기 위해 열쇠를 찾는데(놀랍게도 유럽의 호텔이나 주택은 아직 카드키가 아닌 열쇠를 이용하는 곳들이 많더라) 아무리 가방을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간은 늦었고, 주말이라 과연 숙소 주인과 연락이 될지도 미지수.
그녀가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기에 나라도 침착한 척해야 했다. 그러고 나니 머릿속으로 아까 내리기 전 문 열린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녀에게 가까스로 산 케밥 포장을 건네주고 잠시만 기다리라 말한 후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부디 열쇠가 차에 불시착해서 기다리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주차장에 막 도착했을 때는 작은 행운이 뒤따랐다. 본래 주말에 이곳은 문을 닫아두고, 출입하려면 소지하고 있는 종이카드를 사용해야 하는데 나는 그것조차도 차에 둔 상태였던 거다. 그런데 때마침 밖으로 나오는 사람 덕분에 주차장 안으로 어렵지 않게 들어갔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차 내부를 둘러본 끝에 조수석 아래에 떨어져 있는 숙소 키를 발견했다.
간신히 돌아오게 된 열쇠를 쥐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아까는 보이지 않던 볼차노의 마지막 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여유도 없이 이 도시를 떠나갈 여행자를 위해서 잠시나마 볼 기회를 주려고 했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안일함과 방심에 철렁했을 마음을 보듬어주기 위한 누군가의 배려였을까 생각하며 조금 걸음의 속도를 늦추어 거리를 바라봤다.
마침내 그녀에게 도착했을 때 나는 옅게 웃으며 가까스로 찾은 숙소 키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날 어렵사리 산 케밥에 냉장고에 쟁여두었던 탄산이 들어간 와인 한 잔을 마시며 다음번에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뭐든 반성 후 다음이 중요한 거지,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