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에서의 넉넉한 아침 식사 후 그녀가 물었다. 트래킹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고. 나는 알고 있는 대로 약 4~5시간 정도 소요될 거라고 답했고, 고민하던 그녀는 그럼 내가 올 때까지 산장에서 일하면서 기다리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알페 디 시우시에서 시작된 허리 통증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5시간이나 되는 트래킹을 하기에는 자신이 없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나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아파하는 그녀에게는 쉴 시간이 필요했고, 내게도 곁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날 위한 시간이 필요한 순간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식사를 마치고 그녀와는 라바레도 산장까지만 동행하고 홀로 남은 길을 걸었다. 그녀는 떠나기 전 혼자 잘 다녀올 수 있겠느냐고 염려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오히려 달가웠다.
그녀가 있어서 즐거웠지만 한편으로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상대를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내 욕심을 내려놓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내려놓아야 하는 아쉬움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런 부족함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다만 염두에 둘 건 돌로미티 트레치메가 꽤 규모가 큰 곳이고 또 곳곳에 트레일이 있어 헷갈릴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것.
내가 이번에 걸을 이탈리아 돌로미티 트레치메 코스는 로카텔리 산장까지 이어지는 101번과 Malga Langalm 산장을 반환점으로 하여 아우론조 산장으로 돌아오는 105번길. 이곳은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한 분이 추천해준 코스였는데, 가보지 않았다면 몰라서 아쉬웠을 정말로 아름다운 트래킹 코스였다.
로카텔리 산장까지 가는 101 코스는 비교적 완만했고, 남녀노소 누가 걸어도 어렵지 않은 난도였다. 여기까지는 나도 무난했다. 크게 탄성이 나올 만큼 멋진 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한 속도로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즐길 수 있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로카텔리 근처에는 동굴 속에서 세 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는 이른바 포토 스팟이 있다.
규모가 크지 않아 선객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찍어야 하는데, 때마침 아무도 없는 행운을 누려 빠르게 인증샷도 담아보았다. 쨍하니 파란 하늘에 뾰족뾰족 솟은 세 개의 봉우리는 확실히 감탄이 날만큼 멋지기는 했다. 그런데 왜인지 좀 심심한 감이 없지 않았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같이 감탄해줄 그녀가 부재한 까닭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고 했는데 막상 또 이렇게 곁을 돌아보게 되니, 역시 사람은 참 모순적이다.
동굴을 나와 나무로 만든 표지판을 보았다. 듣기로 105번 길을 걸어서 아우론조 산장으로 돌아가라고 했기에 그대로 따라가면 되겠거니 하고 산을 탔다. 근데 희한하게도 이쪽으로는 트래킹하는 사람이 적었다. 봉우리 하나에 올라서자 작은 동굴 하나가 더 나타났다. 허리를 잔뜩 숙여 진입해도 머리가 닿을 것 같은 그곳을 보자 길을 잘못 들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막 돌아가려는데 외국인 커플이 나타났다. 그들은 머리에 안전모를 착용하고 있었고, 내게 저 동굴을 통과할 생각이냐 물었다. 그러더니 용감하다며 만약 저기를 갈 거라면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충고도 전해줬다. 그 말을 듣고야 더욱 확신했다. 진짜 잘못 왔구나. 그들은 내게 한국인이냐 묻고, 본인들이 알고 있는 한국어 '안녕, 반가.' 를 말하며 반가워하다 사진 한 장을 찍어준 후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꼭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그녀를 안내하던 시계 토끼가 생각나던 순간이었다. 저길 통과하면 나는 기묘한 세계로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안전모가 없기에 그들을 따르는 건 포기하고 다시금 로카텔리 산장으로 돌아왔다.
산장 주위를 빙 둘러보고서야 비로소 올바른 105번 길을 찾아냈다. 사실은 내 힘은 아니고 지나가던 외국인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게는 친절하고 다정한 동행들이 생겨나갔다. 돌로미티 트레치메가 유독 기억에 남게 된 순간도 그들 덕분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인사해주던 사람들, 내게 혼자 걷느냐며 용감하다고 상냥하게 말을 건네던 사람들, 저쪽에 근사한 사진 포인트가 있다며 가서 찍으라고 알려주던 청년과 부모님과 함께 트래킹하면서 내가 잘 따라오는지 종종 돌아봐 주었던 10대 소년까지.
이탈리아 트레치메는 분명 아름다운 곳이었고, 왜 이곳이 돌로미티를 오면 빼먹지 말아야 할 첫번째인지를 알게 해주는 멋진 장관이 펼쳐진 장소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는 5시간 내내 홀로 걸으면서도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해주었던, 나를 스쳐지나간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들로 더욱 행복했던 트래킹으로 남았다.
여행이란 참 신기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장소보다는 사람과의 인연이 더 뚜렷이 기억되는 듯한데,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