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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쿡크다스 Apr 21. 2024

보스가 청소에 꽂혔다.

호주 35 주차(24. 3. 15. ~ 24. 3. 21.)

3월 15일(금)

가게 제빙기가 망가졌는데 고칠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어디서 얼음을 공수해 오길래 그런대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자기들 바쁘니까 근처 가게 가서 얼음을 사 오라고 해서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스를 비롯해 가게와 관련된 이들은 하나같이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투자해서 고칠 생각 없이 어떻게든 있는 사람들로 때우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일하는 곳뿐만 아니라 central kitchen에서 일하는 셰프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 셰프가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우리 가게로 아침마다 물건 배달 해 줄 때마다 붙잡고 한참 하소연을 늘어놓는데 보스가 가게에 와 있을 때는 보스와 마주치지 않고 뒷 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제법 웃기다. 아무튼, 얼음을 알아서 공수하라는데 가뜩이나 바쁜 아침에 얼음 사러 갈 시간은 없으니 그냥 없는 대로 손님들에게 제빙기 망가져서 당장 얼음이 없다고 말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안 돼 보였는지 central kitchen셰프가 얼음을 사다 줬는데 이게 참.. 정작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안 하니 애꿎은 사람이 힘들고 우리는 우리대로 central kitchen셰프에게 빚을 진 꼴이 되어 버렸다. 얼음 사 오는 것도 귀찮긴 하니까 공수받은 얼음은 최대한 아껴 쓰는 걸로 합의하고 버틸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날이라 남편과 마트에서 만나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평소와 달리 한적했다. 일찍 퇴근하면 이런 사소한 여유가 참 좋다. 이상하게 저녁 하기가 싫어서 대충 분식(라면, 만두) 먹고 후식으로 초콜릿 아이스크림까지 단단하게 챙겨 먹었다. 지난주 일요일부터 5일 동안 쉬지 않고 운동한 탓에 오늘은 하루 쉬기로 하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돌아왔다. 산책 길에 어느 집 마당에 있는 똥강아지랑 마주쳤는데 쓰다듬고 싶었지만 차마 남의 집 대문 안으로 손 넣고 강아지를 쓰다듬어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 발을 뗐다. 지난번 산책 때 어떤 아저씨는 강아지 막 만지고 있던데... 다음엔 용기를 내 볼까 싶다가도 이 나라에선 어디까지가 허용되는지 알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번 주말은 조금 바쁠 예정인데 무려 영화를 보러 간다. 호주에서 영화 보는 건 처음이라 영화관 분위기는 어떨지 기대가 많이 된다.


3월 16일(토)

한국에는 봄이 찾아오고 호주에는 가을이 찾아오고 있다. 다가올 추운 날씨에 대비해 두꺼운 이불을 사러 이케아에 다녀왔다. 많은 이불 중에 오리털이 들어간 이불과 두 겹으로 겹쳐 덮을 수 있는 솜이불 중에 고민하다가 오리털 이불을 골랐다. 실용성을 생각했을 때는 솜이불을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오리털 이불이 주는 묵직함과 푸근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겨울에 늘 극세사 이불을 덮었는데 호주에 오니 극세사 재질의 이불을 찾는 게 쉽지 않아 초등학생 때 이후로 오리털 이불을 덮고 자게 생겼다.


내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정전이 예정 돼 있어 오늘 미리 집 청소를 끝냈다. 정전된 집에서 시간을 보내긴 싫어서 내일 아침부터 영화를 보러 갔다가 집에 돌아올 예정이다. 호주에 온 지 8개월 만에 처음 문화생활을 하게 됐고 한국에서도 영화관에 거의 가지 않아서 영화관에 가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다.


저녁 먹고 어제 산책했던 길을 따라 다시 산책을 했는데 무려 세 집의 마당에서 강아지들을 마주쳤다. 정말 만지고 싶었지만 물릴 수도 있으니 그냥 앞에서 손만 흔들어 인사했다. 집 안에 사람은 있던 것 같은데 강아지만 밖에 나와 있는 게 안쓰러웠다. 잘 때도 밖에 내놓고 자려나? 호주에서는 강아지를 가족 같이 귀하게 키우는 것 같은데.. 마당에 내놓고 키운다고 가족처럼 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실내에서 하하 호호하고 있는 사이에 강아지만 마당에 혼자 덜렁 나와 있는 게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아, 내일 볼 영화는 요즘 한국에서 인기몰이 중인 파묘다. 제발 많이 안 무섭기를..


3월 17일(일)

어젯밤, 잠들기 전에 내일 정전 몇 시부터인지 다시 확인했더니 우리 집이 정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면 굳이 영화를 보러 갈 필요가 없는 거잖아? 비록 수수료를 조금 냈으나 영화 티켓을 취소하고 일단 잠에 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아침이었는데 일요일 루틴 중 하나였던 대청소를 어제 미리 끝내 놓은 덕분에 아침 시간이 한가했다. 영화 관람도 취소했겠다, 어디를 다녀올까 잠시 고민했으나 그냥 푹 쉬고 싶은 마음이 커서 세차만 하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 남편은 과제가 많아서 하루 종일 과제하고 나는 책 읽고 만화보고 낮잠도 자는 등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냈다.


내일 남편이 먹을 도시락으로 밥을 미리 싸 놓았는데, 그동안 가게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로 매 점심을 때우느라 지겨웠을 남편을 위한 밥 도시락이다. 한국에서도 내 점심 도시락 싸는 겸 남편 것도 같이 싸 줬는데 호주에 온 후로는 샌드위치라는 간편한 메뉴가 있으니 도시락을 따로 싸준 적이 없다. 도시락이라고 해 봤자 전날 저녁 메뉴일 뿐이지만 늘 똑같은 샌드위치보다는 훨씬 나은지 남편이 좋아하고 있다.


내일부터 다시 한 주가 시작된다. 날씨가 많이 선선해져서 일하기 더 수월할 것 같다.


3월 18일(월)

주말 푹 쉬고 출근하니 몸이 뻐근했지만 늘 하던 일이니까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다. 월요일은 비교적 한가한 편인데 오늘은 손님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와서 일하기 더 편했다. 러시가 없으니 지치지도 않고 중간중간 쉴 수도 있으니 일석 이조.


날씨가 갑자기 많이 추워졌다. 오전엔 15도 오후에는 30도 가까이 되는 일교차가 제법 큰 날씨인데, 남편이 주말에 산 오리털 이불을 덮고 싶다고 해서 고민된다. 한국 떠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가을 날씨가 어땠는지, 그때 내 옷차림은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호주는 실내 온돌 그러니까 난방이 잘 안 돼서 똑같은 15도여도 더 추운 느낌이다. 아무튼 일교차가 크니 감기 조심해야지.


3월 19일(화)

보스의 여러 가게 중 한 곳에 한국으로 따지면 식약청 직원이 다녀간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소에 미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청소를 시킬 수가 없다. 하필 오늘 오전부터 바쁘지 않은 탓에 손님 없을 때 청소만 주야장천 해댔다. 얼마나 팔이 아프던지. 그래도 깨끗해진 공간을 보니 기분은 좋았다. 그동안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내가 하루를 보냈던 건가, 하는 생각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기도 했고.


오늘 오전엔 가게 근처에서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다. 차랑 사람이 부딪쳤는데 자동차 유리가 다 부서졌을 만큼 꽤 센 충돌이었으나 다행히 사람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어수선한 와중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거리로 나가서 처치를 도와주거나 구급차, 경찰차를 불러 짧은 시간에 해결되었다. 그런데 여기도 레카가 차 꿰서 가져가려는 건 똑같은 게 어떤 아저씨가 가게로 와 명함을 주면서 다음에 이런 사고 있으면 자기한테 제일 먼저 연락을 달라고 했다. 사람 사는 거 똑같구나.


내일은 저녁에 코워커 초대해서 불닭볶음면을 같이 먹기로 했다. 한국인과 친구가 된 외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같이 불닭볶음면을 먹게 되는데 내일이 바로 그날이다. 얼마나 잘 먹을지 궁금하다.


3월 20일(수)

오늘도 어김없이 매니저가 오전부터 청소청소 닦달을 하는 통에 머리가 아팠다. 어차피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청소와 그들이 시키는 일을 최선을 다 해 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하기로 코워커와 다짐했다. 알아서 다른 일 찾아서 하면 거기에 일을 더 얹어주니까 몸이 너무 힘들다. 아무튼 그렇게 오전 내내 청소하고 바쁜 오후를 보낸 다음 집에 와 코워커가 오기를 기다렸다.


집 앞에 도착했다는 그녀를 마중 나가는데 한 가둑 짐이 있어서 봤더니 마요네즈랑 치즈를 잔뜩 들고 왔다. 매워서 못 먹을까 봐 만일에 대비해 들고 왔다는데 얼마나 무거웠을지, 우리 집에도 있었는데 미리 말을 할 걸 그랬다. 그녀는 불닭볶음면 소스를 반만 넣고 내가 해 준 계란 후라이와 우유 한 잔을 곁들여 먹었는데 걱정과 달리 땀도 흘리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 처음 먹었을 때는 울면서 먹었다고 했는데 이제 매운 거 잘 먹게 된 것 같다길래 다음엔 소스 다 넣고 먹으라니까 그건 좀 힘들겠다고 한다.


후식으로 수박, 주스, 초콜릿쿠키를 먹으면서 쉴 새 없이 떠들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남편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니 8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 식기세척기 돌리고 씻고 이제 자려고 한다. 벌써 한 주의 절반이 다 지나갔다.


3월 21일(목)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그런가 약간의 몸살기가 느껴졌다. 오전에는 기운이 많이 없고 어지럽기까지 했지만 오후가 되니 괜찮아졌다. 오늘은 마감 직전까지 손님이 있어서 마감할 때 참 바빴고, 매니저가 아침에 와서 한바탕 잔소리를 하고 돌아가 힘들기도 했다. 벌써 이곳에서 일 한지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가 나한테 이것저것 시키는데 내 기준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못 알아듣는 척하고 대신해 달라고 했다. 코워커에게 말 하니 내가 하기 시작하면 계속 시킬 테니 앞으로도 모른 척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 주었다.


저녁 먹고 쉬는데 운동하기가 너무 싫었다. 어제 쉬어서 오늘은 꼭 하고 싶은데 쌀쌀한 날씨, 포근한 이불의 조화가 끝내주는 바람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참 힘들었다. 오랜만에 강도 높은 운동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소설을 많이 읽고 있다. 재미있는 소설은 번역체일지라도 문장이 술술 읽힌다. 한 동안 소설 말고 자기 계발이나 철학 관련 도서를 읽었는데 생각 없이 이야기에 푹 빠지고 싶은 기분에 닥치는 대로 소설을 빌리고 있다. 호주까지 갖고 온 이북 리더기가 제대로 역할을 하는 중이다.


내일 금요일은 한 주의 마지막 근무일이라 벌써부터 힘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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