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34 주차(24. 3. 8. ~ 24. 3. 14.)
3월 8일(금)
지난주까지는 매주 사소하거나 크게 약속이 있었는데 이번 주 주말은 약속 없이 조용히 지나갈 것 같다. 오늘 오전에는 아주 오랜만에 비가 세게 내려 조용한 하루가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비가 그치니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사람들이 가게로 찾아와 오후 시간은 바쁘게 보냈다. 오전에 왔던 손님들은 대부분 비를 피해 들어와 한참을 가게 안에서 커피 마시다가 돌아갔는데, 비 오는 날씨 때문인 건지 아니면 내 기분 탓인 건지 평소보다 손님들의 말소리가 유독 더 크게 들려 정신이 산만했다. 아무튼 아주 오랜만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린 덕분에 일주일 동안 먼지가 뽀얗게 쌓였던 차도 말끔해졌고 더위가 확실히 한 풀 꺾인 게 느껴졌다. 정말 여름과의 작별이다.
오늘 저녁은 지난주 한인 마트에서 공수해 온 한국식 카레 가루에 소고기를 듬뿍 넣은 소고기 카레를 먹었다. 그동안 먹은 카레는 인도 전통 카레나 일본 큐브 카레였는데, 인도 카레는 향이 너무 강해 자주 찾지 않았고 일본 큐브 카레는 입맛에 맞지만 내가 원하는 농도의 카레로 만들기 쉽지 않아 늘 아쉬웠다. 전분 듬뿍 들어가 꾸덕한 한국식 카레를 드디어 먹게 돼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오랜만에 아주 만족스러운 한국식 식사였다.
내일은 날씨가 선선해진 기념으로 호주에 처음 왔을 때를 기념해 뚜벅이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작년 7월, 한창 추울 때 호주에 도착해서 그런지 점점 차가워지는 공기에 처음 호주 땅을 밟았던 그때가 떠오른다.
3월 9일(토), 3월 10일(일), 3월 11일(월)
웬만하면 짧게라도, 그 내용이 엉망일지라도 하루의 끝에 일기를 쓰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아파 지난 3일 동안의 일을 오늘(화요일)에서야 복기해 본다.
우선 토요일. 금요일 저녁에 계획했던 대로 남편과 뚜벅이 데이트를 하러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전 날 비가 온 덕분에 아침부터 공기가 제법 차가워 두툼한 옷을 입었고 시내로 나가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 한 후에 근처 공원에 가서 얘기 나누다가 걷는, 평범한 데이트 중이었다. 아이쇼핑이나 하자며 시내 번화가로 걸어가는 중에 남편이 허기가 진다고 했고 나는 배가 딱히 고프지 않아 남편만 간단히 요기할 수 있게 근처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정말 안 먹을 거냐고 재차 묻는 남편의 말에 뭐를 먹을까 가만히 떠올려봤지만 무언가를 먹는다는 상상만으로 속이 더부룩 한 느낌이라 안 먹겠다고 했으나, 남편이 주문한 감자튀김이 눈앞에 있자 홀린 듯이 여러 개를 주워 먹었다. 그 후로 컨디션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꼈는데 아침부터 쐰 찬 공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점점 기운이 없고 두통이 느껴지는 중이었기 때문에 집에 가서 타이레놀 먹고 한숨 푹 자면 해결될 줄 알았고 실제로도 집에 가자마자 약 먹고 바로 잠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조금 나아진 듯했고 입맛은 없지만 뭐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릴 것 같아서 그릭 요거트에 바나나를 잘라 넣어 먹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감기 몸살인 줄 알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덮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속이 안 좋더니 기어이 변기를 붙잡고 토를 하고 말았다. 정말 위에 들은 모든 것이 나올 때까지 토하고 누워있기를 반복했는데, 식은땀이 나고 오한이 느껴져 수면양말을 신고 후드 집업을 입고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모자라 몸을 바싹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남편이 집 근처 마트에서 급하게 약을 사 왔는데 식 후에 먹으라는 설명이 있어서 억지로 죽을 먹었는데 그것도 결국 다 토해내고 말았다. 살면서 이렇게 많이 토했던 적이 있던가. 몇 숟가락 먹지도 못한, 남편이 애써 만든 죽은 결국 변기행이었고 하루 종일 먹은 게 거의 없다시피 했던 나는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온 세상이 핑핑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날은 하루 종일 토 하고 누워있다가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던 것으로 끝났다.
다음 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조금 나아진 것 같아 아침으로 어제 먹다 남은 죽을 먹으며 속을 달랬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위장이 움직이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계속 배가 불렀고 소화제를 먹으면 그제야 꾸르르릉 소리를 내며 음식이 소화됐다. 게다가 어지럽기는 왜 그렇게 어지러운지 아침 먹고 오전 내내 누워있던 걸로도 모자라 낮잠도 많이 잤는데도 하루 종일 기운이 없었다. 결국 매주 일요일에 같이 하는 대 청소는 온전히 남편 몫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했던 생각은 어제 아파서 다행이다,였다. 일요일에 아팠다면 월요일 출근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데 토요일에 아팠으니 일요일 하루 쉬고 월요일 출근 할 수 있으니까. 출근에 목매는 건 아니고 내가 못 가면 다른 사람과 쉬프트를 바꿔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 주말에 일 하러 가야 해서 웬만하면 내 고정 스케줄을 지키려고 하는 편이다. 이 날은 밥 먹고 소화제 먹고를 반복하다가 아주 이른 시간부터 잠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제, 월요일. 아침에 개운하게는 아니고 그냥 일어나서 아침 식사 후 소화제 먹고 가게로 출근했다. 속이 안 좋은 건 없었는데 어지러움이 너무 심하고 기운이 없어 일하는 데 너무 힘들었다. 코워커에게 주말에 아팠고 사실 지금도 컨디션이 좋은 편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더니 많은 일을 혼자 해 줬다. 서서 일하는 데 계속 눈이 감기는 걸로도 모자라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피곤했던 것을 보면 최소 이틀은 회복을 위해 푹 쉬었어야 했던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소화제 없이 음식이 소화 돼 밥이든 물이든 마시고 나면 시원하게 트림을 했다. 이제 위가 완전히 회복했다보다 싶어서 저녁으로 지난 금요일에 먹다 남은 카레에다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먹고 동네 한 바퀴 하면서 트림 크게 하고 기분 좋아 운동까지 했다. 여전히 피곤해 일찍 잠들었는데 너무 일찍 잠든 탓인지 새벽에 깨서 한참을 뒤척였다.
3월 12일(화)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보다 컨디션이 훨씬 좋아진 게 느껴져 지난 나흘 간의 고생에 마침표를 찍었구나, 생각했다. 가게 도착해서도 어제와는 다른 텐션으로 일도 하고 코워커와 잡담도 나누면서 기분 좋게 시간을 보냈다. 어제 출근하지 않았던 다른 코워커에게 주말에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다고 했더니, 쉬프트 커버하는 건 일도 아닌데 왜 부탁하지 않았냐면서 지금은 정말 괜찮은 건지 반복해서 물어봤다. 차마 그 앞에서 토요일에 일 하기 싫어서 쉬프트 바꿔달라는 부탁을 안 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매일매일 나아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마감까지 근무를 마쳤다.
집에 돌아와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됐다. 지난주에도 한참 정전되더니 이번 주도 또 그러네. 복구가 늦어지면 저녁으로 피자 사 먹기로 했는데 3,40분쯤 지났을까 전기가 들어와 그냥 집에서 저녁을 해 먹었다. 지난번처럼 중간에 전기 들어왔다 나갔다 할 까봐 요리를 정말 빨리 끝냈다. 밥 먹고 한참 쉬다가 운동도 하고 씻고 이제 자려고 침대에 앉아 한참을 밀린 일기를 썼다. 간밤에 깨서 한참 잠을 못 잔 탓인지 오늘도 피곤하다. 아니면 아직 몸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걸까.
살면서 거의 겪지 않았던 고통을 동반한 아픔을 겪으니 새삼 몸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우리 부모님은 콧 방귀를 뀌겠지만 사실 남편도 나도 우리가 처음 만나 연애할 때와 지금은 생긴 것은 물론이거니와 체력, 하다 못해 목소리의 크기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함께 보낸 시간이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한창 생기 돋고 어떤 어려움이든 몸으로 다 부수고 나아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정신적, 육체적 젊음과 조금씩 멀어진다는 게 실감 난다. 더 늦기 전에 건강관리를 꼭 해야겠구나,라고 다짐한다.
3월 13일(수)
오전 9시, 보스의 방문으로 모두의 멘털이 나가기 시작했다. 최근 보스는 다른 사업체의 매출이 부진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일이 많은 건지, 그 속내를 알 길은 없으나 평소보다 많이 예민해져 있는 탓에 가게에 올 때마다 잔소리를 비롯한 불평불만이 많아졌다. 당연히 사장님 눈에는 우리가 하는 부분에 대해 완벽히 만족할 수 없음을 알고 합리적인 비판은 수용해 시정하려고 하나 요즘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하는 보스의 행동은 비판이 아니라 거의 꼬장에 가깝다. 올 때마다 요구사항이 달라지는 것은 늘 있던 일이라 예예, 하고 넘어가는 요령이 생겼으나 우리의 능력과 책임 밖의 것을 요구하는 행동은 우리를 상당히 화나게 만드는 일이다. 일정한 커피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경력 많은 바리스타를 채용하는 것처럼, 가게에서 파는 디저트나 샌드위치에 불만이 있다면 그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셰프를 고용하면 되지만 우리에게 샌드위치가 예전 같지 않다는 등의 불만을 얼굴 볼 때마다 토로한다. 나는 그냥 당신네들이 가져다주는 거 진열하는 게 전부인데 나보고 뭐 어떡하라는 건지.. 사업체가 많아서 여기가 어딘지 헷갈리는 건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녀가 한 바탕 휩쓸고 간 30분 때문에 오전 내내 좋았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나는 마치 주말처럼 괜히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멘털이 나간 것 치고는 하루 잘 버티고 저녁 수업을 듣는 남편을 데리러 남편 학교로 운전해 갔다. 밤늦게 장거리를 혼자서 운전하는 건 처음인 데다 초행길이라 네비 보랴 전방 주시 하랴 운전하는 내내 아주 산만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밤 날씨가 창문 열고 드라이브하기 좋아 집으로 오는 길에는 남편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밤바람을 만끽했다. 오전에 보스와 30분 같이 있었던 걸로 힘들었는데, 저녁 드라이브로 기분 전환이 좀 된 것 같다.
3월 14일(목)
어제 출근하지 않았던 코워커에게 보스가 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다.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왜 우리 일이 아닌 것을 우리 탓으로 돌리느냐,는 것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와서 점검하고 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방문하지 않아 조금 마음 편하게 일했다.
요즘 가게 디저트 칸과 과일 착즙기 주변으로 초파리가 많이 생겨 그것들을 처리하느라 아주 바쁘다. 분명히 다 잡았는데도 어느 순간 자연 발생해 두, 세 마리씩 보이는데 크기도 작고 빠르기도 엄청 빨라 잡는 게여간 쉽지 않아 독한 소독약을 직접 분사해 익사시키는 수밖에 없다. 원래 디저트 남으면 가끔 한 두 개 챙겨가는데 초파리 생기는 거 본 이후로는 가져가는 게여간 찜찜하지가 않아 웬만하면 안 가져가고 있다.
여전히 속이 편안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밥 먹으면 먹은 대로 소화를 잘 시키고 있다. 좀 나아진 거 믿고 오늘 저녁으로는 김치볶음밥을, 후식으로는 딸기 요거트를 정말 배 터지게 먹었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일 하고 집에 오면 평소보다 기운이 많이 부족해 저녁을 조금 더 많이 먹게 되고 잠도 많이 자고 있다. 아마 이번 한 주는 지난 주말 아팠던 것에 대한 회복 기간인 듯싶다. 내일 하루만 일 하면 주말 이틀 쉴 수 있으니까 하루만 더 잘 참아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