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39 주차(24. 4. 12. ~ 24. 4. 18.)
4월 12일(금)
오늘도 역시나 배달이 늦게 오길래 재촉하는 문자를 보냈다. '배달 언제 와요'라고 물으면 답장을 안 하고 '손님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면 답장을 한다. 손님 놓치기 싫으면 배달을 좀 빨리 보내던가, 아침부터 복장 터지게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 오전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속도를 내서 할 일을 끝냈는데, 다행스럽게도 모든 듀티를 끝내고 나서야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듀티 빨리 안 끝냈으면 더 정신없었을 거라고 코워커와 한탄 아닌 한탄을 하며 오늘 하루도 예정보다 바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배달 오는 빵이 오늘따라 형편없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메인 키친 시스템을 바꾸는 과정에서 빵을 잘못 만들었다고 한다. 무슨 시스템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좋은 쪽으로 일이 풀리는 것은 확실한 게, 빵 굽는 셰프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고집부리는 보스 때문에 셰프들의 근심이 깊어져가는 게 보였다.
오늘 내 쉬프트는 오전이 전부였기 때문에 일을 금방 마치고 장 보고 집에 와서 음악 들으며 푹 쉬었다. 오후에는 아주 오랜만에 굵은 비가 쏟아져 가을이 왔음을 실감했다.
4월 13일(토)
남편 학교에서 재미있는 축제가 있다고 해서 다녀왔다. 학교 안에 있는 식당이 참여하는 일종의 푸두 축제로 퀘스트를 깨면서 무료 시식을 할 수 있는 활동이 있었다. 몇 번 남편 학교에 가서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사 먹은 적 없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맛도 보고 구경도 하는 좋은 기회였다.
뽑기를 해서 세 가게 중 한 곳의 무료 시식 쿠폰을 얻을 수 있었는데, 우리가 원하던 가게의 무료 시식 쿠폰을 남편만 얻었다. 가만 보면 남편은 나보다 뽑기 운이 좋다. 연애 때도 한창 같이 하던 게임 프로 리그 직관 하러 가서 경품에 혼자만 당첨 되지를 않나. 살면서 이런 운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었던 나로서는 매번 뭐라도 당첨되는 남편이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 축제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단연코 젤라또였는데, 밖에서 사 먹으려면 최소 5달러는 줘야 할 것 같은 퀄리티의 젤라또를 무료로 맛볼 수 있었다. 남편은 망고 맛을, 나는 그냥 클래식한 바닐라 크림 맛을 먹었는데 남편 왈,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젤라또 포함해 인생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젤라또였다고. 젤라또와 아이스크림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하던 때도 있었는데, 오늘 먹으면서 확실히 알았다. 젤라또와 아이스크림은 차가운 것만 똑같지 완전히 다른 음식이라는 것을.
한 시간 정도 축제 즐기고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할 때쯤 우리는 자리를 떴고, 한인마트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 왔다. 길지 않은 외출이라 아쉽긴 했지만 즐거운 경험을 했음에 만족한다.
4월 14일(일)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청소하고 누워있다가 저녁 산책하고 끝. 저녁은 오랜만에 사 온 양배추 볶아 캔 참치에 고추장 비벼 먹었더니 비빔밥 먹는 기분이었다.
로스터가 나왔는데 지난 주랑 똑같다. 고생할 게 훤히 보인다.
4월 15일(월)
이틀 만에 출근한 건데도 오랜만의 출근 같아 약간 긴장된 상태로 하루를 시작했다. 주말에 일 하는 코워커랑 어제 문자 하면서 메인 키친에서 배달 와야 할 게 주말 내내 안 왔고, 월요일에도 배달을 제 때 못 할 거라는 소식을 알게 됐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유독 늦은 시간까지 커피 찾는 손님이 많아서 역대급으로 하루 커피 소비량이 많았다. 오전 10시 30분~11시 사이에 갑자기 사람이 몰리면서 커피 머신 근처가 난장판이 됐는데, 보스가 고용한 마케팅 담당 직원이 그 난장판에서 사진 찍는다고 옆에서 얼쩡대서 정말 귀찮았다. 너 사진 찍을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가 없다고.. 한 바탕 난리가 지나간 후에는 고요함만 남았다. 오늘부터 학생들도 다시 학교에 가는 등 많은 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갑자기 셰프한테 전화가 왔고, 우리가 바쁘지 않을 때 떠들면서 쉬는 모습을 보스가 cctv를 통해 언제든 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매 순간 cctv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우리가 아침 듀티를 빨리 끝내고 다음 러시까지 편하게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몇 번 눈에 띄었나 보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노는 시간이 많은 것처럼 보이겠지.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아침 듀티를 천천히 하던지 다 끝내고 다른 할 일을 찾아서 어슬렁어슬렁 대야지 싶다.
4월 16일(화)
어제보다는 조금 여유로웠다. 그 덕분에 힘들지 않고 좋았다. 어제 셰프가 조언해 준 대로 오늘은 최대한 cctv사각지대에 숨어서 쉬거나 뭔갈 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손님 없을 때 할 거라고는 청소뿐인지라 가게는 반짝반짝하게 윤이 났다.
남편은 봉사활동 하는 것이 확정됐는데 일요일을 포함해 주 4일 동안 하루 4시간의 스케줄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써 학교 활동을 제외하고 남편의 첫 외부 활동이 시작됐다. 맨날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다가 새로운 사람 만날 수 있으니 남편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할지 모르겠지만 하는 동안 잘하기를.
저녁 먹고 엄마랑 한참 통화 했는데 친척 어른 네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 얘기로만 한 시간을 통화했는데 엄마가 말하는 게 너무 웃겨서 동네가 떠나가도록 크게 웃었다. '가끔 보면 뇌가 없는 것 같다'라니. 저런 표현은 어디서 들었던 걸까.
며칠 전부터 코워커가 추천해 준 책을 읽고 있는데,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지 않은 나도 푹 빠져서 읽을 정도로 재미있다. 코워커에게 좋아하는 작가가 있냐고 물었을 때 콕 집어서 나에게 알려줬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좋아하는 작품은 있어도 좋아하는 작가는 없다. 누군가 물었을 때 바로 그 이름을 알려 줄 수 있을 정도라면 얼마나 그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걸까. 지금 읽고 있는 책 끝내고 다른 책도 읽어봐야지.
4월 17일(수)
약 3주 만에 보스가 가게에 찾아왔다. 그전에는 올 때마다 지적 사항이 많았지만 오늘은 이것저것 새로 위치를 바꿔 놓고 갔다. 30분 같이 있었는데 코워커 왈, 지옥에 있는 것 같았다고. 오늘 아침에도 단골손님이 지나가면서 인사만 하고 가니까, 인사해주는 건 고마운데 뭘 사면 더 고맙겠다고 하지를 않나. 말 하나하나가 주옥같아 한참 웃었다.
보스가 30분 동안 멘털 털어놓은 뒤에 한 차례 더 난관이 있었는데, 가게가 꽉 차고 손님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바빴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 시끄러운 탓에 집중하기 어려웠달까. 코워커랑 눈 위로 치켜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오늘따라 생과일주스 해 달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나는 기껏 다 만들어 놓은 음료를 엎어버리지를 않나. 오늘 무슨 날인가 싶었다.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내일은 좀 덜 어질러야지.
4월 18일(목)
오전에는 보스, 오후에는 손님. 하루 종일 정신없고 바빴던 하루였다. 내가 쉬는 동안 보스가 코워커랑 같이 손님 주문받았는데 코워커 왈, 엉망진창이라고. 아무래도 보스가 실제로 근무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오랜만에 손님 주문받고 커피 만드는 게 서툴렀나 보다. 차라리 8시간 동안 혼자 일 하는 게 보스랑 30분 같이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는 얘기를 했는데, 굉장히 공감 됐다.
마감 즈음에는 커피도 샌드위치도 모두 매진돼서 마무리 청소하기가 수월했다. 많이 바빴던 덕분에 매출이 크게 늘어 보스가 행복해할 듯싶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바닥났지만. 내일은 제발 안 오기를! 이것저것 요구 사항이 많은 탓에 하나하나 수정하느라 힘들다. 손님이 있든 말든 신경 안 쓰고 자기 할 말만 하는 통에 보스랑 같이 있을 때는 일이 두 배.
내일은 오픈 시프트라 11시면 하루가 끝난다. 얼른 끝내고 집에서 책 읽으면서 쉬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