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40 주차(24. 4. 19. ~ 24. 4. 25.)
4월 19일(금)
오늘은 오전 시프트라 아침부터 마음이 여유로웠다. 보스가 오전에 왔지만 지난 이틀 동안 그녀의 요구사항을 빠짐없이 완수해서 그런지 오늘은 별말 없이 금세 자리를 떴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바쁘지 않은 가게를 뒤로 하고 집으로 와 장을 보고 가게에서 싸 온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어버렸다. 절반만 먹을 생각이었는데 먹다 보니 하나 다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배가 불러 저녁을 생략할까 하다가 좀 늦은 시간에 저녁을 간단하게 먹었다. 소주를 부르는 고추장찌개가 메뉴였던지라 소주 한 잔과 곁들였다.
이번 주말에는 할 게 없다. 일요일은 전통적으로 대청소하고 집에서 쉬는 게 일인 날이라 주로 토요일에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데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
4월 20일(토)
한 주 동안 많이 피곤했던 걸까 10시간 이상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났다. 아침 먹고 나서 어디 가서 놀지 생각하는데 지난주부터 먹고 싶었던 흑당 버블티를 꼭 먹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도서관 갔다가 버블티 사 먹자는 단순한 계획을 세워 집에서 출발했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니 호주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허구한 날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내던 게 생각났다. 한 시간 넘게 책 읽고 나니 옆에서 남편이 과제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배 고플 때도 됐고, 이렇게 시내에 나올 일이 많지 않은 관계로 버블티와 더불어 호주에서 처음 먹었던 화덕피자를 포장해 근처 공원에서 돗자리 깔고 먹기로 했다. 나를 감탄시켰던 바로 그 피자! 무려 8개월 전이지만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던 그 피자다.
버블티 사서 피자 가게까지 걸어가는 길이 꽤 멀었는데 차를 타고 다녔다면 느끼지 못했을 각 거리의 풍경을 천천히 즐길 수 있었다. 직접 내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며 거리를 거니는 것 과 차 안에 앉아 창 밖의 거리를 감상하는 것은 다른 매력이 있다. 차 사기 전에는 참 많이도 걸어 다녔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걸은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피자 포장하고 공원에 앉아 먹는데, 피자 맛이 8개월 전에 감탄하던 그 맛과 똑같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최근에 패스티발 가서 먹었던 푸드트럭 피자와는 차원이 다른 맛. 맛있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어깨춤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흑당 버블티라는 다소 오묘한 조합의 음료와 함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의 야외 식사는 아주 훌륭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 집에 들어가는 게 아쉬워 피자를 먹고도 한참을 공원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보낼 만큼 보냈다고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오늘 날씨는 야외 활동을 하기에 최고였다. 집에 가는 길에는 오랜만에 맥주를 사서 저녁으로 먹은 닭튀김과 함께 먹었다. 이것저것 먹느라 오랜만에 밖에서 돈 많이 쓴 하루였는데 정말 행복했다. 문제는 집에 오니 가게 그룹 채팅방에 보스가 향후 변경 사항 이것저것을 얘기해 놓아 앞으로의 가게 생활이 캄캄하다는 것이다..
4월 21일(일)
오전엔 청소하고 오후에는 남편이 봉사활동으로 외출해 집에 혼자 있었다. 오늘 일 한 코워커가 어제부터 있던 일을 이야기해 줬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어제 마감 무렵에 갑자기 보스가 자기 아이들과 들이닥치더니 밤늦게까지 가게를 열어보겠다고 했단다. 알겠다, 하고 코워커들은 퇴근했는데 오늘 아침에 출근하니 에어컨을 끄지 않아서 에어컨 아래에 있는 티비로 물이 스며들어 티비는 망가지고, 티비 아래 테이블이 물로 축축하게 다 젖어 물난리가 난 걸로도 모자라 청소해 놓은 주스 머신을 사용하고선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고.. 그래놓고 어제 그룹 채팅방에 이렇게 바꿔라 저렇게 바꿔라 말이 많았으니, 우리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늦은 저녁 시간에 갑자기 셰프한테 연락이 와서 보니 보스가 시프트를 확 줄여서 주말에만 일 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우리 가게만 그런 줄 알았는데 보스가 운영하는 사업체 전체적으로 개인이 일 하는 시간을 줄이려는 모양새인 듯하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지만 주 6일 근무에서 주 3일 근무로 절반의 시프트가 깎인 사람이 제일 근심스러울 것이다. 다가오는 목요일이 공휴일이라 우리 가게도 직원들 스케줄이 변경됐는데 주 6일 일 하던 코워커들이 주 4일 시프트 배정을 받아서 불만스러워하고 있다. 이스터 이후로 계속 직원들 시프트를 줄이는데, 이러다 누구 하나 그만두고 나간다고 할 까봐 걱정이다. 내가 먼저 그만둘 거니까 다들 나 일 할 때까지는 퇴사 욕구를 잘 참아주면 좋겠다.
4월 22일(월)
감사하게도 보스가 안 와서 매우 수월했던 하루였다. 매니저가 와서 청소 가지고 잔소리했지만 지난 일주일 간 보스의 잔소리를 겪었더니 매니저 잔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매니저랑 일주일 내내 같이 일 할래..
오후 1시 30분부터 슬슬 마감 듀티를 시작하는데 최근 몇 주간 2시 넘어서 오는 손님들이 늘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마감 듀티는 주로 청소, 설거지인데 손님들이 계속 오면 설거지 거리가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감 30분 남기고 오는 손님에게는 미안하게도 미소가 나가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집에 갈 시간이 코 앞인데 일거리를 주는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집에 오는 길에는 사고 날 뻔했는데 용케 잘 피했다. 각자 우회전으로 합류하는 상황에서 나는 내가 우선이라 생각해 빠르게 들어가려는데, 상대도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무 사고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늘 그렇지만 앞으로 운전할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지.
아, 제발 내일도 오늘처럼 무사히 넘어갔으면 좋겠다.
4월 23일(화)
오후에 매니저가 와서 좀 도와주려나 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모든 직원은 웬만한 러시에는 단련이 되어있어 많은 주문도 늦지 않게 처리하지만 매니저는 어쩌다 한 번 가게에 와서 그런가, 손님 한 명이 주문받는데 뭐 이렇게 오래 걸리냐며 컴플레인을 강하게 걸었다. 우리끼리만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수준의 러시였는데, 하여튼 도움이 안 된다.
요즘따라 손님들이 마감 직전까지 가게에 오는 바람에 마감할 때 더 정신이 없다. 온전히 청소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계속 설거지 거리는 늘어나고 바닥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금방 더러워지니 일이 끝나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어제 그나마 덜 바빠서 홀 대청소를 했기에 망정이지 오늘이 대청소 날이었다면 두 힘들었을 것이다. 판매되지 못 한 신 메뉴 디저트 몇 가지 집으로 챙겨가면서 오늘 하루는 마무리!
목요일이 공휴일이기 때문에 내일만 일 하면 하루 쉴 수 있다. 이스터 즈음부터 주 4일 일 하는 게 익숙해진 건지 주 5일 일 하는 게 힘에 부치는 요즘이다. 날씨가 추운 것도 한몫하는 것 같고. 어쨌든 하루만 더 힘내보자.
4월 24일(수)
쭉 괜찮았던 하루였는데 마감 즈음에 보스가 자녀들을 데리고 들이닥쳐서 하루의 끝이 좋지 않았다. 나는 보스의 자녀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올 때마다 모든 것을 어지럽혀 놓기 때문이다. 오늘도 와서 커피를 한참 뽑아가는데 포터필터 장착을 제대로 안 한 상태에서 추출버튼을 눌러 사방팔방 커피 가루며 믈이며 다 튀었다. 마감 30분 전이라 다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 상태였는데.. 거기다 보스는 자녀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그런 엄마의 태도를 보고 배운 건지 자녀들 역시 그렇게 해도 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게 더 화나는 부분이다. 아무리 자기 소유의 가게고 우리가 일 하는 직원이지만, 적어도 자기 가게에 애착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녀들의 행동을 방치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지난 일요일에 있던 난리통에 대해 코워커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에어컨과 티비를 켜 놓고 가서 가전을 다 망가뜨린 게 전부가 아니었다.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는 샌드위치 재료들 뚜껑을 닫아놓지 않아서 모든 재료가 바싹 말라있었고, 출입문을 걸쇠까지 잠가놓아서 아침에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결국 뒷 담을 넘어 뒷문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고..
겪으면 겪을수록 의욕만 넘치고 책임감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의욕이 직원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 의욕에서 탄생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는 상관없다는 태도에 모두가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고. 금요일에 올 것처럼 예고해 벌써부터 아찔하다.
저녁에는 코워커 초대해서 저녁 같이 먹고 간식까지 야무지게 먹고 한참 놀다가 갔다. 4시간을 떠들었더니 목이 다 아프네. 내일은 어디 안 가고 푹 쉬어야지.
4월 25일(목)
느지막이 일어났는데 아침 공기가 너무 추웠다. 작년 8월에 얇은 이불 한 장으로 어떻게 겨울을 버틴 건지 모르겠다. 아직 겨울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두꺼운 오리털 이불만으로는 부족하다. 겨울엔 얼마나 추울까.
참전용사를 기리는 공휴일이라 그런가 구글맵에서 웬만한 마트는 다 문을 닫는다고 나와있길래 간신히 문 연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장을 봐 왔다. 늘 장 보던 마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니까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무엇이든 대량으로 판매하는 곳이라 물건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딱 봐도 금방 못 먹을 것 같은데 선택지가 없어 당분간 돼지고기 들어간 찌개류를 많이 먹어야 할 것 같다.
오전에 타이밍을 놓쳐 커피를 못 마시는 바람에 낮에 하루종일 졸았다. 낮잠도 푹 자고, 남편은 한국에 전화할 일이 있어 한참 통화하고, 나는 책 읽고. 추운 날씨에 국물이 당겨서 칼국수를 해 먹었다. 내일 출근하기 너무 싫다. 금요일까지 쉬어서 4일 내내 침대에서 이불 덮고 누워있고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