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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쿡크다스 Dec 30. 2023

남반구 하늘 아래:호주에서의 시작

호주 1주차(23.7.20.~23.7.27.)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생략하고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나는 지금 호주에 있다.
말로 하자면 정말 긴 지난 6개월 동안의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차차 푸는 것으로 하겠다.
 

7월 20일(목)

호주로 가는 비행기 안에 몸을 실었다.
영영 못 보는 게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슬픔을 억누를 수 없어 엄마를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결혼하고 나서는 몇 달에 한 번 꼴로 밖에 못 봤기 때문에 내가 호주에 있는 기간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과 장장 15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에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슬픔도 있지만,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지금처럼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을 느낌에 괜히 더 서러웠는지도 모른다.
 
꼬박 하루를 다 소요해 도착한 호주는 추웠다.
한국에서 한창 더운 날씨를 느끼다가 와서 그런지 더 춥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한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호주 날씨라는데 마음이 공허해서 그런가, 찬 바람이 가슴을 훅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래저래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숙소에 도착해 간신히 짐을 풀고 대충 허기를 때우고 잠에 들려고 했다.
피곤해서 금방 잠들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바뀐 환경과 신체 리듬 때문일까, 잠이 영 오지 않았고 한참을 뒤척이기만 했다.
 

7월 21일(금)

본격적으로 호주 정착을 위해 다양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은행 계좌도 활성화하고 체크카드도 받았고 집 렌트 인스펙션도 두 군데나 보고 왔다.
사람 사는 데 다 똑같다는 마음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새로움에 자극을 덜 느끼는 건지,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곳이 호주라고 해서 뭐 특별한 거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냥 내가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 하루가 금세 지나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많이 걸어서 좋았던 하루로 기억한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는 매일 1만 보 이상 걷다가 퇴사하고는 그 절반으로 줄었다. 최대한 많이 걸으려고 의식했지만, 작정하고 걷는 시간이 사라지니 1만보를 매일 채우는 게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꽉 찬 만보기를 보니 괜히 뿌듯했던 하루. 남편과 장을 볼 때는 유학 시절이 떠올라 잠시 추억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물가가 비싸다. 유학했던 지역은 식료품 값은 정말 저렴해서 장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호주에서는 장 볼 때 한화로 계산을 해야 지출을 조절할 수 있을 것 같다.
 

7월 22일(토)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으로 잠에 취한 뇌를 깨웠는데, 커피 머신이 없으니 아침마다 커피를 사러 가야 한다.
이것도 은근히 비싸다. 호주 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래봤자 커피 맛이 거기서 거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먹으니 정말 맛있다. 라테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는 거였어?
 
부지런히 집 렌트 인스펙션을 보러 갔다가 현타 제대로 온 날이다.
남편과 내가 최대 지불 할 수 있는 금액보다 낮은 금액대의 집을 보러 갔는데, 집 컨디션이 영 아닌 것이었다.
분명 1층인데 집 안에서 창문을 열면 반지하. 이 금액으로는 이 정도의 집 밖에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약간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직접 발로 뛰면서 최소한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집이라면 어느 정도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기준을 정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래서 발품 팔라고 하는구나.
 

7월 23일(일)

맛있는 피자집 발견!
어느 나라에서든 한국에서 맛본 피자 맛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런 건 안 판다.
화덕피자 집에서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도우는 찹쌀이 들어간 것 마냥 쫀득하고 적절한 토마토소스와 치즈의 궁합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아침에 커피를 못 마셔 두통이 생기려 하길래 롱블랙을 같이 주문했는데, 내가 먹었던 블랙커피 중에 가장 맛있었다. 정말!
또 가고 싶은데 외식비가 비싸서 망설여진다.
 
숙소에서 요리하면 되는데, 공용주방 컨디션이 요리를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라서 불 안 쓰는 요리로만 대체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주에서는 일요일에도 마트가 연다는 것. 전에 유학했던 나라는 일요일이면 문을 여는 곳이 없어서 토요일 저녁에 부랴부랴 장을 보곤 했었다.
 
지출 내역을 곰곰이 살펴보니 둘이서 커피 한 잔씩 하면 약 10불, 패스트푸드 점에서 먹으면 약 20불, 식당에서 제대로 먹으면 30불 이상 지출하고 있다. 
매일 커피 한 잔에 간단하게 점심 사 먹으니 하루에 30불 이상을 꼬박꼬박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게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면 통장 잔고에 무리가 오는 건 순식간이겠는 걸?
 

7월 24일(월)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의 체크카드만 도착 안 한 게 이상하다.
분명 한국에서 같이, 신청서 내용도 똑같이 작성했는데 내 것만 도착한 게 납득이 안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호주다. 이야기해도 어차피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려달라. 그래, 마음을 비워야겠다.
 
카페에서 예상치 못한 서비스(?)를 받았다. 
커피만 주문하고 앉아있는데 아담한 키의 백인 여학생이(학교 안에 있는 카페니까 학생이겠지?) 빵류를 손에 들고 두리번거리며 손님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냥 허공을 응시하다 눈이 마주치고 학생은 지나가는 듯했는데 돌아오더니 우리에게 바나나 빵을 주고 갔다.
주문 한 손님을 못 찾았거나, 주문하지 않은 품목인에 잘못 챙겨 나온 듯했다.
카페가 워낙 시끄러워서 학생이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이래저래 하니 먹으라는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맛있었다. 내가 바나나 넣은 디저트 몇 번 만들다가 실패했는데 그때 성공했다면 이런 맛이었을까 싶다.
 

7월 25일(화)

TFN신청 완료했다.
호주에서 일하려면 TFN이 꼭 있어야 하는데, 우편물을 받을 주소가 확실치 않아 신청조차 못 하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주소를 확정하게 되어 신청했다. 이제 TFN 우편이 오면 운전면허증도 신청할 수 있다.
 
그나저나 호주에서 본 새들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로 운다. 크기도 크고 사람을 크게 경계하지 않는다.
까마귀를 포함해 까만 새가 많이 보여 여기 새들은 다 까만 편인가 싶었는데, 지나가다 본 앵무새를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점심에는 피자를 먹었는데 일요일에 간 집 보다 아쉬운 맛이었다. 치즈는 잘 늘어나서 좋았는데 토마토소스 맛이 너무 약했다.
그리고 비가 본격적으로 오는데 창문 때리듯 심하게 오다가 갑자기 그친다.
하늘을 보면 먹구름과 흰 구름이 섞여있는데 먹구름 아래에서만 비를 맞는 걸 보니 요령껏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일을 구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한국이나 호주나 경력직 선호하는데, 그러면 신입은 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나요?
 

7월 26일(수)

캥거루 봤다.
캥거루를 보니 비로소 호주에 온 것 같다.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가까이 가서 만져도 피하지 않는다. 물론 경계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유튜브에서 본 사람 키 만한 캥거루는 아니었다.(그럼 왈라비인가?) 아마 그런 크기의 캥거루를 마주했다면 지금 살아서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거다. 
늘 안전하자!
 


큰 쇼핑몰에도 다녀왔다. 버스를 오래 타야 해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나들이.
타겟, K마트도 구경하고 (나는 2년 전쯤, 타겟의 주주였다) 이사 가서 어떤 살림살이를 사야 할지 생각도 해 보았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큰 가전, 가구는 다 구비되어 있지만 작은 것들은 내가 사야 하는데 돈이 한 두 푼이 아니다. 아쉽다. 전압이 안 맞아서 놓고 온 나의 소중한 작은 가전제품들이. 
 
어제보다 비가 더 많이 왔다. 비를 쫄딱 맞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감기 걸릴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하길래 얼른 뜨거운 물로 씻고 쉬었다.
다행히 호주에서는 뜨거운 물이 막힘 없이 콸콸 나온다. 한국에서는 보일러를 어떤 걸 쓰느냐에 따라 뜨거운 물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틀면 그냥 바로 펄펄 끓는 것처럼 나와서 걱정은 없다. 
지금은 내 집이 아니니까 좋다고 느끼지만 이사 가는 집에서는 이게 다 내 돈이겠지? 전기, 가스 민영화 무섭다.
그런데 인터넷은 왜 이리 느리지? 인터넷 속도가 날씨에 영향을 받는다더니 진짜인가?
 

7월 27일(목)

첫 번 째 숙소에서 두 번째 숙소로 옮겼다.
완전히 다른 느낌의 숙소인데 두 번째 숙소가 확실히 편하다. 에어비앤비라 집주인 눈치 보이는 게 있지만 그래도 쾌적하다.
빨래도 해도 된다길래 밀린 빨래를 전부 했다. 이전 숙소에서는 빨래를 할 수가 없었다. 늘 세탁기가 꽉 차 있어서.
숙박하는 인원 대비 세탁기, 건조기가 부족했던 듯싶다.
집주인도 모르는 사람에게 방 한 칸 빌려주는 게 불편할 것 같은데 남편 왈, 안 쓰는 방으로 이만큼 돈 벌면 그 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얼마를 냈는지 계산해 보니 맞는 말이다. 
 
그래도 이젠 요리도 할 수 있으니 식비를 아껴보자며 한참을 장을 봤다. 생각보다 계란이 비싼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다. 외식 한 끼 값으로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샀으니 이 정도면 선방했다.
 
지출을 봐야 하는데 너무 정신이 없다. 그리고 사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마주해야 한다.
마주해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지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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