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장난처럼 '카드와 핸드폰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라는 말을 하며 운전 중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고 스스로를 안정시키곤 했다. 하지만 길을 잃어봐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거기서 거기였고 내가 다니는 동선이 크게 새롭지 않다 보니 고속도로를 타는 것 빼고는 새로운 길을 갈 일이 없는 일상이다.
가끔 공연을 보러 가도 늘 남양주를 거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네비도 별 필요가 없다. 그러다 어제 오랜만에 차에 달린 순정 네비와 커다란 의견 차이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핸드폰 네비를 쓰자니 화면도 작고 거치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차량 네비를 믿고 다니고 있었는데 그래도 크게 문제없이 길을 안내하던 나의 가이드가 아주 오랜만에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길을 안내한 것이다. 너를 너무 믿어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저기서 나가는 것 같은데. 난 운전 중 길 찾기에 소질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걸어 다닐 때 길을 잘 찾는 것도 아니다.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매우 직관적으로 생긴 지도를 가지고도 길을 헤매서 나중에는 지도를 그냥 기념품처럼 들고 돌아다니고 결국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어딘지도 잊어버리는 상황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니 안 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결국 그냥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산책에 만족하고 나니 지도 스트레스가 없어져 좀 더 마음 편한 유랑이 가능했던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난 나를 믿지 않았다. 나의 기억력은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나의 네비는 오늘도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되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새로운 길이 생긴 모양이라고 굳은 믿음으로 들어선 길에 자꾸 '상수도 보호 구역'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내가 다니는 익숙한 그 길이 아니라 아마도 그 강의 건너편을 타고 가는 모양이다. 매우 어둡고 심지어! 강을 따라 다리 위를 쭉 달리자니 무서웠다.
내가 다니는 길은 건물의 불빛도 있고 가로등도 있으며 심지어 내 눈에 익숙한 지형지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길은 대강 어딘지 알 것 같지만 이 어둡고 추운 겨울날 (별로 추운 날은 아니지만 역시 심리적 스트레스가 크게 작용하는지 매우 추웠다) 강을 따라 다리 위를 달리다 보니 '블랙 아이스', '추락 사고' 등의 경고 문구가 머릿속에서 매우 선명하게 떠오르는 바람에 한 겨울밤, 혼자만의 공포 영화를 찍고 있었다.
그래! 이것은 새로운 상황이니 새로운 경험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고 아무리 맘을 다잡아봐도 그다지 맘에 안 드는 길이었지만 그래도 초 긍정적인 마음을 총동원하고 보니 내가 다니는 길에 비해 노면이 고르다는 장점을 겨우 발견했다. 내가 애용하는 도로는 바닥이 꽤 노후해서 가끔 타이어가 터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니까.
고른 노면이라는 장점을 억지로 찾아낸 공포에 질린 내 모습이 다소 가소로웠으나 그래도 한번 장점을 찾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작고 사소했던 긍정적인 마음은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만나며 산산조각 났다. 고른 노면은 개뿔, 가로등 1도 없는 이 산길을 이 새벽에 달리다 추락해서 죽으면 내 시신을 누가 수습하냐?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비 걸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져 결국 나만 들을 온갖 저주, 짜증,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겨우 집에 살아서 도착했다.
애초에 아는 동네 이름이 나왔을 때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설마 하는 마음과 새로운 도전이라는 같잖은 긍정적 자기 위안 때문에 결국 집에 도착하니 진이 다 빠져서 심지어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미 여러 번 나를 배신했던 네비, 이미 우리 모친은 네비는 거짓말을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시는데 나만 바보 같았다.
이제 살아남아 그 지난 3시간의 운전을 되돌아보니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체 모를 공포와 말 같지 않은 내 상상회로를 오랜만에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네비야, 오랜만이니까 그냥 넘어갈 거야. 그리고 다시는 목적지 설정 그런 식으로 안 할 거야. 이제 꼭! 남양주 찍고 네비 끄고 집에 갈 거야. 너.. 정말 자꾸 이런 식으로 거짓말하면 강제 업데이트 해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