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는 중이야

있지도 않은 이유를 굳이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by 플로터

나의 아이돌이 해외 투어를 떠난다. 이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이미 너무 이것저것을 저질러놔서 투어에 따라나설 상황이 아니다. 그냥 포기하면 편해지는데 오랜만에 하는 이 덕질은 자꾸 마음이 두근두근거리고 따라나서야 할 것 같은 충동으로 가득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비행기 표를 검색하고 공연장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지만 아직은 이성이 조금 더 앞서 있어 그냥 마음만 멀리 떠나고 있는 중이다.


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어서인가? 요즘 들어 꽤 무기력하고 기분이 자꾸 가라앉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밤늦게 갑자기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울 오빠를 못 따라나서서 우울 해진 건가?'라는 생각에 나 스스로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요 근래 나에게 가장 우울한 일은 나의 아이돌을 보러 갈 수 없는 것뿐이다.


아이돌 덕질을 시작하며 빈부격차를 느끼는 타이밍이 의외로 자주 있었다. 겨우 무리를 해서 이벤트에 응모를 했으나 결국 당첨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응모한 이벤트는 애초에 확률이 너무 희박했다. 좀 더 가능성이 높은 응모 방식도 있었지만 그건 꽤 큰 금액이 필요한 일이라 처음부터 선택지에 넣지 못했다. 그때는 나름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으나 떨어지고 보니 좀 더 열심히 돈을 벌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이 요즘 내 저조한 기분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제도 역시 다소 우울한 기분으로 요즘 자주 듣는 노래를 들으며 저녁 산책 겸 운동을 나갔다. 공교롭게도 요즘 내가 꽂힌 곡은 다소 우울한 느낌의 곡이라 가뜩이나 기분이 상큼하지 못한 나는 운동 중에도 꽤 생각이 복잡해지곤 했다. 노래를 들으며 감성과 고민 가득한 산책을 시작했으나 억지로 조금 달리다 보니 숨이 차서 기분이나 감성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졌다.


러다 분위기도 전환할 겸 라디오를 틀었더니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졌고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잠시 우울한 생각을 멈추고 라디오에 집중하며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지도 못한 노래 가사 속에서 내 원인 모를 우울감의 정체를 찾아냈다. 이거다! 나는 지금 날씨에 속고 있는 거였다. '난 속는 중이야 이 날씨에 이 분위기에'라는 가사의 노래를 들으며 요즘 이해할 수 없었던 내 기분의 정체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계절을 탄다는 말이 남의 얘기인 줄만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쌀쌀해진 날씨에 쓸쓸한 기분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겨울이었는데 요즘엔 겨울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손님이 있건 없고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다 보면 추운 겨울엔 더더욱 싸늘한 가게 안의 온도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사람 하나 없는 어두운 바깥 풍경이 우울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라 그런가. 어느새 한껏 짧아진 해와 갑자기 시원에서 추위로 넘어가버린 온도로 인해 기분 가라앉았던 건가 보다.


그 와중에 대놓고 속는 중이라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좀 차려졌달까. 정신이 차려진 것보다는 나의 원인 모를 우울함의 이유가 어쩌면 나의 착각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좀 더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래, 계절을 탈 수 있고 날씨에 속을 수 있다. 그래서 우울해질 수도 있다. 괜히 원인을 찾는답시고 엉뚱한 이유를 만들어냈다. 무엇이든 꼭 납득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이번에도 아무런 이유 없는 계절성 기분 변화에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지금은 잠시 날씨에 속고 있는 중이다. 곧 이 온도에 익숙해지면 나의 원인 모를 우울증도 사라질 것이다. 괜히 쓸데없는 고민할 시간에 어서 이 계절에 적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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