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라도 마셔야지

아니! 아버지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by 플로터

나의 음주는 이제 어느 정도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지난여름 3개월가량을 고모네 집에서 머물면서 나의 음주량을 직관하신 고모와 삼촌은 이제 내가 마시는 술에 대한 코멘트를 접으셨다. 처음에는 다소 걱정과 염려가 섞여있었지만 3개월 내내 한집에서 생활하며 지켜본 나의 음주 습관이 내 삶에 크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분위기랄까.


고모네 집이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방에 화장실이 딸려 있어서 술을 가지러 주방에 가는 것이 아니면 거의 방 안에서 혼자 편하게 생활했고 무엇 때문인지 나의 술이 떨어지지 않도록 매우 신경을 쓰시는 삼촌 덕분에 3개월 내내 나는 아무런 지출 없이 내가 좋아하는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 불편함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던 것은 다소 예민한 나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새벽 3시까지 안 자고 돌아다니다 어쩌다 날 발견하신 어르신들에게 걸려 한마디를 듣는 일이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부친의 집에서 있게 되었다. 우리 부친은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고 심지어 귀가 어두우시다. 내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지 않는 한 밤 10시 이후에 시작되는 나의 음주 생활이 아빠의 간섭을 받게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물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매일 마시는 술에 대한 위험성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에 이번에는 쥐도 새도 아빠도 모르게 혼자 음주를 즐길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부친이 이상해졌다. 난 알아서 잘 어지르고 또 시기가 되면 알아서 잘 치우는데 무슨 일인지 내가 알바를 가고 나면 득달같이 내 방의 술병을 내다 버리시는 아빠. 왜지? 나의 기념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적당히 모인 다음 한 번에 내다 버리며 뿌듯함을 느끼고 싶은데 왜 하루에 한 번씩 꼭 나의 음주량을 체크하듯이 내 병들을 치우는 거지?


며칠 동안 내내 퇴근을 하면 사라져 있는 술병들이 마음에 걸려 어느 날 출근길을 배웅하시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나 눈치 주는 거야? 왜 자꾸 내 술병을 치워?"라고 다소 민망한 나의 심정을 담아 물어보았더니 한마디 하실 줄 알았던 아빠는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지."라고 답하셨다. 뭐지? 나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길래 음주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측은한 말을 들은 거지? 물론, 내 삶에서 뺄 수 없는 큰 즐거움인 것은 사실이지만 매일 술 마시는 자녀에게 부친이 해줄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조금 안심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좀 잘못 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나름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부모의 눈에는 술 마시는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 측은한 자식인 건가?

늘 그렇듯 나만의 과장된 생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그 말은 조금은 아픈 것 같다. 나는 즐겁지 않은 건가? 나는 지금 측은하게 살고 있는 걸까?


사소한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작지만 즐거운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던 나의 일상은 아주 작은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가끔씩 크게 흔들릴 때가 있다. 이제 조금 안정적으로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난 아직도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상처받는다. 물론, 그 상처 또한 매우 쉽게 잊혀져 지금은 우스갯소리처럼 아버지의 답변을 나의 음주 변명으로 사용 중이지만.


언제가 되면 지나는 듯한 말들에 상처받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되면 인생은 너무나 지루해지지 않을까?

아직도 이렇게 가볍게 흔들리고 상처받는 일들이 있다는 것이 슬픈 일인지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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