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도 사양합니다.
나는 아이돌 팬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아이돌님은 나보다 10살 이상 어리신 분이다. 하지만 오빠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연히 "잘생기면 오빠"라는 국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니 다시금 티브이에서 재방이 시작된 '응답하라 1988'에서 저 대사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꽤 놀랐다. 그때도 정말 저런 말이 있었는지 아니면 배경은 오래전이지만 대사는 현대적 감각을 차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며칠 전 열심히 영상을 감상하던 중 나의 아이돌 오빠가 어느 가게에 가서 사장님을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봤다. 나는 오빠라고 부르고 있는데 (물론 이것도 잘못된 호칭이다) 그 오빠님이 내 나이뻘의 사장님을 이모라고 부르는 상황을 목격하니 갑작스레 현타가 왔다. 난 조카 바보가 된 것인가? 나의 호칭과 팬질이 다소 민망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는 전국 방방 곳곳에 친척들이 산재해있다. 어딜 가나 이모가 있고 어머니가 있으니. 그런데 이상한 건 고모나 아버지는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숫자만큼 아빠도 있어야 할 텐데 고모나 삼촌 또는 아버지는 듣기 어렵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널리고 널린 모계 중심의 호칭에 진저리를 치다가 괌에 갔다. 괌에 가면 절대로 들을 일이 없을 '이모'나 '엄마' 호칭. 하지만 인생은 언제 어디에서 함정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고모의 가게에는 퇴근길마다 맥주와 미니 보드카를 사가는 필리핀 남자 손님이 있다. 한 달 가까이 보다 보니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된 단골손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를 하면서 '마마'라는 호칭을 쓰길래 단골손님들에게 '엄마'라고 부르라고 지정해주신 큰고모를 지칭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후에 나에게 계산을 하며 한국말로 '엄마'라는 호칭을 쓰길래 나는 급 정색을 하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는 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지 '난 다 엄마라고 부르는데?'라고 말하길래 짜증도 나고 어이가 없어서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그 손님이 오면 계산대를 비우고 딴청을 부리며 매우 티 나게 그를 외면 및 무시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티 나게 피한 덕분인지 그 이후 그는 우리 가게의 그 누구에게도 '엄마'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흔한 일이고 내가 유독 까탈스럽게 구는 것일 수도 있다. 드라마 속에 식당 주인이나 점원은 모두 '이모'라 불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로는. 그런데 '왜 모두 엄마나 이모 일까?' 고모의 가게는 고모가 사장이지만 고모를 '보스'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다. 이름이나 '마마'라고 불리는 사장님 고모와 칼같이 '보스'라고 불리는 삼촌. 이상하지만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만 불편하게 깨달아버린 이상한 호칭.
나 역시 자영업을 시작하며 간간이 듣는 '이모' 호칭이 소름 돋게 싫지만 너무 뿌리 깊은 관습적 호칭이라 반쯤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울 오빠의 '이모' 발언은 뼈아프다. '오빠! 전 오빠가 조카 같아서 좋은 게 아니에요~ 이모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어머니도 사양합니다.'
나이 든 여자는 왜 이모나 엄마가 되어야 하는 걸까. 밥을 주는 사람은 왜 엄마나 이모여야 하나. 나이 든 남자는 아빠가 되지 않아도 되는데 나이 든 여자는 꼭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이 호칭. 언제쯤 나도 쿨하게 들어 넘길 수 있을까. 참으로 불편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