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으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
어두운 밤, 비가 쏟아지는 도로에 길을 잃은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미국 테네시주 근방 시골길을 헤매고 있다. 이때 경찰 사이렌이 빗속을 뚫었다. 경찰은 고급 승용차를 멈춰 세워 차량을 검문한다. 승용차 안에는 백인 남성 한 명과 흑인 남성 한 명이 타고 있었다. 경찰은 뒷좌석에 앉은 흑인 남성을 차에서 내리게 했다. 경찰은 흑인 남성에게 이곳은 해가 떨어지면 흑인 통행이 금지되는 지역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인이라는 백인 남성에게는 반은 깜둥이 아니냐고 비아냥거린다. 백인 남성은 모욕을 참지 못하고 경찰을 폭행해 유치장에 갇힌다. 흑인은 폭력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통금 시간 위반으로 같이 구금되었다. 흑인 남성은 변호사를 부르겠다면서 전화를 빌렸다. 어디로 전화를 했는지 잠시 후, 경찰서로 테네시주 주지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둘은 곧바로 풀려나게 된다. 흑인 남성이 전화 한 사람은 법무부 장관인 ‘로버트 케네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었다. 이 흑인 남성의 정체는 천재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다. 그는 백악관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 초청을 받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백인 남성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셜리의 운전수이자 보디가드다.
영화 < 그린북 >은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이야기이기이다. 이야기는 1963년 돈 셜리가 미국 남부로 순회공연을 떠나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남부의 인종차별은 북부에 비해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혼자 순회공연을 떠나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셜리는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를 구했다. 술집과 클럽 등에서 일하면서 동네 해결사 역할을 하던 발레롱가는 이 일에 적격이었고 셜리의 제안으로 함께하게 된다. 품위를 중시하는 셜리와 거칠고 자유분방한 토니는 그림자처럼 서로를 도우면서 우정의 8주 남부 순회공연에 나선다.
8주 투어 준비하던 어느 날. 토니는 셜리의 음반 회사로부터 ‘흑인여행자를 위한 그린북’을 받게 된다. 흑인여행자가 남부여행을 갔을 때 묵을 숙소와 이용할 식당들의 목록이 별도로 적혀 있는 책자였다. 당시 미국 내에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정이 진행되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이 들이닥쳤다. 켄터키주 공연을 앞두고 한 숙소에서 짐을 풀었던 어느 날이었다. 셜리는 바람을 쐬러 근처 펍에 잠시 들렀다가 봉변을 당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 손님들에게 폭행을 당한 것이다. 토니가 달려와 그를 구해주면서 둘은 점점 더 동료임을 확인한다.
여정들은 하나같이 순탄하지 않았다. 테네시주에서 토니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경찰서로 향했다. 셜리와 한 남자가 벌거벗겨진 채로 수갑을 차고 있었다. 건물관리인이 셜리와 남자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동성애자로 신고한 것이었다. 토니는 경찰관들에게 양복값을 주고 셜리를 빼냈다. 셜리는 자신은 죄가 없는데 왜 돈을 주었냐고 화를 내며 이런 말을 한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죠?”
셜리는 성적 정체성에 흔들리고 있었다. 통상의 흑인답지 않게 돈을 많이 벌어 사회적으로 품위를 유지하였다. 그렇다고 백인과는 처지가 달라 흑백 어느 사회에도 소속되기 어려웠다.
험난했던 투어 일정의 끝은 앨리배마주 버밍햄 한 호텔 크리스마스 콘서트였다. 셜리가 공연준비를 하는 동안 토니는 호텔 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셜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남부 투어를 단행한 이유를 듣게 된다. 그 배경에는 유명 흑인 가수은 ‘냇 킹 콜’ 사건이 있었다. 1948년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이 흑인 재즈보컬리스트는 1957년 버밍햄에서 공연 도중 흑인이 노래한다는 이유로 무대에서 끌려 나와 구타를 당한다.
셜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높은 개런티가 보장되는 북부 공연을 마다하고 흑인 톱가수가 폭행당했던 그 현장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버밍햄 공연은 무산됐다. 호텔 측이 공연 전 식사를 위해 호텔 식당을 들어가려던 셜리를 막아섰다. ‘흑인은 호텔 식당을 이용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는 거였다. 수많은 차별을 감내해 온 셜리도 이번에는 폭발했다. 그는 호텔 식당을 이용할 수 없다면 예정된 공연을 하지 않겠다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셜리는 대신 흑인들이 애용하는 펍 ‘오렌지 버드’에서 즉흥 재즈 공연을 펼쳤다. 흑인들은 그의 재즈 연주에 공감하고 환호했다. 여정이 끝난 크리스마스이브, 토니의 집에서 만난 둘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다. 차별과 투쟁, 분노, 환호로 얼룩진 순회공연의 장면들이 그들의 뇌리를 스쳤다. 영화의 막도 내려졌다.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 셜리와 발레롱가는 2013년 몇 개월 차이로 사망할 때까지 우정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린북의 각본, 제작을 맡은 사람은 어린 시절 그들의 투쟁과 우정을 지켜본 발레롱가의 둘째 아들 ‘닉 발레롱가’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셜리를 포함한 수많은 흑인들이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그들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은 다소 줄었다. 영화 속에서 인종차별에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른 토니를 보면서 셜리가 외친 한마디는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폭력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품위를 유지할 때만 이길 수 있다. 품위가 늘 승리한다.”
이 말은 인종차별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회적 인식의 개선에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방식은 집단에 대한 혐오와 불신만 낳을 뿐 인식개선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셜리가 말한 품위는 과연 무엇일까? 품위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을 말한다. 셜리는 폭력적인 언행과 차별에 품위로 맞서고자 했다. 그런 그의 태도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인식은 상당 부분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흑인의 사회적 지위 또한 많이 향상되었다. 아마도 셜리의 외침을 위대하게 실천한 사람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인지 모른다. 그는 2008년 11월 4일 미합중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수락 연설을 함으로써 미국 흑백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새로운 획을 그었다.
영화 <그린북>은 1960년대 미국 사회의 이야기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0년대 미국 사회와 현재 한국 사회의 공통점이 있다면 급변하는 시기라는 점이다. 1955년 12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으로 집단행동에 나선 흑인들은 흑백 분리주의 철폐를 요구했다. 1960년 미국 사회는 유색인종과의 화합을 시도하던 급변의 시기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3D (Difficult, Dirty, Dangerous)라고 부르는 한국인 기피 업종에 외국인 노동자 투입이 증가하면서 다문화가정이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국제결혼 비율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우리 정부는 다문화가정이 한국 사회에 화합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책을 늘려가고 있다. 하지만 ‘다문화 특별반’ 같은 정책은 분리를 심화하고 화합적 결합을 어렵게 한다. 우리가 정작 먼저 바꿔야 할 것은 글로벌 시대에 걸맞지 않은 순혈주의 같은 유산이다. 인식이 개선돼야 적절한 제도가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