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글쓰기
군대를 조금 늦게 간 탓에 복학을 26살 나이에 하게 되었습니다. 휴학 생활 1년과 군대 1년 반을 보내고 나니 학교를 다닌 기간보다 가지 않았던 시간이 더 깁니다. 최근 을지로 한 술집에서 오랜만에 학교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술 마시던 신입생 시기를 함께한 동기들은 어느새 졸업을 앞둔 취준생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도 잠시 대화 주제는 취직 이야기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선우야, 너 앞으로 뭐 하려고?"
오가던 얘기 중 동기의 한 질문이 사색에 잠기게 했습니다. 구체적인 직업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는 얘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해본 지 참 오래됐습니다. 누군가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검사’는 명사적 꿈이고, ‘불의를 없애겠다’는 것은 동사적 꿈입니다. 동기의 질문이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 것은 고등학교 진로 발표대회 때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겠다’ 던 내가 매일 ‘은행원’, ‘증권맨’, ‘관세사’ 등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복학을 앞두고 이번 방학 기간 동안 자격증 준비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저는 글쓰기를 일단 취미로 타협하고 실제 눈앞에 닥친 공부와 자격증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낭만'을 잊은 목각인형이 되지 않고자 글쓰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입니다.
요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영화글을 쓰는 직업으로 가보고 싶었던 저는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해 보고자 영화평론가 한 분을 직접 만났습니다. 만나는 당일까지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평론가님이 쓰신 글을 모조리 다 읽었습니다. 글은 아주 완벽했고 개성이 분명했습니다. 어떤 글은 문단이 나누어져 있지 않고 아주 갑갑하게 모든 문장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폐쇄공포증을 글의 구성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설레는 마음으로 당일 두 시간 먼저 카페에 도착해 인터뷰 준비를 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제 마음속 일부분이 무너진 기분이었습니다. 일단 영화 평론업계는 굉장히 좁고 외길이라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또한 영화 글은 쓰고 싶은 사람에 비해 읽는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공급이 많고 수요가 적으면 가격이 내려갑니다. 이쪽 업계도 경제학적 이론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평론가님은 영화 글을 쓰는 직업은 직업적 만족도는 높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움 되는 조언들을 들었지만 한 편으로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올렸던 낭만의 탑이 무너진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밤, 괜스레 시린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영화 글을 멈춰야 할 이유는 없었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실 그분만큼 영화 전문가이거나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극장을 사랑하는. 제가 쓰는 영화 글은 영화를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표출하는 하나의 방식에 영화를 이용하고자 합니다. 영화 하나에는 수많은 감정들과 인간관계들 그리고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활용해 적절하게 맞는 영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적인 것을 고려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 파묻혀 꿈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사람은 살아있는 목각 인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가져온 영화는 상상력이 풍부한 것을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욕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입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벤 스릴러가 감독이며 주연 배우까지 동시에 맡은 영화입니다. 월터 미티(벤 스릴러)는 라이프 잡지에서 16년째 일하며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그 지루한 삶에 '상상 속 세계'를 맘껏 활용해 잠시나마 특별한 순간을 꿈꿉니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기회가 옵니다. 폐간을 앞둔 라이프 잡지의 마지막 호 표지 사진을 찾아오라는 미션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린란드, 아이슬란드를 걸치며 상상 그 이상의 세계를 직접 보게 됩니다.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하나 소개합니다. 월터는 온라인 매칭 사이트를 이용했는데 이때 매칭 담당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상상력이 지나친 회원은 인기가 별로..."
상상력이 지나친 사람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현실적인 사람이 인기가 많은가 봅니다. 하지만 상상력은 우리를 숨 쉬게 만듭니다. 때로는 죽이고 싶은 직장상사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상상만으로도 그날 하루의 마무리가 상쾌할 때가 있습니다. 상상력은 우리 삶의 진정제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상상력이 넘치지 않는 연애는 아무리 봐도 재미가 없어 보입니다. 서로 조건과 현실만 바라본 연애와 결혼은 무슨 재미일까요. 매칭 사이트에서 인기가 없을지 몰라도 실제 연애는 상상력 없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내일 만날 데이트 상대 혹은 썸을 타는 상대랑 뭐 할지 상상만으로 설레는 것이 사랑의 시작 아닐까요?
월터는 수많은 곳을 돌아 아프가니스탄에서 숀을 만나게 됩니다.
숀은 기다리던 표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순간, 찍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말합니다.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에 머물고 싶지."
요즘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얘는 일 안 한다고 혼날지도 모릅니다. 또 누군가는 돈은 안 벌라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숀을 누가 이해줄 수 있을까 싶네요. 세상은 점차 각박해져 가는 것 같아요. 낭만이 밥 맥여주냐고 하겠지만 낭만은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철이 아직 덜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낭만 속에 살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때 영화 <용가리>를 보고 하루종일 용가리 한 마디만 떠들던 그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제가 독자 여러분께 하고 싶은 이야기로 마무리해 볼까 합니다.
여러분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