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로 보는 사법체계
유전무죄, 무전유죄
2006년 개봉작 영화 ‘홀리데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강혁(이성재 분)'은 경찰과 기자들 사이에서 이렇게 외친다. 당시 범죄를 미화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그 대사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돈의 유무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라진다는 인식이 이미 사회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이 같은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재벌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 중 법 위에 군림하지 않는 경우를 찾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2010년대에 접어들며 미디어의 풍경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디어는 갑작스럽게 ‘히어로’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배트맨, 슈퍼맨 등 영웅이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시리즈물이 인기를 끌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공정한 검사의 모습은 포기된 듯했고, 경찰의 영웅화가 미디어에서 본격화됐다. 2015년 개봉작 베테랑은 재벌 3세를 잡는 형사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그렸고, 2017년부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범죄도시 시리즈는 마동석 배우를 필두로 경찰이 범죄자를 힘으로 제압하는 이야기가 관객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몇 년 사이 또 한 번 변화를 겪었다. 일반인이 범죄자를 응징하고 복수하는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콘텐츠가 급증했다. 한 예로, 히어로 경찰물의 대표작인 베테랑의 속편 베테랑 2에서도 사적 제재가 주요 주제로 등장했다. 드라마 모범택시, 비질란테 시리즈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필자는 미디어가 왜 이같은 흐름을 보였는지 이해하고자 역사적 배경을 살펴봤다. 2000년대 초반, 자본의 격차가 법 적용의 차이를 만든다는 인식은 오히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더 분명해졌다. 1987년까지 이어진 군사 독재 시기에는 법 집행이 사실상 정권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고, 검찰은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 국민 대다수는 검찰과 경찰의 권력 남용에 분노했지만, 시선은 독재 정권을 향해 있었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권력에 종속됐던 검찰의 개혁 요구도 이 시기 처음 제기됐다. 시간이 흐르며 검찰과 경찰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졌다. 재벌이나 정치인 등 권력층이 낮은 처벌을 받는 현실은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특히 재벌 총수가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석하는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상징처럼 남았다. 이에 미디어도 달라졌다. 재벌을 때려잡는 경찰, 악인을 응징하는 형사 등의 캐릭터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히어로물'만으로는 국민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어려웠다. 현실은 바뀌지 않았고, 분노는 점점 쌓였다. 결국 사적 제재를 다룬 서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법 집행과 무관한 시민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는 서사, 즉 ‘비질란테’ 서사가 주류로 떠오른 것이다. 이는 누군가 대신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단계를 넘어, 각자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디어 변화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다. 법과 제도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임계점에 가까워졌다는 경고다. 실제로 지난 3월 검찰 신뢰도는 26%까지 하락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제도가 믿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하길 바라는 것이다. 부의 많고 적음, 권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사회. 그것이 대중이 꿈꾸는 최소한의 정의다. 최근 거세지는 검찰 개혁 요구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에는 진짜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질란테’는 더 이상 허구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