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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Oct 20. 2022

애증의 그 이름 친정엄마

  엄마는 25살에 오빠를 낳았고 27살에 나를 낳았다. 자식을 둘이나 낳았지만 엄마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빠는 직업이 군인 이였는데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담배를 제대로 사오지 않았다고 화를 냈고 술안주를 제대로 차려주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종종 뜬금없이 왜 자신을 무시 하냐고도 화를 냈다.

아빠는 엄마를 비난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 시절 아빠의 월급은 엄마가 공장에서 일하는 월급보다도 적었지만 엄마가 일을 하면 아빠를 무시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워 엄마의 직장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면서 내 돈으로 먹고 사는 년이라고. 집에서 애나 보는 년이라고 엄마를 무시하였다.

나보다 돈을 많이 벌면 안 되지만 돈을 벌지 않으면 내 밑에서 복종하라는 아버지의 모순적인 태도는 엄마를 무척이나 힘들게 만들었다. 엄마는 그래서 아빠 몰래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나갔다가 아빠 퇴근하기 전에 얼른 집에 돌아와 공장에 나가지 않은 척 연기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보물은 자식이었다. 엄마가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단 하나의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엄마는 자식 때문에 늘 이혼을 하지 않고 산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엄마의 그 보물 같은 자식에는 첫째인 오빠만 들어가 있었다.

엄마에게 오빤 늘 첫째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함이자 아들을 낳았다는 엄마의 유일한 자부심, 그리고 가난한 집 아들에게 가지는 부모의 애틋함이 서려있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시댁에서 엄마는 오빠만이 자신의 유일한 편이라고 생각하였다. 엄마의 팔뚝만큼 작은 아기가 그 당시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준 존재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오빠는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둘째인 나는 뭘 해도 오빠에겐 못 미쳤다. 난 일단 아들이 아니었고 둘째였으며 성격 자체가 오빠와 달리 무던하고 조용하였다. 아픈 데도 딱히 없었고 모난 구석도 없으니 엄마는 늘 나를 오빠를 사면 뒤따라오는 원 플러스 원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

대신 나는 엄마의 감정쓰레기통 역할을 하였다. 말귀를 알아먹을 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아빠 뒷담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시댁 욕이며 아빠 욕이며 엄마는 화가 날 때마다 나에게 신나게 퍼부었다. 나는 그럼 무슨 말인지도 모른 체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어수룩하게 엄마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그렇게 해야 엄마가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엄마의 짜증을 받아내는 샌드백 역할은 덤이었다. 아빠의 짜증이 엄마에게 올 때면 엄마는 그 짜증을 그대로 받고 난 뒤 나에게 토스하였다. 평상시에는 짜증내지 않던 행동이 아빠와 엄마의 부부 싸움 뒤에는 등짝을 맞을 만큼 나쁜 행동이 된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오빠의 사춘기시기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엄마가 믿고 의지하였던 오빠가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별 일 아닌 일로 시비를 걸 때마다 엄마는 그 스트레스를 모두 나에게 풀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엄마의 짜증을 들어주고 엄마의 화가 풀릴 때까지 방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머리가 굵어져 엄마에게 왜 엄한 데서 화풀이를 하냐며 맞서 싸울 수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시절 엄마는 나의 세상에서  전부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너는 절대 결혼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 주문 외우듯 말하였다. 결혼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여자가 능력이 있으면 절대 결혼 따위 하지 않는다고. 능력 없고 기생충 같은 여자나 남자에게 빌붙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말이다. 엄마의 그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실은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난 엄마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 일은 마음대로 안 된다고 나는 오히려 남들보다 일찍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32살에 혜민이를 낳았다. 나는 임신을 했을 때부터 엄마에게 혜민이를 같이 봐달라거나 좀 도와달라는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이미 오빠의 아들인 두 살배기 조카를 친정에서 키우고 있었다. 거기서 더 짐을 얹기도 싫었거니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기에 더욱 엄마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그 짜증스러운 표정과 우유를 조금만 흘려도 소리 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조리원을 나와서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 작은 아기를 혼자 돌보는 것은 내 권한 밖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여 며칠만이라도 같이 있어 달라 울면서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땐 엄마에게 자존심도 뭐고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전화를 받은 뒤 기차를 타고 장장 4시간을 달려 광명역에 도착하였다. 역시나 촌스러운 시골식 파마머리를 하고선 말이다. 엄마가 내 앞에 나타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우는 나를 보고 엄마는 무슨 대단한 일 났냐고 핀잔을 주며 갓 태어난 아기를 자연스레 안았다. 엄마는 내가 살면서 지금껏 보지 못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이쁜 아기를 가지려면 그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크면서 얼마나 더 큰 기쁨을 주는지 알면 이깟 고생은 열 번도 더 할 수 있다며 나에게 이 아이는 너의 보물이라고도 하였다. 결혼을 후회하고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하던 엄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인자한 눈주름과 능숙한 육아 스킬을 가진 할머니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는 아기에게 여유롭게 분유를 먹였고 엄마의 품에서 잠을 재웠다. 아기목욕도 마치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능숙하게 시켰으며 아기의 고 작은 손톱발톱도 척척 깎았다. 나와 남편은 엄마가 아기를 보는 동안 마치 구경꾼마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스웠다. 우리가 낳았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구경만 하는 꼴이. 그리고 너무 고마웠다. 내 아이를 사랑해주고 내 아이를 아껴주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엄마가 나의 곁에 오래오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엄마가 우리 집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단 4일. 조카가 이제 고작 두 살이기에 아빠 혼자 아기를 더 돌볼 수 없다는 말에 엄마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하루만 더 있다 가라고 애원하듯 말하였다. 이 작은 아기를 나 혼자 키워야 한다니.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엄마는 네 자식이니까 다 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나를 떠났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엄마에게 아기 키우기 힘들 때마다 한 번만 와서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종종 부탁하였지만 엄만 그때마다 도와줄 수 없다는 거절만 하였다. 엄마 또한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엄마의 거절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켜켜이 쌓여갔다.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오빠와의 차별에 대한 분노도 함께 커져갔다.

남편의 2박3일 출장이 잡힌 날 난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전화를 하였을 때 엄마는 역시나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고 거절을 하였고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쌓여왔던 분노는 폭발하였다. 도대체 엄마는 딸이 아기를 낳았는데 꼴랑 3일 봐주고 한 번을 도와주지 않냐고. 아들자식만 자식이고 내 자식은 남의 자식이냐고. 엄마는 내가 애를 낳고 나서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더럽고 치사하지만 찌질 해서 말하기 싫었던 나의 서러움이 폭발하여 엄마에게 향했다. 엄마는 웬일인지 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난 엄마와 몇 달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더 이상 엄마에게 도와달라는 부탁 또한 하지 않았다. 엄마의 도움 없이도 나 혼자 잘 키울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갓난아기를 키우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씻을 시간도 밥을 먹을 시간도 화장실을 맘 놓고 갈 시간도 없었다. 처음엔 이런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였지만 조금씩 나와 눈을 마주치고 꺄르르 소리 내 웃는 아기를 보면서 다시 힘을 냈다. 엄마 말대로 내 자식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아기가 고개를 가누고 천천히 뒤집기를 할 때쯤 엄마에 대한 분노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지금껏 엄마에게 갖고 있었던 서운함, 미움, 안타까움 등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엉켜있었던 감정의 골이 조금씩 옅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엄마의 다른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난 어린 시절 엄마가 부끄러웠다. 늘 유행 지난 옷을 입고 있던 촌스러운 나의 엄마. 누가 봐도 억척스러운 아줌마였던 나의 엄마. 가난한 군인 남편 만나 평생 가난하게 살다 이제 좀 살만하다 싶을 때 홀로 손자를 떠맡게 된 나의 엄마.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였지만 자식 없이 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나의 엄마. 아기를 낳고 키워보니 엄마가 그토록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하였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생명을 낳고 키운다는 책임감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내 자식만큼은 이런 책임감을 지고 싶게 하지 않은 엄마의 마음을. 하지만 나 또한 아이를 낳고 무섭도록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엄마를 이해해 가고 있었다. 너무나도 화나고 열 받지만 말이다.



  

  엄마의 도움이 없으니 자연스레 나는  아이의 진짜 엄마가 되어갔다. 처음엔 기저귀 하나 제대로 갈지 못해 끙끙거렸는데 이젠 혼자서도 척척 아기를 목욕시키고 아기 띠도 자연스럽게   있게 되었다. 아기가 울면 종종 거리며  우는지 고민하던 모습에서 이젠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아기가 배가 고파 우는지 기저귀가 젖어 우는지 그것도 아니면 잠이 와서 우는지   있을 만큼 변하였다. 종종 친정엄마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면   없는 우울감과 질투, 외로움이 사무쳤지만 , 나에겐 친정엄마보다 나를 위하는 남편이 있다고 위로하며   길을 갔다.

  아기새 마냥 작았던 아기는 통통하게 영글어갔다. 배밀이를 하던 아기는 어느새 무릎기기를 하더니 이제 나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엄마에게 종종 카톡으로 보내줬다. 엄마는 갓 태어난 모습만 보던 아기가 이걸 할 수 있냐고. 너무 신기하다고. 너무 똑똑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였다. 모든 아기가 거쳐 가는 성장 과정이었지만 내 아이에게만큼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엄마의 칭찬이 퍽 기분 좋았다. 엄마는 내가 아닌 아기가 보고 싶다고 종종 영상통화도 하였다. 아기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낯설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내 품에서 잠든 아기를 보다 엄마와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 내 아이라서 그런지 너무 이쁘다고.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하며 자연스레 엄마도 나를 낳고 이런 감정이 들었냐고 물어봤다. 늘 오빠가 우선이었기에 당연히 나를 낳고 키운 건 기억도 안 날거라고 지레 짐작하면서. 하지만 엄마의 대답을 듣고 난 뒤 제멋대로 터져버린 울음을 들키기 싫어 전화를 얼른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너를 낳고 시댁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니 고모가 문 밖에서 그러는 거라. 새언니는 무슨 저리 못생긴 딸을 낳고 이쁘다고 물고 빠냐고. 그러니 느그 할아버지가 지 새끼 이뻐서 밥도 안 먹고 내내 딸만 쳐다보고 있는데 니 그 말 들으면 새언니 난리 날거니까 입조심 하라고 하시대. 이쁘든 안이쁘든 내 새끼니 내 눈엔 얼마나 이쁘던지. 진짜 너무 이뻐서 내가 이렇게 귀한 걸 낳았나 싶더라니까. 누가 데리고 갈까봐 맨날 품에만 안고 있었지. 이 세상에 자식만큼 귀한 게 어딨누. 난 아직도 니랑 니 오빠 낳았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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