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에필로그

by 조선희




핸드폰 액정화면에 날씨 정보가 어느새 빗방울로 바뀌었다. 혜린은 현관문을 열다 말고 우산을 챙겼다. 전철역으로 가면서 2차 면접에 합격했다는 문자를 수도 없이 들여다봤다. 아침을 걸러도 배가 불렀고 새로 산 구두에 뒤꿈치가 까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약국 앞을 지나다 유리문에 비친 자신을 훔쳐봤다. 아찔한 하이힐이 주는 마력은 전문직 여성의 면모를 느끼게 했다. 출근 중이라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앞코가 빛나는 하이힐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으윽!


핸드폰을 보며 걷던 혜린이 갑자기 멈춰 섰다. 도로 빗물 배수구 틈새로 하이힐 굽이 낀 것이다. 다리에 힘을 줘도 쉽게 빠지지 않았다. 하이힐을 벗고 손으로 잡아당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몇 번을 잡아당겨 힐 굽을 겨우 빼냈다. 굽이 반은 나간 상태로 덜렁거렸다. 면접 때 써먹지도 못하고 수선을 맡길 지경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임시방편으로 굽을 바닥에 두드려 고정하고 전철역으로 내려갔다. 회사에 도착할 즈음 하늘은 먹색 구름으로 물들었다. 지하철에서 미리 뽑아온 면접관의 예상 질문을 보고 또 봤다. 현재 사회 이슈나 국제 정세에 대한 시사 문제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했다.


면접 대기실은 꾸물거리는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열기가 넘쳐났다. 한 응시자는 기업을 홍보하는 로봇처럼 자연 친화적인 제품을 줄줄 읊어댔다. 혜린은 그의 목에 바짝 묶인 넥타이를 계속 쳐다봤다. 그가 말을 할수록 올무가 되어 목을 점점 조이는 기분이었다. 숨이 막혔다. 곧 면접이 시작된다는 말에 혜린은 정신을 차리고 복장을 단정히 했다. 최종 후보인 여섯 명이 순서대로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대기실에서 회사연혁부터 현재 출시된 제품까지 모두 외워버리던 로봇맨이 첫 순서로 지명되었다. 면접관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는 초반부터 목소리가 떨렸다. 정작 제품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를 낼 때는 말을 더듬었다. 긴장으로 뒤덮인 음성만이 면접실 공기를 갈랐다. 그의 바이브레이션은 점점 고조되었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곤두박질했다. 혜린은 그의 열정적인 에너지가 목을 옭아맨 넥타이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다. 면접관이 다음 차례를 부르려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은발에 가까운 머리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면접관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제가 방해를 했나 봐요. 계속하세요.”

여자는 웃으며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면접관이 내준 중앙자리를 마다하고 가장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면접관은 서류를 넘기고 다음 사람을 지명했다.

“이정신 씨.”

옆 사람이 일어서자 혜린이 목덜미에 힘을 주고 잔뜩 긴장했다.

“제품 개발팀은 원료 개발과 수급이 중요한데요. 원료 수급에 최우선으로 고려할 사항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면접관의 질문에 혜린은 화색이 돌았다. 미리 뽑아놓은 모의 질문지에 있는 내용이었다. 관건은 외운 것이 드러나지 않게 자기 생각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혜린은 자신의 순서인 양 속으로 되새겼다. 응시자의 대답이 끝나자 또 다른 면접관이 질문했다. 그는 곱슬머리에 유일하게 넥타이를 하지 않았다.


“학위 논문이 있네요. 줄기세포를 통한 미토콘드리아 항상성과 유전체 손상에 관한 연구라, 흥미롭네요. 연구에 대한 동기가 있나요.”

“저는 노화가 꼭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응시자는 의외의 대답으로 면접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혜린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까 봐 최대한 목구멍에 힘을 줬다.

“귀사는 산림파괴에 반대하고 생태적인 환경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회적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화장품은 아름답게 나이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노화를 지연시키거나 없애는 것만을 당연시한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혜린은 응시자가 석사학위 소지자라는 것과 소신을 어필하는 당당함에 기가 죽었다.

“참신하네요. 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면접관이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갑자기 실내 분위기가 빠르게 내려앉았다. 혜린의 심장도 다시 요동쳤다. 머릿속에 설계 도면처럼 선명하던 예상 답안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자기 차례가 오기도 전에 분위기가 싸해져 더 긴장됐다. 면접관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은, 김혜린 씨”

“…….”

“김혜린 씨?”

“네?”


혜린이 깜짝 놀라 일어서는데 하이힐 굽이 꺾였다. 굽이 반쯤 나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몇 번을 휘청거리다 앞으로 밀려 나갔다. 면접관들 앞에서 민망한 나머지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굽은 구두 뒤 축에 붙어있었다. 굽이 덜렁거리지 않도록 바닥에 끌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숨죽이며 키득대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광경을 본 은발의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혜린 씨, 괜찮아요?”

혜린의 얼굴이 빨개지고 열이 올랐다.

“많이 긴장한 거 같은데 숨 좀 돌려봐요.”


혜린은 자리를 빠져나와 도망치고 싶었다. 면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곱슬머리의 면접관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시 시작하지요. 그전에 제가 좀 질문해도 될까요?”

은발의 여자가 면접관들에게 말했다. 면접관들은 당황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혜린 씨, 하이힐 불편하지 않아요?”

제품 개발에 관한 질문일 거라는 예상을 깨고 은발의 여자는 하이힐을 소환했다. 혜린은 면접과는 상관없는 질문에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은발의 여자가 어깨에 걸친 흰색 블레이저를 벗어 의자 뒤에 걸쳤다.

“요새는 면접장에도 편한 플랫슈즈나 로퍼를 신고 오더라고요. 김혜린 씨가 왜 하이힐을 신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서.”

혜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게……. 하, 하이힐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새, 새로 태어나게…….”

혜린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면접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은발의 여자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미안해요. 제가 아는 사람과 비슷한 말을 해서요.”


여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혜린의 하이힐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가지런히 모은 두 발이 부끄러운 듯 벌게져 있었다. 검은색 하이힐이 마치 먼바다에서 부유하다 온 유리병 편지 같았다. 은발의 여자는 훈훈한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불과 몇 시간 전에는 하이힐을 신고 성공적인 미래를 꿈꾸었다. 현실은 아니었다. 제대로 면접 볼 기회도 자신감도 쪼그라들었다. 은발의 여자가 혜린 옆을 지나갈 때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잘 게 부서진 주름은 당당했고 뿔테 안경 속에 비친 눈빛은 날리는 은발과는 다르게 진중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었지만, 힐의 뒷굽은 높게 솟아 있었다.


학교 앞은 우산을 쓴 학부모들로 어수선했다. 검은색 세단이 교문을 지나 서서히 멈췄다.


“대표님, 비가 오는데 차에서 기다리시죠.”

“아니에요. 바람 좀 쐬고 밖에서 기다릴게요.”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우산을 들고나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 문 아래로 금색 버클이 달린 구두가 보였다. 구두를 신은 여자의 맨 발등은 걸을 때마다 뼈마디가 피아노 건반처럼 움직였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힐긋대다가 자연스럽게 여자 쪽으로 눈길을 두었다. 남자는 흰색 블레이저를 어깨에 걸친 여자에게 비라도 튈까 봐 우산을 기울였다.


“괜찮아요. 우산 주시고 팀장님은 차 안에 계세요.”

그는 허리를 구부리며 예를 갖췄다.


우산을 든 여자의 손등은 파란 핏줄이 도드라져 투명한 살갗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여자는 본관 중앙에 걸린 대형 시계를 쳐다봤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까지 퍼졌다. 처마가 짧은 문구점 앞으로 가서 보라색 우산을 높게 들었다. 그리고 여느 학부모들처럼 교실 쪽을 바라보았다.


지우가 우산을 챙기는 아이들을 보고 창밖을 내다봤다. 교문 앞에는 학부모들이 미어캣처럼 한 곳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우산이 없는 지우는 터벅터벅 교문으로 걸어갔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아이들이 뛰기 시작했다. 또래보다 한 뼘이나 큰 회장이 앞서가다 지우를 돌아봤다.


“지우야, 저기 너희 할머니 왔다.”


회장이 문구점 쪽을 가리켰다.


“할머니 아니라니까!”


지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격하게 반응했다.


지우가 보조 가방을 머리 위로 올렸다. 고개를 쑥 빼고 교문 밖을 두리번거렸다. 문구점 앞에서 우뚝 선 보라색 우산이 보였다. 우산에 가려 얼굴이 안 보여도 그녀의 손짓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우도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가방끈을 꽉 쥐고 그녀에게 달려가 힘껏 안겼다. (끝).


keyword
이전 11화11화. 보통의 하루, 일주일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