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유리가면

by 조선희



채 상무에게 전화가 온 건 시위대가 도로 행진을 시작할 때였다. 지난 박람회에서 채 상무가 나중에 또 보자며 헤어졌었다. 인사치레라 여겼는데 연락을 해왔다.

“아이를 데려갈까 하는데 괜찮겠나.”

세라는 잠시 채 상무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공원에 모인 시위대의 구호가 점점 커졌다. 오가는 사람들이 시위대를 피해 차도로 내려갔다. 세라는 정임의 손에 들린 재개발 반대 팻말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정임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로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동네에서 누가 자식을 결혼시켰고, 몇 평에 살고 그의 사돈이 무슨 일을 한다는 세세한 정보는 알아도 떠들썩한 세간의 뉴스에는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 정임이 시위에 참여하고 재개발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니 엄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보이기 시작했다.


채 상무에게 전화가 온 건 시위대가 도로 행진을 막 시작할 때였다. 지난 박람회에서 나중에 보자며 헤어졌었다. 그냥 인사치레라 여겼는데 채 상무가 연락을 해왔다.

“아이를 데려갈까 하는데 괜찮겠나.”

세라는 잠시 채 상무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럼요."

교보문고 앞에서 채 상무를 기다렸다. 지우를 데려온다는 말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아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했지만, 까만 눈동자는 스펀지처럼 모든 걸 흡수할 것 같았다. 세라는 결혼한 친구들은 아직 아이가 없었고 그렇다고 친척이나 지인 중에 아이가 있어 알고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아이라고는 지우가 처음이었다.


채 상무가 건너편 신호등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반려견의 목줄을 잡으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를 그녀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건널목을 건너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지우의 얼굴을 보며 연신 싱글벙글했다. 차가운 도시녀는 어디 가고 봄빛에 녹아드는 시냇물처럼 얼굴에 잔잔한 물결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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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팀장, 일찍 왔네.”

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우야. 안녕.”

아이는 지난번처럼 채 상무 뒤에 숨으려고 했다.

“인사해야지.”

채 상무가 아이를 살짝 세라 쪽으로 밀었다.


아이는 채 상무를 멀끔히 쳐다보다가 세라와 눈을 맞추었다. 말은 없었지만, 아이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에서 장난기가 느껴졌다.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요시메상은 잘 계신가.”

“감기를 앓고 나시더니 가게에 나오시는 날이 좀 줄었대요.”

“그래도 대단한 분이야. 엘라화장품을 거절하다니.”

“회사에서 입장이 곤란하셨군요.”

“상대가 유 팀장인 것도 놀라운 사실이고. 어쨌든 내가 데리고 있던 사람이 대기업을 상대로 파트너의 마음을 움직였다니 나는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네.”

채 상무는 진심으로 말했다.

“손으로 만지면 안 돼.”

아이가 커피잔에 있는 얼음을 손으로 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 얼음 먹고 싶어요.”

채 상무는 얼음만 남기고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을 입으로 헹궈 지우의 입에 넣어줬다. 지우는 오드득 깨물며 두 볼을 잔뜩 부풀렸다.


“상무님 뭐 좀 여쭤봐도 돼요?”

“뭔가.”

“후회하지 않으세요? 혼자서 지우 키우는 거요.”

채 상무는 당황하면서도 차근히 말했다.

“후회하진 않아. 하지만 누가 그런다고 하면 말리고 싶네.”

“많이 힘드세요?”

“내가 힘든 게 아니라, 지우가 힘들까 봐. 나는 충분히 고심하고 결정한 일이었는데 아이가 자라는 걸 보니까 너무 이기적이었던 같네. 아이가 나처럼 강할 거라는 믿음이 잘못된 생각이었어. 내 아이는 나처럼 클 줄 알았던 거지. 지우가 낯가림이 심해.”


아이는 다른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채 상무 옆에만 붙어있었다. 세라의 눈에는 아이가 낯을 가리는 문제보다 맑은 눈동자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세라가 아이에게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누나랑 친구 할까?”


지우는 세라의 손을 잡을 듯 말 듯 고민하다가 작은 단풍잎 같은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가로등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가로등이 꺼진 골목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같았다. 세라는 달빛에 기대어 정임의 집을 올려보다가 거실 창이 보이는 건너편 화단에 걸터앉았다. 정임이 일일 드라마를 볼 시간이었고 큰 소리로 부르면 금방이라도 창밖을 내다볼 거리였다. 거실 창문으로 새어 나온 불빛이 사그라들다 커졌다 주기적으로 껌벅거렸다. 세라는 정임이 TV를 켠 채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는데 빌라 앞에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웠다. 남자가 빌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관문 밖에서 서성였다. 키가 큰 남자는 가로등 아래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불빛이 어둠 속에서 더 붉게 타올랐다. 하늘을 향해 내뿜은 연기는 제자리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세라는 지우려 해도 스스럼없이 강호의 팔짱을 끼던 영지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들 사이는 전보다 촘촘해진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가까이 있으면서도 대학 친구들에게 두 사람의 안부조차 묻기 망설여졌다. 오사카에서 매일 밤 그리던 사람들, 이제는 가까이에 두고도 다가갈 수 없다는 현실에 무기력해졌다. 영지를 우연히 만난 건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영지가 강호에게 전화했을 때 긴장한 나머지 가슴이 아팠다. 다행히 강호는 출장 중이었고 돌아오는 대로 보자며 세라에게 문자를 남겼다. 세라는 그의 짧은 문자를 보고 또 봤었었다.


세라의 핸드폰이 연이어 울렸다. 인터넷 쇼핑몰의 주문 상황을 제공하는 알림 문자와 하루마의 카톡이었다. 하루마가 오사카에서도 주문량이 늘었다며 해외 배송 경로를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나머지 읽지 않은 카톡에는 강호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 서울에 도착했어. 보고 갈까 하다가 늦어서 그냥 간다. 내일 연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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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세라는 빌라 앞에서 서성이던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어느새 골목 끝에서 저만치 큰길로 나가고 있었다. 세라는 골목길을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고 소식에 정임의 손에 이끌려 한달음에 뛰어가던 길이었다. 그날은 비가 세차게 내렸고 세라는 슬픈지도 모르고 재밌는 놀이처럼 그렇게 뛰었었다. 길게만 느껴지던 골목길이 큰길까지 벗어나는 데 불과 몇 분 걸리지 않았다. 큰길로 나와보니 남자는 사라졌다. 버스정류장에도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의 취한 목소리만 길가를 뒹굴었다. 세라는 숨을 헐떡거리며 빠져나온 어둡고 기다란 길을 돌아봤다. 멀리 보이는 정임의 집에 불빛이 꺼졌다. 그나마 희미하던 골목길은 깊은 어둠 속으로 내려앉아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30분 안에는 출발해야 했다. 세라는 얼굴에 붙인 팩을 떼어내고 주름진 눈가와 입가에 직접 만든 발효 에센스를 덧발랐다. 순간의 효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화장수를 개발하면서 익숙해진 습관이었고 상대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비치든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기만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머리를 곱게 빗어 반 머리를 해보기도 하고 하나로 묶어 리본을 묶어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서 가르마를 옮겨가며 머리 모양을 바꿨다. 새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정임이 검은콩을 볶느라 뜨거운 열기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회춘에 좋다고 농담 삼아하던 말이 생각났다. 검은콩이 정말 효과가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까. 세라는 종종 정임이 하는 말과 행동을 동네 아주머니들의 카더라 통신을 맹신한 결과라 치부했었다. 그녀가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을 여과 없이 확신하는 버릇이 있는 탓이기도 했다. 세라는 거울 속에 새치를 눈으로 세면서 이제 자신이 그것을 믿으려는 게 새삼 부끄러웠다. 급한 대로 마스카라를 꺼내 발랐다. 마스카라가 두피와 손에 묻어났다. 인터넷을 검색해 염색에 관련된 키워드를 찾은 다음 판매량이 많은 염색약을 주문했다.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구로몬 시장에서 산 버킷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연남동에 도착하니 공원에서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영지는 기타를 치며 벚꽃 엔딩을 부르는 무명 가수의 노래에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세라를 먼저 발견한 영지가 손을 들었다.


“강호는 오늘도 회사 갔대.”

영지는 리듬을 타면서 세라의 귀에 속삭였다.

“나도 연락받았어.”


강호는 출장과 야근에 바빴다. 세라는 좀 더 관리하고 꾸밀 시간이 주어진 셈이라 오히려 잘됐다고 여겼다. 매일 팩을 하고 발효 에센스를 바르고 머리도 염색해야 했다. 영지를 만날 때처럼 모자와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면서까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당장 피해 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가리면 가릴수록 힘들어질 게 뻔했다. 영지는 디올 로고가 박힌 쇼퍼백을 어깨에 메고 세라의 팔짱을 끼었다.


“너랑 걷는 게 얼마 만이야.”

“그러게. 오랜만이라 어색한데?”

세라가 웃으며 말하자 영지는 팔짱을 꽉 꼈다.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 나서 커피를 들고 산책로를 걸었다. 옆 사람을 툭툭 치며 말하는 영지의 습관은 여전했다. 자전거를 타는 커플들이 간간이 지나갔다.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탄 여자가 불편한 자세로 핸들을 이리저리 꺾으며 페달을 밟았다. 세라는 여자가 위태로워 보였지만 뒤에서 훈수를 두며 바짝 따라오는 남자를 보고 안심했다. 멀리 보이던 여자의 자전거가 인도로 진입했다. 자전거가 가까워질수록 여자의 불완전한 핸들링이 신경 쓰였다.


“일이 잘 된다니 너무 좋다.”

“다행히 주문량도 늘고 원료에 관해 관심 보이는 업계 사람들도 있어서 예상했던 것보다 결과가 좋아. 해외 배송도 알아보려고.”

“정말? 유세라 대단한데! 사실 네가 회사까지 그만두고 잠수 탔을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조심해, 자기야!”

갑자기 뒤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아, 악!”


자전거를 타던 여자가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세라와 영지 사이를 갈랐다. 세라가 바닥에 넘어졌다. 자전거를 타고 뒤따르던 남자가 브레이크를 잡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여자도 자전거를 한쪽에 세우고 달려왔다. 세라는 일어서다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길바닥에 세라의 모자와 영지의 가방이 뒹굴었다. 영지는 디올 가방에 커피가 쏟아진 걸 보고 황급히 휴지를 꺼내 닦았다.

“이것 보세요. 제대로 보고 타셔야죠. 아, 진짜.”

영지가 가방을 주우며 신경질을 냈다.

세라는 모자의 끈을 밟고 서 있는 영지를 쳐다봤다.

“영지야. 이거…….”

“아, 미안. 괜찮아?”

영지는 얼른 모자를 주워 세라에게 건넸다. 세라의 벗겨진 모자 위로 자전거 바퀴 자국이 또렷하게 남았다. 세라는 바닥에 쓸려 벗겨진 손바닥을 입으로 불었다. 영지가 물티슈를 꺼내 손바닥을 살살 닦아내며 뒤돌아 가는 커플의 뒤통수에 대고 구시렁댔다. 세라는 생각했다. 여자의 자전거 운전이 미숙했을 뿐이지 속도가 센 편은 아니었다. 함께 부딪혔던 영지가 순간적으로 피한 걸 보면 그랬다. 병마는 순간을 비집고 들어와 존재를 알렸다. 세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무렇지도 않게 모자를 눌러썼다. 영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고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세라와 몇 발자국 떨어져 거리를 두며 통화했다.


“강호가 일이 끝났다고 온다는데?”

“지금?”

세라는 모자에 난 바퀴 자국이 손바닥에 난 상처만큼이나 쓰라렸다. 검은 안경테 너머로 감춰지지 않는 허름한 표정과 행색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갑자기 느슨해졌던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오라고 했지.”

“넌 왜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

“강호…… 안 볼 거야?”

영지는 세라의 반응에 당황했다.

“지금은 좀 아니잖아.”

세라가 옷에 묻은 커피 자국을 손으로 털었다.

“뭐가 어때서. 우리 사이에.”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피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뜻이냐고!”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강호가 도착하려면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영지는 핸드폰만 들여다보았고 세라는 물을 마시며 몇 번이나 영지에게 말을 걸려다 말았다.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니었다. 예전에도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강호를 만나도, 밥을 먹다가 옷에 음식 자국을 남겨도 민망하지 않았다. 세라는 예민하게 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강호와 재회하는 순간에 무엇을 기대한 걸까. 세라는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모자를 벗어 옆자리에 놓았다.


“영지야, 아까는 미안했어. 내가 좀 지나쳤어.”

세라의 말에 영지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유세라가 왜 이렇게 주눅이 든 건데? 객지에 나가서 고생하면 다 그렇지 그런 걸로 의기소침해 있니? 안경에 모자까지 너를 그렇게 숨기고 싶어?”

영지는 작정한 듯 몰아붙였다.

“나 괜찮아?”

세라가 힘없이 물었다.

“우리가 한두 해 보니?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주눅 든 거라면 좋겠어. 난 이제 찌그러진 깡통처럼 뭘 해도 다시 펼 수가 없어. 지금 이 모습이 네가 볼 수 있는 가장 젊은 유세라야.' 세라는 목구멍 위로 올라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내가 피부과 예약 잡을게. 예전에 네 머릿결을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관리받으면 금방 회복돼. 여기, 여기 있는 주름도 관리받으면 나아질 거야. 넌 사업가로 변신한 애가 뭐가 걱정이니.”


영지는 세라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성공한 사업가의 엄살 정도로 생각하는 듯 한껏 부러운 심정을 내보였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럼 정말 달라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이 언니가 괜히 이 미모를 괜히 유지하는 줄 아니?”

영지는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며 웃음기를 잔뜩 머금었다.

강호가 도착한 건 세라가 우메다 하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영지에게 보여주고 있을 때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강호가 세라 앞에 섰다. 세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노트북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모습은 여전했다. 과거의 어느 날로 돌아가 삼 년 동안의 일들은 모두 꿈이라 말해줄 것 같았다.

“정말 오래간만이다.”

강호가 손을 내밀었다. 세라는 어색하게 강호의 손을 잡았다.

“뭐야, 이 분위기는. 소개팅에 나온 거 같잖아.”

영지가 강호를 놀리며 말했다. 세라는 강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세라는 창문과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영지가 준 쇼핑백이 청소기에 거치적거렸다. 그래서 이걸 어쩌라고? 구석에 놓아둔 쇼핑백을 발로 밀어내며 걸레질을 했다. 영지가 클럽 무브에서 ‘가면 이벤트’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세라는 쇼핑백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은색 스팽글이 전체를 덮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가면이었다. 영지가 쇼핑백을 주었을 때 세라는 가면을 꺼내며 물었었다.


“이게 뭐야?”

“그거 신박하지? 가면 이벤트에 가자.”

영지가 말했다.

“가면 이벤트?”

“어. 주말에 무브에서 한 대.”

“나보고 같이 가자는 거야? 이 모습으로?”

세라는 자기의 머리를 한 움큼 잡으며 어이없어했다.

“뭐 어때? 우리 아직 삼십 대 초반이야. 게다가 가면 쓸 건데 뭐가 문제야?”

“말이 돼?”

“그럼 안 돼? 왜, 안 돼?”

영지는 세라가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무리 가면을 쓴다지만 거길 어떻게 가.”

세라가 정색했다.

“유세라, 정신 차려. 그렇게 늙은이처럼 굴래?”

영지의 마지막 말을 귓가를 따라다녔다.


세라는 방바닥이 닳도록 걸레질을 했다. '미친 거 아니야? 집에서 담배를 태우고?' 장판에 담뱃불 구멍을 발견하고 전 세입자에게 욕을 했다. 걸레질을 멈추고 쇼핑백 안에서 가면을 꺼냈다. 영지가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푸념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면을 생각하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면을 쓰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은 스무 살의 앳된 세라다.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먼 과거 속에서 여행하는 것 같다. 몸속에 흐르는 피가 투명할 정도로 맑았던 어느 시절로 돌아가 친구들과 빗속을 뛰어가고, 강호와 도서관에 앉아서 문자를 주고받고, 흰 눈을 맞으며 먼저 알아봐 달라고 뜨거운 포옹을 하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정말 괜찮을까? 가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태원 전철역을 나오니 클럽 무브의 간판이 멀리 보였다. 클럽 간판은 화려한 지하 세계를 감추며 영문 이니셜 M자에 파란불만 깜박였다. 영지는 가슴이 깊게 파인 블랙원피스를 입고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제 원단의 벨트를 허리에 졸라맸다. 클럽 입구에 서 있는 클러버들은 홀 안에서 새어 나오는 쿵쿵대는 비트에 맞춰 벌써 몸을 흔들어 댔다. 슈트를 입은 가드가 신분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큐빅 홀터탑을 입고 엉덩이 밑 살이 보일 정도로 짧은 팬츠를 입은 여자가 순서가 되자 가드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귓속말을 했다.


“쟤, 미성년자 같지?”

영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세라는 여자가 미성년자인 것보다 영지에게 빌려 입은 노란색 크롭 반팔 티가 자꾸 말려 올라가 불편했다. 찰랑대는 긴 머리 가발도 벗겨질 것 같아 고갯짓에도 조심했다.

“세라야, 완벽해! 걱정하지 마.”

영지 차례가 됐다. 먼저 신분증을 꺼내며 남자에게 아는 척을 했다.

“잘 있었어?”

“누나,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영지는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가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뭔가를 얘기했다. 세라는 음악 소리보다 쿵쾅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심장에 마이크를 단 것 같았다. 가드가 세라를 위아래로 힐끗 쳐다보며 다가왔다. 세라가 쓰고 있던 가면을 내리기도 전에 남자는 즐겁게 노십시오, 하며 뒷사람에게로 갔다.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두 세계를 가르던 묵직한 철문을 잡아당기자 앰프에서 뚫고 나오는 강한 비트가 온몸을 휘감았다. 세라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귀에서 강한 진동을 느꼈다. 침착해지려 거친 숨을 몰아냈다. 누군가 세라의 어깨를 툭 쳤다. 세라가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조커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바운드를 탔다. 조커는 일행인 줄 알았다며 고개를 살짝 숙이며 지나갔다. 조커가 지나간 자리에는 머스크 향이 진하게 남았다.


“누구야?”

화장실에 갔다 온 영지의 입술이 번들거렸다. 영지의 스팽글 가면이 조명을 받을 때마다 하늘을 나는 은갈치처럼 보였다.

“일행인 줄 알았대.”

“일행은 무슨. 거봐 너 아직 괜찮다니까.”


영지는 가볍게 리듬을 타며 세라의 가발을 매만졌다. 시선은 무대 위의 디제이와 클러버들을 두루두루 훑었다. 시간이 깊어지자 사이키델릭 한 분위기에 취한 클러버들의 몸짓은 점점 과감해졌다. 디제이의 파워풀한 목소리와 일렉 사운드가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맥주를 마신 영지의 불그스레한 두 볼이 은갈치 아래로 퍼져 나왔다. 세라는 맥주 한 병을 깨작거리다가 영지의 흥에 덩달아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 낯선 가면들, 낯선 사람들이 낯설게 술을 마시고, 낯설게 몸을 부딪쳤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우주에 온 기분이 들었다. 몸을 흔들면서 가면을 손으로 더듬었다. 조명 세례를 받은 화려한 가면은 타임머신이었고 우주선에 탑승한 외계인이었다.


영지가 무대 중앙으로 세라를 끌고 들어갔다. 빽빽한 사람들 때문에 움직임의 폭을 최대한 절제했다. 슬슬 분위기가 고조되자 디제이가 점프를 외쳤다. 두더지 게임을 하듯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제자리에서 일제히 뛰기 시작했다. 디제이는 사람들을 무대 위로 끌어들이기 위해 흥을 돋는 말들을 쏟아냈다. 사람들이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누군가 단상 위로 올라가기를, 아니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듯 두리번거렸다. 천장에서 색 색깔의 종이 가루가 벚꽃처럼 휘날렸다. 땀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머리와 얼굴에 가슴에 다리에 달라붙었다.


가면 쓴 얼굴은 감정을 억제하며 몸으로 환호했다. 단상의 빈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영지가 자리가 비자 하이힐을 벗어 들고 단숨에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영지의 팬티가 조금 보였다. 중앙에서 춤추던 남자들이 영지 쪽으로 몰려들었다. 캣우먼 가면을 쓰고 도발적인 웨이브를 하던 여자가 영지를 의식하고 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 했다. 마치 양기를 내뿜는 남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여자 교주 같았다. 영지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들과 키 큰 남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세라는 질식할 것 같았다. 가장자리로 물러서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춤을 췄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가발이 찰랑거리며 양 볼을 쳤다. 비트가 절정을 향해 가고 영지의 가슴골이 깊게 보였다. 모두가 미친 듯이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세라는 가슴에서 뜨거운 세포가 거침없이 솟구쳐 나가는 것 같았다.


될 대로 되라지. 이대로 시간이 멈출 수 있다면…….


세라는 옆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마음은 거친 들판을 야생마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언제쯤 달이 뜰지는 모른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손톱을 비춰보던 달. 달이 뜨면 달빛 아래로 창백한 나신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푸른, 더 푸르른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숨이 가빠졌고 가면 속 얼굴은 상기되었다. 나를 감춰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유리 가면을 쓴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아! 온몸의 세포들이 땀구멍 밖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희열이었다. 아니, 절규일지도 몰랐다.


이태원의 새벽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모든 에너지를 한 번에 쏟아냈다. 택시 앱으로 콜을 해도 한참을 기다렸다. 클럽 앞 취객들은 택시 문고리를 먼저 잡는 게 임자였다. 세라는 한 뼘이나 큰 키에 하이힐까지 신은 영지를 부축하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전봇대를 껴안은 아이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헛웃음을 자아냈다. 영지가 콜택시를 부르겠다며 차도로 내려가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세라는 영지의 가슴골이 깊게 드러나자 원피스를 조금씩 추켜올려 주었다. 영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치마 끝 부리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세라는 영지를 데리고 가까스로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어차피 순서대로 타지 못할 거라면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버스가 끊긴 터라 정류장은 텅 비었다. 영지의 몸이 점점 늘어져 벤치에 누울 것 같았다. 세라는 영지를 자신의 등에 밀착시켰다. 그제야 가면을 벗고 손부채질을 했다.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쳤다. 화장으로 가린 모공에서 유분이 나와 가면 안쪽에 묻어났다. 손으로 비벼봐도 지워지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전리품처럼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유리 가면이라도 행복할 거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입을 벌려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라인이 검게 번진 눈가에 새벽바람이 스며들었다.


흰색 아반떼가 비상등을 켜고 버스정류장 앞에 멈췄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세라는 멈칫했다. 조바심이 나서 영지를 흔들어 깨웠다. 야구모자를 깊게 쓴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자 겁이 났다. 클럽 주위에만 사람들이 몰려 있을 뿐, 여기서 소리를 지른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


“정신 좀 차려봐.”

세라가 영지를 흔들어 깨웠다.

“으으응, 차 왔어?”

영지는 마스카라가 눈 밑까지 번진 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다가왔다. 버스정류장의 안내 전광판이 꺼져 있어 가로등 불빛만 시야를 밝혔다. 모자에 가려진 남자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조금씩 보이자 세라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가방에서 모자를 급히 꺼내 썼다. 영지가 콜택시를 부른다는 게 강호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강호 왔져? 우구구구.”

영지가 강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술을 왜 이렇게 마셨어?”


영지가 강호를 보자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느슨해진 허리띠를 꽉 졸라맸다.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 같은 하이힐을 질질 끌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친구분은 집이 어디세요?”

세라는 강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실망할 틈도 없이 망설였다. 차를 타면 영지는 잠만 잘 테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강호와의 침묵의 시간은 계속될 것이다.

“전 따로 갈게요. 먼저 가세요.”

작은 목소리로 겨우 말하고 크롭티의 끝자락을 배꼽 아래로 잡아끌었다.

“이 시간에 택시 잘 안 잡혀요.”

강호가 차 안에 영지를 들이밀고 막 문을 닫으려는 순간, 영지가 차 문을 잡고 말했다.

“세르 야, 뭐 어해 차아 빨리 타라고 야.”

“세라?”

강호가 세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라는 강호의 눈빛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할 수 없이 모자와 가발을 천천히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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