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재회

by 조선희



정임은 짬짬이 소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세탁소 김 씨가 가스 검침원 일을 해보자는 말에 선뜻 업체에 등록했다. 시에서 외주를 준 용역회사는 몇천 가구나 되는 하루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강제조항 때문에 대기 인력이 필요했다. 그녀는 결원이 생기면 충원되는 대기조에 넘겨졌고 며칠을 경험하니 일은 그런대로 할 만했다.


정임이 골목 안쪽 끝에 있는 파란 대문 집 앞에서 멈춰 섰다. 대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집 주소를 명부와 대조했다. 초인종은 전선이 밖으로 튀어나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빗장쇠가 풀려있는 대문을 조심스럽게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가스 검침하러 나왔습니다.”


마당 한가운데는 이끼가 잔뜩 낀 수도가 오랫동안 방치된 듯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 들고 나는 사람이 없는 집 같았다. 그때 안채 현관문이 열렸다. 빼꼼히 얼굴만 내민 남자가 한 시간 후에 와 달라고 부탁했다.


정임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냉장고에 있는 도시락과 삼각김밥이 눈에 들어왔다. 참치가 들어간 삼각김밥을 보니 세라가 눈에 밟혔다. 아르바이트할 때면 한두 개씩 남은 걸 집으로 가져오고는 했었다. 집밥 대신 차가운 김밥을 먹냐고 나무라기도 했었는데 막상 김밥을 보니 이거라도 잘 먹고 다니는지 걱정이 앞섰다.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를 들고 스낵바에 앉았다. 비닐을 이리저리 벗기다가 김과 밥이 분리된 채 뜯어졌다. 정임은 당황하다가 김을 대강 밥에 둘둘 말아 한 입 베어 물었다. 자동판매기에서 커피까지 빼먹고 여유롭게 파란 대문집으로 갔다. 파란 대문은 살짝 열린 상태 그대로였다. 정임은 선캡을 이마 위로 올리고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주인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정임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천장은 낮았고 남자는 밖에서 볼 때보다 체구가 훨씬 컸다. 거실 한편에는 운동기구와 TV만 덩그러니 있었고 빨래대에 속옷과 똑같은 검은색 양말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계량기가 어디에 있나요?”


남자가 주방 쪽을 가리켰다. 주방 쪽은 해가 들지 않아 어두웠다. 정임은 빨리 계량기를 확인하고 나올 생각으로 잰걸음으로 주방으로 갔다. 주방 옆 세탁실에 부착된 계량기를 확인한 후 숫자를 메모했다.


“검침 끝났습니다.”

주인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정임은 집안을 두리번거리다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남자가 방에서 나와 정임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임이 뒷걸음치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놀라셨어요?”

남자가 낮게 말하며 정임의 어깨를 잡았다.


정임은 남자의 손에서 완력이 느껴졌다. 순간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손을 밀쳐내자 남자의 표정이 돌변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입고 있던 고무줄 바지를 내렸다. 정임은 심장이 내려앉는 심정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염병할, 이런 미친놈!”


정임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현관문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남자는 팬티와 바지를 발목까지 내린 채 그대로 있었다. 정임은 숨죽이며 현관 문고리를 비틀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다 대문 틀에 걸려 넘어졌다. 허둥지둥 일어나 냅다 뛰었다. 골목을 벗어났을 때 가슴을 부여잡고 호흡을 깊게 내뱉었다. 그제야 발목이 시큰거렸다. 뒤돌아 파란 대문을 다시 쳐다봤다. 그리고 힘껏 침을 뱉었다.


일찍 잠자리에 든 정임이 이불을 뒤척이다 일어나 앉았다. 파스를 붙인 발목이 부어올랐다. 일을 마치고 세탁소 김 씨에게 파란 대문집에서 당한 일을 털어놨다. 김 씨는 자신이 소개한 검침일에 정임이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자 용역회사에게 이 일을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임은 자기보다 김 씨가 더 분개하는 걸 보고 힘이 났다. 퇴근길에 함께 가길 바랐던 김 씨는 급한 일이 있다면서 먼저 집으로 갔다. 정임은 혼자 사무실로 찾아갔다.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담당자는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만 넘기며 말했다.


“아이고 아주머니, 일당직에 대책을 어떻게 세워요.”

담당자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럼, 변태 같은 놈을 가만히 둬요? 다른 사람이 검침 가면 또 그 수작일 텐데요?”

“아주머니, 이런 일 다반사예요. 그렇다고 큰일 난 적도 없고, 다들 그렇게 다녀요.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냥 있는 줄 알아요?”


그는 항의하는 정임을 세상 물정 모른다고 툴툴댔다. 정임은 일상다반사라는 말에 변태에게 했던 욕을 똑같이 하고 싶었다. 회사는 아무리 말해봤자 벽을 쳤다. 발을 절뚝거리며 사무실을 나왔다. 밖은 식당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다와 웃는 소리로 왁자지껄했다. 그들과 분리된 세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정임에게는 바람 한 점 없는 저녁이 저만치 다가오고 있었다.






세라가 인천 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서쪽 하늘 끝에 황금빛 태양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비행기가 불빛을 깜박거리며 낮게 배를 보이며 지나갔다.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야구모자를 깊게 쓴 남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세라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누구지? 설마, 아닐 거야. 세라가 남자에게 다가가려 할 때 뒤에서 분홍색 캐리어를 끌고 온 여자가 그에게 와락 안겼다. 세라는 얼굴이 붉어져 그들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순간 왜 강호가 생각났는지 자신도 어이없었다.


캡틴이 알려준 주소를 핸드폰 메모장에서 찾았다. 북촌로 11길 미담 게스트하우스. 그는 게스트하우스 촌장에게 말했다며 집을 구할 때까지 머무르라고 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지도를 따라 들어선 골목에는 연이어 맞닿은 한옥의 기와장이 서로 손을 맞잡은 듯 길게 뻗어 있었다. 전통 가옥들이었지만 서까래나 나무 대문은 손을 많이 본 것처럼 반질반질하게 길이 잘 들여있었다. 세라는 지도가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화살표가 도착지에 가까워지자 멀리서 미담이라고 쓰여 있는 나무 간판이 보였다. 나무 간판은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짠 대문과 가지런히 쌓아 올린 벽돌담이 어우러져 한옥의 풍미가 느껴졌다. 세라가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고 있을 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저고리 소매 끝을 살짝 올리고 싸리 빗자루를 들고 나왔다. 여자는 어스름한 저녁을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미담이라 쓰인 현판 위에 작은 전등을 켰다.


“여기가 미담 게스트하우스인가요?”


게스트하우스의 촌장이라는 여자는 세라에게 시원한 보리차를 내어주며 귀국한 첫날밤을 반겨주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낯선 섬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세라는 마당에서 들리는 새소리에 잠이 깼다. 쪽마루에 걸터앉아 기지개를 늘어지게 했다. 파란 하늘과 기와지붕의 용마루가 맞닿은 곳에 구름이 길게 걸쳐있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예상치 못한 전경이었다. 촌장이 개량 한복에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하게 지나다녔다. 마당 한 편에 있는 장독대로 가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많이 피곤하죠? 안채 주방에 가면 아침 식사가 있어요. 거르지 말고 먹어요.”


모자를 벗은 촌장의 얼굴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코 옆에 난 점이 말할 때 도드라져 보였다. 세라는 부스스한 얼굴로 빗지 않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하며 인사했다.


부동산 사이트에 접속했다. 정임의 집 근처에 월세가 있는지 검색하고 알림 수신을 설정했다. 블로그에 올라온 발효 화장수에 대한 고객의 질문에 답글을 달고 오사카 리스트로 따로 분류한 고객들의 정보를 문서화해서 저장했다. 하루마한테 온 메일도 확인했다. 한 달 후 서울에서 열릴 코스모 뷰티 박람회에 함께 참가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원료를 설명하고 세라의 화장수를 홍보한다면 고객 유치에 좋은 기회가 될 터였다.


세라는 일정표에 코스모 뷰티 박람회라고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오후에는 부동산업자를 만나기 위해 집 근처로 갔다. 부동산 업자는 혼자 살기에 적당하다며 집을 보러 가는 동안 시세며 재개발이며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재개발에서 제외된 구역이라며 몇 동의 빌라 건물 앞에 섰다. 월셋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3층이었다. 정임의 집과도 가깝고 병원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여서 부담이 없었다. 내부는 도배상태가 깨끗한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공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남향의 베란다가 마음에 들었다. 방 하나가 있고 작은 거실에는 주방이 딸려 있었다.


오랜만에 설레었다. 작지만 이곳에서 머물 곳이 생기다니. 부동산업자와 주방과 화장실에서 수압을 확인하고 구석구석 비가 샌 흔적은 없는지 살폈다. 베란다에서 공원을 내려다봤다. 시위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성였다. 세라는 미간을 좁히며 안경을 꺼내 썼다. 하나슈퍼 아줌마가 보였다. 아줌마는 여전했다. 전단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쫓아가 손에 쥐어 줬다. 그 옆에 낯익은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행인에게 나눠준 전단지가 바닥에 버려지자 다시 그것을 줍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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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는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재개발을 놓고 찬반이 엇갈린 현수막이 동네 곳곳에 붙었다. 주말마다 시위대가 공원에 모였고 찬반이 엇갈리는 사람들의 잦은 마찰로 경찰차가 오고 갔다. 아침이면 정임이 아줌마들과 안산 산책로로 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종종 장바구니를 들고 골목길에 나타났고 가끔 공원에 비치된 야외 헬스 기구로 운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임을 보는 일이 세라에게는 아침마다 챙겨 먹는 영양제처럼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한 번은 안산 산책로에서 정임과 우연히 스쳐 지나갔다. 세라는 야구 모자를 깊게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정임이 지나가는 세라에게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자 세라는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통통거렸다. 정임은 세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옆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등산복 차림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와 나란히 걸으며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세라는 정임 옆에 선 노년의 남자를 보니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카키색 점퍼에 베이지색 등산바지를 입은 아저씨는 정임의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뒤를 따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매미 소리와 산새 소리에 묻혀버렸다. 정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이제 정임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필요했다.


정임은 산책하고 집에 오는 길에 슈퍼에 들렀다. 미역과 당면, 두부를 장바구니에 담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왔다. 달력을 보고 세라의 생일을 동그랗게 쳐놓은 날짜를 손으로 짚었다. 미역국 없이 생일을 보내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옆에 없어도 생일상이라도 차려 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음식을 하면서 세라가 인큐베이터에서 열 달을 채운 후 자신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를 생각했다. 세라가 작게 태어나 몸이 약한 것 말고는 큰 병치레 없이 커 준 것이 늘 고마웠다. 남들보다 왜소한 체격 때문에 생일이나 명절 때면 한약을 달여 먹였다. 세라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우산을 챙겨줬는데도 쓰지 않고 우산이 없는 친구들과 비를 홀딱 맞고 집에 왔었다. 결국 가벼운 감기 증상이 있었던 친구들과는 달리 세라는 폐렴에 걸려 입원했었다. 그 후로는 기침 소리에도 가슴을 졸였다.


미역국이 가스 불에 넘쳐흘렀다.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정임은 급하게 가스밸브를 잠그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뽀얀 미역국에 우러났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그래, 세라야.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었니?”


그녀는 세라와 얘기할 때면 반가운 안부로 시작해서 안전을 걱정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침부터 부산했던 정임은 세라와 통화까지 하고 나니 할 일을 다 끝낸 심정으로 맥이 풀렸다. 시계를 보고 미역국과 잡채를 반찬통에 정성스럽게 담아 도시락 가방에 넣고 나갈 채비를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공원 입구에는 간이 단상이 만들어졌고 재개발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렸다. 공원을 이용하려는 주민들과 집회에 참여하려는 시위대로 혼잡했다. 회색 완장을 찬 남자가 단상으로 올라가 집회 진행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임은 시위대의 마이크 소리에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운집했다.


“세라 엄마! 어디가?”

시위대 속에서 세탁소 김 씨가 바쁘게 걸어가는 정임을 불렀다.

“어, 어, 오늘은 약속이 있어. 나중에 봐.”

정임은 도시락 가방을 움켜잡았다. 군중 사이를 비집고 건너편 시계탑 쪽으로 향했다.


'하필 오늘 이 난리야.'


정임은 도시락 가방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백 미터도 되지 않는 시계탑까지 걸어가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확성기 소리와 함성, 알아들을 수 없는 연호가 이어지면서 그나마 만들어 놓은 통로가 사람들로 붐볐다.

시계탑 앞까지 삼십 미터가 채 안 남았을 때였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정갈했던 대열이 흐트러졌다. 시위대의 연호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버스 한 대가 시위대 앞에 섰다. 경찰들이 시위대 주위를 에워싸고 그중 한 명이 불법 집회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다면서 책임자를 찾았다. 경찰을 향해 과격한 언사를 하는 몇몇 사람들이 촉발되어 순식간에 시위대는 각자의 길을 찾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대열에 낀 정임이 옴짝달싹 못 하고 떠밀렸다.


“아이고, 난 아닌데, 이것 좀 놔봐요.”


정임은 연행되는 사람들에 휩쓸려 도시락 가방만 꽉 쥔 채 버스에 올라탔다. 경찰서는 북새통을 이뤘다. 시간이 흐르자 대부분은 훈방조치 되어 보호자가 데리고 갔다. 정임은 사람들이 풀려나자 불안했다. 세라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김 선생님이라고 등록된 연락처를 찾았다. 그 역시 손가락이 쉽게 나가지 못했다. 경찰서에 들락거리는 모양새가 좋아 보일 리 없고 어떻게 비칠지 몰라 주저했다.


“아주머니, 그냥 아시는 분 부르세요.”

지나가던 경찰이 넌지시 말했다.


정임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늦게 온 사람들이 하나둘 먼저 나갔다. 그녀는 두 손을 비벼대며 경찰서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쑥 뺐다. 얼마 지나서 슈퍼 아줌마가 요구르트 한 팩을 옆구리에 끼고 경찰서에 나타났다.


“약속 있다고 시위 참석 못 한다면서, 이게 뭔 일이래?”

슈퍼 아줌마가 정임을 발견하고 말했다. 그리고 주위를 쓱 둘러보고는 나이 든 경찰관에게 요구르트 한 팩을 건넸다. 정임은 경찰서 문을 나서자 도시락 가방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내일모레 시위는 정말 중요하다니까, 그때는 꼭 같이 갑시다.”

슈퍼 아줌마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요.”

정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락 가방을 슬쩍 뒤로 숨겼다.


세라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침부터 슈퍼 앞 빈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든 원주민들이었다. 짧은 파마머리에 다들 전투병처럼 썬캡을 쓰고 있었다. 햇볕이 따가웠다. 우유 한 잔을 들고 베란다 가까이 기대어 섰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집회자 수를 세기 시작했다. 방송 카메라를 든 촬영 팀이 시위대 속으로 들어갔다. 시계탑 근처에 시선이 머물렀을 때 정임의 얼굴이 보였다. 원주민 집 빼앗아가는 개발은 물러가라,라고 쓴 현수막 아래서 오도 가도 못했다.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때만 해도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경찰차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집회책임자는 끝까지 물러서면 안 된다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경찰차가 시위대 앞에 멈춰 섰다. 경찰이 차에서 내리자 시위대는 술렁였다. 위에서 보니 사람들의 움직임이 불안해 보였다. 세라는 정임의 위치를 확인한 후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빌라 계단을 내려가 슈퍼 앞까지 가는 데 수월치 않았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크고 작은 몸싸움이 일어났다. 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 시위대를 몸으로 밀어냈다. 사람들이 우르르 한쪽으로 쏠리면서 사람들이 넘어졌다. 그때서야 갈 곳 잃고 우왕좌왕하는 정임이 보였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밀지 말아요! 넘어지겠다니까!”


누군가 소리치며 말했다. 예민해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몸이 부딪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세라는 고개를 조아리며 정임이 있는 쪽으로 겨우 다가갔다. 찬반이 엇갈린 사람들의 고성과 욕지거리가 공중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세라는 젊은 남자들이 아줌마들을 제압하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임을 놓칠까 봐 겁이 났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군중 속에서 세라가 휘청거렸다.


“조심해요!”


옆에 있던 남자가 세라의 팔을 잡았다. 세라가 고맙다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멀어져 가는 일행을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형! 같이 가요.”


앞선 일행은 전부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뭔가 떨어져 있었다. 세라는 그것을 주워 전해주려는데 이미 전방으로 뛰어간 후였다. 선두에 선 검은색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카메라를 메고 경찰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세라는 정신을 차리고 정임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다행히 정임은 일행들과 함께 시위대 대열에서 벗어나 시계탑 아래로 피했다. 세라는 안도하며 공원을 벗어났다. 세라가 베란다에 기대 공원을 내려다보았다. 팔목이 욱신거렸다. 티셔츠 소매 끝을 걷어 올리니 시퍼런 멍 자국이 짙게 내려앉았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는 해산했고 공원은 여느 때처럼 운동하거나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로 다시 한산했다.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꺼냈다. 시위 현장에서 주웠던 게 생각났다. 검은색 플라스틱 조각에는 ‘라이카’라는 브랜드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라이카. 문득 도경이 생각났다.


세라는 주문서를 보고 화장품 재고를 확인했다. 알기 쉽게 설명한 제품의 상세 내용과 소비자의 사용 후기는 고객의 주문으로 이어졌다. 며칠 후 코스모 뷰티 박람회에 가져갈 제품들을 캐리어에 넣었다. 하루마가 보내 준 원료와 첨가물별 제품의 안내서도 함께 챙겼다. 장인 정신을 내세우는 수제화장품부터 참신하고 기발한 뷰티용품을 판매하는 벤처 기업까지 많은 회사가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규모가 큰 박람회에 화장수를 내놓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박람회장에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도 눈에 많이 뜨였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시메의 화장품 부스가 차려졌다. 하루마가 이메일로 얘기한 대로 여자가 미리 와서 제품을 진열하고 있었다. 여자는 하얀 얼굴에 잡티 하나 없는 피부로 광채가 일었다. 전직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제품 설명에 도움이 될 거라 했다. 세라는 여자와 인사를 나눈 뒤 캐리어에서 제품을 꺼내 진열했다. 경품에 사용할 제품과 시연할 제품을 구분해 놓고 고객을 위한 방문록도 펼쳐놓았다. 뷰티에 대한 관심은 남자들 사이에서도 폭발적이었다. 그들은 제품 테스트에 참여해 경품도 받아 가며 적극적으로 박람회를 즐겼다. 다른 부스에서 시연 중인 선패치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세라는 원료와 첨가물을 가지고 간단하게 화장수를 만드는 방법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샘플은 없냐고 묻는 남자 손님도 있었다. 작은 용기에 샘플을 만들어 소분하고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첫 번째 시연이 끝나자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세라는 손님을 상대하느라 그제야 참았던 화장실을 갔다. 한 부스 앞에서 손등이 아니라 팔뚝 안쪽 살에 제품을 바르는 여자에게 눈길이 갔다. 분명 업계 사람이라 생각했다. 세라는 혹시나 하며 여자를 다시 쳐다봤다. 누구도 그녀가 업계 1위의 엘라화장품의 총괄 상무라는 걸 예상치 못했지만, 세라는 단숨에 알아봤다. 그녀는 세련되고 정갈한 세미 정장 차림에 명품 구두와 백으로 스타일을 완성시키는 사람이었다. 청바지에 흰 운동화를 신고 주말에 나들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그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상무님, 뭐 새로운 게 있나요?”

채 상무에게 말을 걸었다.

“유 팀장! 언제 왔어?”

채 상무는 말하면서도 시연 중이던 화장품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얼마 안 됐어요.”

남자아이가 뛰어와 채 상무의 셔츠가 늘어지도록 허리를 잡았다.

“엄마. 저기 다트판이 있어. 그거 하면 선물 준대. 가자.”

세라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은 엄마가 손님하고 얘기 중이니까. 좀 기다릴래?”

아이가 채 상무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채 상무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진짜 아이의 엄마처럼 굴었다. 세라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상무님…… 아이가…….”

아이가 채 상무 뒤로 숨었다.

“지우야, 인사해야지. 엄마랑 같이 일했던 분이야.”

“안.녕.하.세요.”

아이는 주뼛거리며 채 상무의 옷을 잡아당겼다.

“애가 낮을 좀 가려. 혹시 시간 괜찮나. 어디 가서 얘기 좀 할까?”


세라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부스로 돌아왔다. 여자는 고객들을 모아놓고 손등과 눈가에 화장 솜을 붙여가며 제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에 주름이 있는 거 보이시죠. 이 주 후면 감쪽같이 없어져요. 노화가 진행된 사람도 이거 바르면 재생 효과가 뛰어나요.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사카에서 이미 입소문이 난 제품이거든요.”

여자는 블로그로 들어가 리뷰를 스크롤다운 하며 설명했다. 고객의 이목을 끄는 수완이 좋은 편이었다.


세라는 채 상무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손님을 응대하면서도 아이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채 상무는 스스로 싱글맘이라고 밝혔다. 혼자서 지우를 키웠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가 엘라화장품에서 중도 퇴사를 하고 3년 뒤에 복귀했다는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임원 승진을 위해 해외 유학을 떠난 게 아니냐는 뒷말이 오갔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니! 한 번도 사사로운 감정을 내보인 적이 없기에 아이의 존재를 철저하게 비밀로 한 것은 어찌 보면 그녀다웠다.


아이는 세라와 채 상무가 얘기하는 동안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로 딱지를 접었다. 집중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비틀어 댔다. 세라는 채상무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눈빛을 건네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도 엄마였다. 폐경 전에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에 강호에게 아기의 아빠가 되어달라고 무리하게 요구했었다. 그랬다면 나에게도 저런 아이가 생겼을까. 아이의 손을 잡고 박람회장을 나가는 채 상무가 어느 때보다도 경쾌해 보였다. 세라는 그녀의 삶에 작은 틈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사이로 빛이 스미고 부드러운 바람이 넘나 들었다. 그 틈 안으로 보이는 세계가 궁금해졌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여자가 부스를 정리하며 제품들을 가방에 넣었다. 고객리스트에 담긴 정보만 해도 백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좀 더 많은 증정품을 가져와 홍보하기로 했다. 여자는 피곤해도 얼굴만은 반질반질했다. 세라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거울 앞에 섰다. 움푹 들어간 다크서클과 눈주름이 오늘따라 깊고 어둡게 그늘졌다. 여자의 말처럼 이걸 바르면 노화를 늦출지도 몰라. 세라는 여자가 정리하는 동안 화장 솜에 화장수를 묻혀 얼굴에 천천히 두드렸다.


박람회의 마지막 날에는 많은 방문객이 몰려들었다. 고객명단은 수백 명을 넘어갔고 샘플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편으로 배송하기로 했다. 세라는 종일 서 있는 바람에 다리가 붓고 피곤했다. 그래도 홍보 결과가 만족스러워 다행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증정용 샘플을 만들어야 했다. 퇴근 시간이라 도로 위 차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거리는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로 조금씩 활기를 찾았고 택시 안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솔솔 했다. 점심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던 회사 공원 벤치와 카페 월든이 보였다. 세라는 멀뚱히 창밖을 보다가 가방을 챙겼다.


“기사님, 여기서 내릴게요.”


캐리어를 끌고 월든으로 갔다. 친구들과 항상 앉던 자리는 다른 이들이 차지하고 앉았다. 빌딩 회전문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핸드폰은 조용했다. 얼마 전 강호에게 문자를 받은 게 전부였다. 강호와 영지의 전화번호를 검색하고 화면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았다. 약속 없는 기다림이었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화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객명단이 늘고 주문량이 많아지는 행복과는 별개였다. 그것으로도 위안되지 않았다. 세라는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고 카페 문 종소리는 자신을 과거로 데리고 갔다. 김선형과 오수아가 사원증을 목에 걸고 불쑥 들어와 사소한 일로 말장난을 할 것 같았고 일곱 시가 되면 강호와 영지가 시간 약속 좀 지키라며 서로에게 입을 삐쭉 내밀며 토닥거릴 것 같았다.


핸드폰에서 새로운 이메일이 수신됐다는 알람이 떴다. 하루마가 제품 홍보가 잘 마무리되어서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세라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출입문 종소리에 계속 촉을 세웠다.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루마의 응원은 빛이 바랬다. 파란색 사원증을 맨 직장인들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계속 세라를 쳐다봤다. 세라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몇 초간의 정지 상태에 머물렀고 곧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누구더라. 낯이 익은데. 그들은 긴 원목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음료를 픽업하는 그녀를 보고 영업부 정대리라는 걸 기억해 냈다. 단발이던 정 대리는 긴 웨이브를 하고 있었고, 원피스에 가려져 있지만 임신한 것 같았다. 세라는 코끝에 흘러내린 검은 테 안경을 들어 올리고 하루마 이메일을 다시 읽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조명을 가린 그림자가 테이블 앞에 멈췄다.


“유세라! 세라 맞지?”

세라가 고개를 들었다.

“영, 영지야……. 어쩐 일이야?”

세라는 눈앞에 있는 영지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어제 본 사람처럼 대꾸했다.

“뭐? 어쩐 일이냐고? 삼 년 만에 만나서 그게 할 소리니?”

영지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작정하듯 앉았다.

“어떻게 된 거니.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흥분한 말투로 세라를 뚫어지게 봤다.

“우선, 뭐 좀 마실래?”

세라는 노트북을 닫고 차분하게 말했다.

“갑자기 회사도 그만두고 연락도 끊고 그 안경은 또 뭐고 왜 이렇게 말랐니. 네가 없는 동안 우리가…….”

영지가 씩씩거리며 세라 앞에 있는 물을 한 잔 들이켰다.


세라는 영지의 얼굴과 옷매무새를 살폈다. 영지는 변한 게 없었다. 붉은색 립스틱이 도드라져 흰 얼굴이 더 또렷해 보였고 긴 머리는 찰랑거렸다. 베이지 점프슈트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허리선이 가늘어 보였다. 한꺼번에 많은 말을 꺼내놓고 주워 담은 적이 없는 그녀의 말투도 그대로였고 쉴 새 없이 자기 말만 하는 것도 여전했다. 세라는 영지가 자신과는 다른 시간을 달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근데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얼굴이 왜 이렇게 안 됐니?”

영지가 물었다.

세라는 영지가 자신을 훑는 걸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니. 아프긴. 나, 독립했어. 내 사업해.”

화제를 전환하려는 생각에 불쑥 나온 말이었다.

“사업?”

“오사카에 갔다가 후원자를 만났어. 오사카에서 작게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나서 한국에서 정식으로 해보려고 해.”

“오사카? 오사카에 있었니?”

세라는 얼떨결에 오사카 얘기도 해버렸다. 영지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뭐야. 말도 없이 잠수하더니 성공한 사업가가 돼서 돌아왔다, 뭐 이런 얘기야?”

“아니, 뭐, 성공했다기보다, 그게…….”

영지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강호는 모르지? 내가 연락할게.”

“아니, 그게, 내가 할…….”

세라는 강호를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호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늘 생각했지만, 이렇게 준비 없이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영지는 세라에게 눈을 찡긋하며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강호야. 지금 내가 누구랑 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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