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공항 입국장에는 새해 인사를 쓴 대형 스크린이 걸렸다. 한국 관광객을 위한 한글 안내표지판도 눈에 띄었다. 유명한 교자 식당 앞은 통행이 불편할 정도로 복잡했고 포켓몬 매장에는 아이 손에 이끌려온 부모들로 북적댔다. 세라는 오사카행 특급 열차표를 구매하기 위해 자동발매기를 찾았다. 여행 블로그에서 정보를 숙지했어도 발권하려니 손가락이 더디게 움직였다. 조작이 서툴러 헤매고 있을 때 뒷줄에서 불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스미마셍.”
후드티 모자를 쓴 남자가 세라를 어깨너머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세라가 움칫하며 뒤돌아보았다.
“어?”
남자가 놀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세라도 눈이 휘둥그레져 남자를 쳐다보았다. 제주도에서 만난 꽁지머리가 눈앞에 버젓이 서 있었다. 그는 재빨리 뒤에 줄지어 선 사람들을 의식했다.
“어디까지 가요?”
“닛폰바시역이요.”
세라는 당황해 일단 대답했다. 꽁지머리가 세라 앞으로 나와 발권기 앞에 섰다.
“혹시, 펜션 사장님이 알려준 게스트하우스로 가요?”
그가 자연스럽게 자동발매기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그쪽도요?”
“네.”
꽁지머리는 구매한 열차표와 잔돈을 세라에게 건넸다.
“닛폰바시역 말고 난바역으로 가세요. 닛폰바시역은 갈아타야 해요.”
노선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이곳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세라는 내키지 않았지만, 초행길이라 함께 가는 게 낫다고 마음을 달랬다.
“그럼, 전 이만.”
“같이 안 가세요?”
“들릴 때가 있어서요.”
꽁지머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세라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세라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열차 승강장을 찾아 나섰다. 파란색 투구를 쓴 것 같은 뾰족한 열차가 철로에 들어섰다. 짐칸에 캐리어를 올려놓고 지정석을 찾아 앉았다. 동그란 창문 밖으로 검회색을 띤 일본식 아파트와 목조 가옥이 빠르게 지나갔다.
전광판에 다음 역이 난카이 난바라는 안내문이 떴다. 꽁지머리가 알려준 대로 난바역에 내려 구로몬 시장으로 향했다. 일본어로 쓰인 간판만 아니면 빌딩과 도로, 거리의 상가는 서울의 도심지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돔으로 된 시장 입구에 ‘Kuromon Market’이라 쓰인 간판이 보였다. 여행 블로그에서 본 그 광경 그대로였다.
초록색 게스트하우스 건물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출입구에 ‘Captain’이라고 쓰인 현판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과 카페가 있었고 카페 유리문에는 '게스트하우스 프런트'라고 반듯하게 적혀있었다.
카페 안은 커피 향이 어우러져 포근하고 따뜻했다. 한쪽 벽에 설치된 편백 나무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해 대형 북카페 같았다. 영문 원서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 서적이었다. 익숙한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책 표지에 눈길이 갔다. 대학 때 읽던 나쓰메 소세키 소설이었는데 원서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카시라고 자신을 소개한 일본인 매니저는 말할 때마다 덧니가 살짝 보였다. 그는 드립 커피를 손님에게 내어주고 세라를 2층 다인실로 안내했다. 양쪽 벽에 각각 이층 침대가 배치되었고 하얀 시트 위에 이불과 베개가 단정하게 접혀있었다. 그는 숙소의 공용 시설과 옥상에 있는 노천탕의 이용 규칙을 설명했다. 투숙객에게 아메리카노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늦은 저녁이 돼서야 세라의 방에 새로운 투숙객이 들어왔다. 투숙객은 진갈색 곱슬머리에 헤어밴드를 하고 오랜 순례를 마치고 쉴 곳을 찾는 여행자처럼 보였다. 갈색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세라와 눈이 마주치자 보조개를 보이며 웃었다. 그녀는 캐나다 오타와에서 왔으며 이름은 클로이라고 했다. 세라가 South Korea에서 왔다고 하자 클로이는 반색했다. K-Pop을 좋아한다며 한국의 아이돌 그룹을 자연스럽게 열거했다. 순례자 같은 첫인상은 열정적이고 발랄한 모습 뒤로 숨어버렸다. 클로이는 K-아이돌과 배우들에 대한 팬심을 보이며 계속 말을 걸었고 세라는 밤늦게 잠이 들었다.
아침 햇빛이 침대 머리맡까지 밀고 들어왔다. 세라는 침대 프레임에 발뒤꿈치가 닿자 찬 기운에 발가락을 오므렸다. 천장에 달린 하얀 조명 덮개 속에 파리가 꿈틀거렸다. 여기가 어딘가. 꿈인가. 늦은 밤까지 얘기를 나눴던 클로이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자는 걸 보면 꿈은 아니다. 스웨터를 어깨에 걸치고 살며시 방을 나왔다. 복도는 조용했고 한기가 돌았다. 커피 향이 올라오는 카페로 내려갔다.
“굿모닝.”
아카시가 알은체하며 인사했다. 아카시가 유리 포트에 담긴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며 세라를 쳐다봤다.
“세라, 커피 줄까요?”
“네. 고마워요.”
진한 커피 향이 퍼졌다. 세라는 카페를 구석구석 눈으로 담았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가 원목 테이블에 앉아 김이 올라오는 차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여인의 콧잔등에 흘러내린 안경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봐도 한국인은 세라 자신 뿐인 듯했다. 문득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궁금해졌다.
“여기 사장님은 한국인이라고 하던데…….”
세라가 영어로 물었다.
“오, 캡틴?”
캡틴이라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캡틴, 한국 갔어요. 가끔 서울 가요.”
아카시도 더듬거리며 영어로 대답했다.
세라는 커피를 마신 후에 방으로 돌아가 경량 다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구로몬 시장의 초입에 서서 골목이 끝나는 곳까지 멀리 바라봤다. 둥글고 높은 천장을 보니 커다란 동굴 앞에 선 기분이었다. 대부분 상점은 문이 닫혀 있었고 간혹 좌판에 물건을 내놓은 가게가 더러 보였다. 시장 골목을 나와 볕이 잘 드는 쪽을 따라 걸었다. 보도블록을 교체하느라 통행 길을 막아 놓은 노란 안내판을 지나니 큰 사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바쁘게 걸어가는 젊은 여자, 자전거 뒤에 남자아이를 태우고 페달을 밟는 할아버지, 신호등이 바뀌고 사각 교차로를 건너는 사람들이 서로 교집합이 되었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오랜만에 찾아온 듯한 익숙한 광경이었다.
카페로 돌아왔을 때 클로이가 일본 가정식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서툰 젓가락질로 매실장아찌를 베어 물고 얼굴을 몹시 일그러뜨렸다. 세라는 된장국을 후루룩 들이켜는 그녀를 지켜보다 침을 삼켰다. 클로이와 같은 메뉴를 시키고 의자에 걸쳐있는 겉옷과 가방을 쳐다봤다.
“클로이, 어디 가요?”
“오사카성과 우메다 스카이 빌딩에 갈 거예요. 세라는 어디 안 가요?”
“오후에 시내 좀 나가보려고요.”
“어제 도톤보리에 갔었는데, 저녁에는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클로이는 피곤했다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세라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정임이 무악산에 왔다며 봉수대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지난밤 정임과 통화할 때 무기력한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무거웠었다. 슈퍼 아주머니와 함께 산 정상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걱정을 덜었다.
아카시가 돼지고기 덮밥과 샐러드, 매실장아찌를 곁들인 반찬을 담은 쟁반을 세라에게 내밀었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다시 울렸다. 영지가 칸딘스키 그림 전시회를 가자며 티켓 사진을 보내왔다. 세라는 친구들의 문자 하나에도 예사롭게 반응할 수 없었다. 영지와 강호의 카톡을 보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단톡방에서 나왔다. 그들과의 사이에 실오라기 같은 줄이 그어졌다.
세라는 오사카행 비행기에서 졸고 있는 여자의 사원증을 봤을 때 지난날의 아련한 감정이 뭉글하게 솟아올랐었다. 엘라화장품에 입사해서 팀장이 되기까지, 연이은 야근으로 사무실을 소등하고 퇴근했던 무수한 날들을 창밖으로 지나가는 구름 속에 떠나보냈다. 강호와 함께 눈 쌓인 골목길을 신발로 헤쳐 걷던 그 날밤, 세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강호의 체온을 가슴으로 깊이 느꼈다.
어느새 구름 띠가 서서히 걷히고 작은 사각 창으로 햇빛이 조금씩 비췄다. 세라는 돌아갈 곳이 없는 기나긴 여정을 떠나고 있었다.
“세라가 일주일째 연락이 안 돼.”
영지가 의문스럽게 말했다. 강호도 연락이 뜸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는 수신 문자를 놓친 게 있는지 핸드폰을 확인했다. 최근 세라의 흔적은 없었고 전화를 걸면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 메시지만 되풀이됐다. 통화기록은 함박눈을 맞으며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세라한테 연락 있었니?”
강호가 심각하게 물었다.
“아니 없었어. 그런데 너희 또 싸웠어?”
영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강호에게 물었다.
“싸우긴. 우리가 왜 싸워.”
“그럼 얘가 남자가 생겼나…… 혹시 얘기 들은 거 없어?”
“그럴 애는 아니지. 너도 알잖아.”
“무슨 뜻이야?”
“남자친구 생겼다고 잠수탈 애는 아니라고.”
“지금 나 들으라고 얘기하는 거야?”
영지의 말에 강호가 움찔했다.
“그게 아니라, 남자 때문이 아니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강호는 영지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왜 그렇게 확신했는지 자신도 가늠이 안 되었다. 최근 세라의 말과 행동을 곱씹어 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기를 낳고 싶다거나, 별거 아닌 일에 발끈하고 어울리지 않게 센 척을 하며 스스로 낯설게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강호야, 세라 집에 간 적 있었니?”
“아니. 너는?”
영지는 고개를 저었다. 십년지기 친구라면서도 한 번도 집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강호는 후회가 밀려왔다. 영지는 상념에 젖기보다 현실적이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엘라화장품의 대표 전화번호를 검색한 다음 전화를 걸었다. 자동 응답기에서 부서별로 연결이 가능한 단축번호를 찾아 기획부를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막 전화를 끊으려는데 기획 3팀이라며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영지는 세라가 퇴근했는지를 상대에게 물었다. 여자는 뜻밖의 말을 했다.
“유세라 팀장님, 그만두셨는데요.”
“그만뒀다고요?”
영지는 여자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었으나 여자는 잘 알지 못했다.
“무슨 말이야. 회사를 그만뒀다고?”
강호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는 세라가 자기 일에 누구보다 열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 일이라면 어떤 상황이라도 개의치 않고 달려갔고 휴일을 반납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갑자기 말도 없이 회사를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연락이 안 되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강호는 집으로 돌아와 동기들에게 전화해 보고 대학교 동문회지에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봤다. 새로운 단서는 없었다.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려고 해도 친족이 아니면 수사 의뢰가 어렵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강호는 영지를 만나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게 있는지 물었다.
“다른 애들한테도 확인해 봤는데 최근에 세라와 연락한 사람은 없더라. 넌 뭐 알아낸 거 있어?”
“혹시 마지막으로 너희 둘이 만났던 날, 별일 없었어?”
영지는 수사하듯 강호를 다그쳤다.
“그날?”
강호는 그날을 떠올렸다.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거나 무슨 말을 하거나, 그런 일 없었냐고.”
"어, 그날 별일 없었는데."
하지만 강호는 속으로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다. 집에 바래다주었을 때 갑자기 껴안아 당황했고 헤어질 때는 자기를 잊으면 안 된다는 등 싱거운 소리를 해댔다. 그날이 마음 한 귀퉁이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의도적으로 숨은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영지는 세라가 업무 중에 응급실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 갔을 때로 돌아가 생각했다. 생리통 때문이라고 했지만, 침대 옆 휴지통에 핏자국이 선명한 패드가 겹겹이 뭉쳐져 있었고 집에 연락하지 않은 것도 그랬다. 세라는 응급이라기에는 태연했고 대처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영지는 그런 생각이 들자 손가락에 낀 반지를 돌리며 초조해했다.
“맞아, 3층이었어.”
강호가 뭔가 생각난 듯 테이블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뭐가?”
“세라 집 말이야.”
강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지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현관 입구에 '평화 빌라'라고 새겨진 오 층 짜리 벽돌색 빌라 앞에서 주위를 살폈다. 강호는 세라를 바래다주고 돌아서면서 계단에 오를 때마다 층계참에 불이 켜지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강호가 현관으로 들어가 우편함에서 집 호수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었다. 3층에는 세 가구가 살고 있었고 영지가 301호 우편함에 손을 집어넣었다. 강호는 거침없는 영지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사람이 드나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301호와 302호는 우편물이 각각 다른 수신자로 되어 있었고 공과금 독촉장에 인쇄된 이름은 전부 남자였다. 남은 건 303호. 영지가 우편함에 깊숙이 손을 넣어 더듬거렸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광고성 우편물이 딸려 나왔다. 단서가 될만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영지는 포기하고 구두를 반쯤 벗고 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강호는 현관 바닥에 떨어진 광고 전단지만 맥없이 내려다봤다.
세라는 침대에 걸터앉아 배낭을 챙기는 클로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클로이는 체크아웃하는 대로 도쿄로 갈 거라고 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며 배낭 깊숙이 손을 넣고 뭔가를 끄집어냈다.
“이거 메이플 시럽이에요. 선물.”
세라가 손사래를 치자 클로이는 각국의 여행자들을 만날 때마다 작은 기념품을 선물한다며 별거 아니라고 손에 쥐어 줬다. 세라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고 자신도 뭔가 줄 게 있는지 머릿속을 빠르게 돌렸다. 캐리어를 열고 뒤적거렸다. 튜브형 볶음 고추장을 밀봉한 비닐 팩 그리고 서울에서 처방받은 약봉지사이로 잔짐을 넣은 몇 개의 파우치가 있었다. 다행히도 파우치안에 서울에서 가져온 천연 화장수가 있었다. 작은 유리병을 꺼내 클로이에게 직접 만든 화장수라며 건넸다. 클로이는 환하게 웃으며 세라의 볼에 얼굴을 살며시 갖다 댔다. 클로이를 배웅하고 아카시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손님들 사이로 원목 테이블에 앉은 꽁지머리가 보였다. 세라보다 하루 늦게 게스트하우스에 입성한 그는 제주도에서 본모습 그대로였다. 하나로 묶은 머리는 잔머리가 빠져나와 지저분해 보였고 검은색 티셔츠에는 인디언 해골 그림이 희미하게 벗겨져 있었다. 세라가 그에게 다가갔다.
“지난번엔 고마웠어요.”
“네.”
꽁지머리는 짧게 대답하고 헝겊으로 카메라를 문질렀다. 그녀는 무안해서 테이블 위에 있는 잡지만 들췄다.
아카시가 다가와 커피를 내려놓았다.
"안녕. 도경."
“혹시 근처에 라이카 매장이 있나요?”
도경이 아카시에게 물었다.
“라이카…… 라이카데스까?”
아카시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메라 브랜드예요. 캐논 같은.”
“오, 캐논 카메라.”
“아니요. 캐논 말고 라이카.”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도톤보리에 캐논 매장은 있어요. 무슨 문제 있어요?”
꽁지머리가 너덜거리는 배터리 커버를 가리켰다.
세라는 꽁지머리의 유창한 일본어에 놀랐다. 그가 카메라에 관해 말할 때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표정은 누그러지고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무심한 척 잡지를 넘기며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고등학교 때 배운 몇 개의 단어만 알아들을 뿐이었다. 온통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알 만한 단어를 끄집어내는 것에 몰두했다. 아카시는 당황하거나 급할 때는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그는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가끔 말이 안 통할 때는 쌀쌀맞은 꽁지머리라도 이곳에 있어 마음이 놓였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카페 여기저기를 조준했다. 세라 쪽을 향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다.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머그컵을 든 채 멈칫했다.
이 곳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어갔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 테이블까지 길게 드리웠다. 안경을 코끝에 걸친 중년여성은 늘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세라는 과일꼬치가 담긴 종이봉투를 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책장 앞에서 비니를 쓴 남자가 책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못 보던 사람이었다. 그는 두꺼운 책 몇 권을 빼서 원목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한국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원서를 능숙하게 다루는 걸 보니 일본인 같았다. 책을 마음대로 꺼내고 테이블의 배치도 바꾸는 게 이상해 보였다.
“안녕.”
설거지를 마친 아카시가 젖은 손을 털며 세라에게 인사했다.
“저 손님 알아요?”
세라는 아카시에게 과일꼬치를 권하며 비니를 쓴 남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카시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바 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남자가 책 한 권을 들고 바 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비니를 쓴 이마는 반질거렸고 짙은 눈썹과 성긴 턱수염은 이국적이었다. 물 빠진 청바지에 회색 스웨터를 입은 모습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아카시 보다는 훨씬 많아 보였다.
“캡틴, 여기는 세라 예요.”
“아, 장기투숙하신다는 그분?”
캡틴이란 말에 세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 가셨다고 해서 손님인 줄 알았어요.”
“어제 왔어요. 반가워요.”
캡틴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래서인지 날렵한 몸매는 중년의 이미지하고는 안 어울렸다. 아침 일찍 나와 책장을 정리하는가 하면 카페 밖에 늘어서 있는 화분을 걸레로 닦아주었다. 손님이 한가할 때면 어느새 골목으로 나가 두 청년이 하는 타코야끼 집에서 주변 상인들과 얘기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는 했다.
세라가 다니는 어학원도 한 학기가 끝나갔다. 다인실에서 지내는 게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약을 먹으면 어디가 아픈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둘러대며 말하는 것도 지쳐갔다. 일본어로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지자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어학원 근처의 월세는 만만치 않았고 정임에게 보낼 생활비까지 계산하면 모아둔 돈이 언제 바닥날지 모를 일이었다. 식당이 모여 있는 난바나 도톤보리에서 일자리를 얻고 월세로 옮겨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빈 원룸이 있다는 아카시의 말에 세라는 마음이 혹했다. 어쩌면 원룸을 구하는 일이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며칠 후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캡틴이 카페 앞에서 분갈이하고 있었다. 세라가 동양란을 보며 쪼그려 앉았다.
“어디 다녀와요?”
“학원이요.”
“학원은 다닐만해요?”
캡틴이 목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네, 재밌어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일본어여서 2년 정도 배웠거든요. 다시 공부하니까 배웠던 것들이 기억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어디든 현지어를 배워두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죠. 장기적으로 있을 거면 더 그렇고요."
“그런데, 저기 등은 뭐예요?”
시장의 돔 천장에 매달린 타원형의 붉은색 등에는 굵은 검은색 붓글씨로 黑門이라고 쓰여있었다.
“저기 흑문이라고 적힌 등 말이죠? 구로몬이라는 말이 원래 검은 문이라는 뜻이에요.”
“검은 문이요?”
“예전에 이 근처에 절이 있었는데 입구에 검은 문이 있었대요. 그 이름을 그대로 따서 시장 이름을 지었다는군요. 주로 생선을 많이 팔던 곳이라 지금도 해산물이 많아요…… 세라 씨는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
“화장품회사에 다녔어요.”
“그래요? 설마 여기 오느라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죠?”
세라는 씁쓸하게 웃어넘겼다.
아카시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프렌치토스트를 그녀 앞에 놓고 캡틴에겐 얼그레이를 내려놓았다.
“혹시, 근처에 알바 자리가 있을까요?”
세라가 넌지시 물었다.
“아르바이트하게요?”
캡틴은 핸드폰 연락처를 위아래로 스크롤했다. 그러다 무릎을 쳤다.
“세라 씨, 라멘집에서 홀 서빙해 볼래요?”
그는 세라가 대답할 틈도 없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일본어로 통화하는 내내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라멘집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라멘집 사장은 오래된 일본인 친구라고 했다. 인플루언서의 SNS에 라멘집이 소개되면서 한국 손님이 늘어나 한국어가 가능한 아르바이트생을 찾는다고 했다. 세라는 캡틴 덕분에 다리품을 팔지 않고 일자리를 얻게 되어 다행이었다.
숙소에서 라멘집까지는 도보로 출퇴근하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집에 오는 길에 구로몬 시장에서 군것질만 안 한다면 하루 지출이 없는 날도 있었다. 라멘집에서 밖을 보면 글리코상 대형 간판과 도톤보리 강이 한눈에 보였다. 식당 내부는 좁은 주방을 에워싼 카운터 자리와 홀에 테이블 몇 개가 놓인 게 전부였지만,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테이블을 닦고 나무젓가락을 꽂아놓고 나면 손님 맞을 준비는 끝났다.
세라가 출근하면 간밤에 네온 불빛에 출렁이던 도톤보리의 강물은 다시 잔잔해졌다. 취객들로 넘쳐나던 식당 거리는 까마귀가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 부스러기를 부리로 쪼아댔다. 패기 넘치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정갈한 모습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온 도회적인 사람들이 식당 앞을 오갔다. 글리코상은 여전히 두 손을 벌리고 어딘가를 향해 뛰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되면 야간 아르바이트생과 교대했다. 사장은 손님이 몰리기 전에 직원들에게 뜨끈한 시오라멘을 만들어줬다. 종일 라멘 냄새를 맡다 보면 물릴 법도 한데 세라는 그렇게 한 끼를 때우는 게 편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숙소로 돌아와 카페에서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갈무리했다.
세라는 도경이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원룸으로 옮겼다는 얘기를 듣고 조급해졌다. 간발의 차이로 마지막 남은 빈 원룸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깐깐한 도경이 이곳을 택했다면 믿을 만했고 어학원과의 거리를 포기하고 같은 한국인이라는 온정주의를 내세우면 월세 협상이 유리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먹은 김에 캡틴에게 월세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뜸을 들이거나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기색 없이 계약조건을 알려줬다. 현지 월세보다 저렴한 조건이었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 장기투숙을 하면서 나름 친해진 게 작용한 것 같았다.
드디어 마지막 공실이던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숙소의 꼭대기 층은 오피스텔처럼 작은 평수의 숙소가 몇 채 있었다. 캡틴도 거기서 머문다고 했다. 캐리어만 옮겼을 뿐인데 새집에 가구를 들인 것처럼 설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원룸으로 이사까지 하니 미뤘던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정임과의 전화 통화도 일을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줄어들었다. 잊고 있던 공용 노천탕도 생각났다. 옥상에 있다고 말만 들었지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는데 일과 집이 해결되니 노천탕이 궁금해졌다.
세라는 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과일꼬치 가게에 들렀다. 과일꼬치를 담은 봉지를 들고 상점들을 지나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뒷걸음쳐 ‘요시메의 화장품’이라 적힌 입간판 앞에 섰다. 매장은 공실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이마에 양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화장품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제품을 홍보하는 포스터나 전단지는 보이지 않았고 진열장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도열하듯 서 있는 유리병들이 전부였다.
호기심에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없고 라디오에서 엔카만 가늘게 흘러나왔다. 한쪽 진열대에 갈색 유리병들이 있었는데 호리병 모양과 직사각형, 원통형의 모양 등 향수병처럼 다양했다. 일본어로 된 제품 설명서를 훑어보다가 오가닉이라고 인쇄된 굵은 펜글씨 아래 ‘가라구토미세스’라고 쓰여 있는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스킨 토너나 에센스 타입의 화장수처럼 보였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세라는 내용물이 궁금했다. 핸드폰을 꺼내 설명서를 찍을 동안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라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 캡틴은 머그컵을 닦고 있었다. 그녀가 과일꼬치에서 토마토 하나를 빼서 입에 넣으며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오사카에 오신 지 오래됐어요?”
“여기는 한 7년 됐나? 실은 서울 북촌에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거기가 본진이고 여기는 여행왔다가 구로몬 시장에 꽂혀서 시작하게 됐어요.”
“어떤 점이요?”
“처음 오사카에 왔을 때 단조롭고 깔끔한 느낌이 간이 덜 밴 건강 음식을 먹는 기분이었거든요. 한두 해가 지나고 보니 그게 맛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더라고요. 그런데 여기는 때론 시끄럽고 복잡해서 오히려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음…… 사람 사는 맛, 뭐 그런 거요?”
“오! 맞아요.”
캡틴은 고무된 표정으로 마지막 물컵을 행주로 훔쳤다.
“세라 씨는 어때요. 가족 보고 싶지 않아요?”
“공부하고 라멘집 알바 하고 나름 바빠요. 저 다음 달에는 상급반으로 옮겨요.”
세라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요. 그러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질 거예요. 참, 그리고 그냥 캡틴이라고 불러요. 여기선 다 그렇게 불러요.”
그때 누군가 카페 문을 열고 다급하게 들어왔다.
“캡틴 상!”
초록색 두건을 두른 할머니가 숨을 헐떡거렸다.
할머니는 캡틴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누, 누가 가게에 들어왔었어! 내가 라디오를 틀어놨었는데 꺼져있지 뭐야.”
“요시메상 좀 진정하세요.”
캡틴은 씩씩거리는 그녀에게 물 한잔을 건넸다. 그녀가 단번에 물을 들이켰다. 그제야 옆에 있는 세라를 의식했는지 흥분을 가라앉혔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세라를 빤히 쳐다봤다. 요시메의 두 눈이 점점 커지더니 세라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니…… 코…… 리?”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세라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카시가 두 볼이 발그레한 채 배시시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벌써 자는 건 아니죠? 파티가 있는데 카페로 내려올래요?”
“파티요?”
세라는 카디건을 걸치고 아카시를 따라 내려갔다.
일 층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크고 또렷해졌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맥주병을 들고 제이슨 뮤라즈의 노래를 떼창하고 있었다. 바에선 캡틴이 칵테일과 맥주를 손님들에게 건넸다. 상기된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한잔해요. 피나콜라다예요.”
캡틴은 노랫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고개를 까닥였다.
“무슨 날이에요?”
“일 년에 두 번 여행자 파티를 해요. 오늘이 그날!”
세라는 칵테일을 마시며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한 무리가 되어 엉켜있었고 제각각 다른 미소로 흥해있었다.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람들 사이에 도경이 보였다.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쓴 동남아시아계 여자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세라가 망설이는 사이 아카시가 신이 나서 여자와 도경 사이에 끼어 앉았다. 세라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여겨보며 아는 사람이 있는지 훑었다. 삼사일 후면 들고나는 투숙객들이기에 얼굴은 낯설었다. 원룸으로 옮긴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도경이 있었지만, 그는 카메라에 사람들의 표정을 담는 일 외엔 관심이 없었다.
“재밌어요?”
캡틴이 맥주를 병째 들이키며 말했다.
“이런 파티 처음이에요.”
세라는 음악 소리 때문에 조금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여행자들은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었다. 여행객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오랜 친구를 대하듯 다정하게 대했다. 소박하게 웃고 절제된 행동으로 파티를 즐겼다. 사람들이 잔을 들어 올리고 자국어로 건배사를 시작했다. 세라는 맥주잔으로 바꾸고 건배사에 한잔씩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가 움츠렸던 온몸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중국인 투숙객이 선창 했다. “깐베이!” 뒤이어 여기저기서 ‘샬롯’, ‘스콜’ 하며 자국어로 건배를 했다. 세라도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캡틴이 ‘아리랑!’ 하자 모두 일어서서 환호를 질렀다. 외국에 나오면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한국적이라는 말에 딱 맞는 구호였다. 흰 거품이 차오른 맥주잔들이 허공에 모였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들 자기 목소리에 취해 내일의 창피함 따윈 던져버렸다.
스피커에서 중저음의 시아 목소리가 나오자 흥분했던 사람들이 차분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리듬을 타는 사람도 있었다. 건배사를 했던 중국인은 홀로 취해 빙빙 돌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Don’t cry snowman don’t you fear the sun. Who’ll carry me without legs to run honey. without legs to run honey……. 허스키한 음성이 카페 안을 휘감았다. 도경이 카메라를 들고 바 쪽으로 옮겨 왔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으며 모니터를 확인했다. 그의 얼굴이 한국의 가을 산처럼 울긋불긋했다.
“많이 마셨어요?”
세라가 물었다.
“네? 잘 안 들려요.”
시아의 노래가 절정을 향해 갔다. 도경이 세라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까 옆에 있던 여자요. 이상한 모자 쓴, 잘 아는 사이예요?”
“안젤라요? 오늘 첨 본 사람인데요. 필리핀에서 왔다던데.”
세라는 도경의 말에 입을 실룩거렸다.
“참나, 첨 보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웃는다고? 나는 완전 스노우맨 인지 알았지.”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예요?”
“아, 됐어요. 됐어.”
세라는 발그스레한 볼을 손으로 두드리며 평소와는 다른 말투로 말했다.
“취한 거 같은데, 그만 마시죠.”
세라는 상관없다는 듯이 몸을 살랑이며 춤을 췄다.
홀로 춤추던 중국인이 세라 옆으로 다가와 팔을 잡고 홀 중앙으로 잡아끌었다.
“노, 노, 노”
그녀는 웃으며 거절했지만, 중국인은 혀가 꼬여 영어와 중국어를 번갈아 가며 썼다.
“그만해, 싫다잖아.”
도경이 이마를 찌푸리며 한국말로 말했다. 중국인은 한발 물러서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신 좀 차리고 있어요.”
“뭐라고요?”
세라가 못마땅한 듯 도경을 노려보자 캡틴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싸우지 말고, 마시자 구!”
그때 스콜을 외치던 덴마크 여자가 리듬을 타며 캡틴에게 걸어왔다. 애교 섞인 장난기에 사람들이 웃어댔다. 여자는 캡틴의 손을 이끌고 홀 중앙으로 나왔다. 캡틴은 못 이기는 척 끌려 나가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갑자기 휘파람을 불며 물개박수를 쳤다. 캡틴은 여자의 스텝을 따라가다 다시 여자를 이끌었다. 세라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엄지 척하며 소리쳤다.
“캡틴 짱!”
세라는 사람들의 환호 속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꾸 내려앉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주위를 천천히 돌아봤다. 이제 여행자들처럼 들뜨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눈빛이 반짝이다가도 혼자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고립된 시간을 걸었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치면서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로운 몸짓만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세계에 발을 디뎠다. 모두 떠날 사람들이었다. 앞으로 자신의 변화를 눈치챌 만한 사람은 캡틴과 아카시뿐,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이 위안을 줬다. 파티가 끝나가자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거나 여운을 즐기려고 계속 얘기를 나눴다. 세라는 카페에 남아 아카시와 함께 뒷정리했다.
“괜찮아요?”
캡틴이 세라에게 물었다.
“말짱해요. 그런데 춤 잘 추시던데요. 아까 멋졌어요.”
그는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세라는 의자를 정리하다가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며칠 전 카페에 들이닥쳤던 요시메상이 젊은 남자의 부축을 받고 함께 걷고 있었다. 캡틴은 그녀가 화장품 가게 주인이라고 알려줬었다. 그녀에게 왜 세라를 니코리라고 불렀는지 물었더니 전혀 기억을 못 하더라고 했다. 세라는 불쑥 화장품 가게에서 본 제품 설명서가 생각나 핸드폰을 뒤젹거렸다.
“혹시 이 부분 좀 봐주실래요? 해석이 잘 안 돼서요.”
세라는 그것을 사진 폴더에서 찾아 캡틴에게 보여줬다.
캡틴은 안경을 끼고 사진을 확대했다.
“가라구, 토미센, 스? 천연 가라구토미센스?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그런데 무슨 추출물이라는데요. 화장품에 쓰이는.”
캡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가라구토미세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요.”
세라는 골몰히 생각하며 혼자 입속말로 재깔였다.
“요시메상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그게 제일 확실할 것 같은데.”
캡틴은 눈썹에 힘을 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 말 듣고 있어요?”
갑자기 세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 생각났어요. 갈락토미세스, 갈락토미세스였어요!”
세라는 검색창에 서울 날씨를 확인하고 미세먼지 유무를 살폈다. 정임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마스크 착용을 당부했다. 정임이 걱정하지 말라며 두통은 좀 어떠냐고 물었다. 약통을 열어보니 마지막 한 알만 남아있었다. 세놀리틱항체약도 몇 알 남지 않았다. 정 박사가 노화를 지연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직접 처방해 준 약이었다. 정임은 전화할 때마다 언제 올 거냐고 매번 같은 질문을 했다. 세라는 언제쯤이란 말에 베개 밑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주우며 아직은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남은 알약을 보고 달력의 날짜를 세었다. 처방받은 약들이 거의 떨어져 갔다.
라멘집 사장은 주방의 배수관 공사를 한다며 직원들에게 이틀 휴가를 주었다. 세라는 모처럼 여유 시간이 생겨 온몸에 장전해 있던 긴장이 일순간에 느슨해졌다. 어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캡틴이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학원 다녀와요? 참, 다케시상이 라멘 집 공사한다고 하던데.”
라멘집 사장과 캡틴이 친구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랐다.
“그래서 금요일까지 쉬라고 하시더라고요.”
“뭐 할 거예요? 혹시 집에 안 가요?"
세라는 집이라는 말에 코끝이 매워졌다. 퇴근하고 늦게 돌아가도 항상 그 자리에 있던 집. 그리고 엄마.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정임의 붉은 얼굴이 떠올랐고 어두워진 골목길을 혼자 걸어가는 힘없는 어깨가 눈앞에 그려졌다.
“난 내일 서울 갈 일이 있어서 표를 알아볼 건데, 여행사 친구가 있거든요.”
캡틴은 여행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비행기표를 확인했다. 출발시간을 확인하며 세라를 한번 쳐다봤지만,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애꿎은 냅킨만 접었다 폈다 반복했다. 손은 바빠도 눈빛은 텅 비어 보였다. 통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냅킨을 접는 세라의 손동작이 빨라졌다. 캡틴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세라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갈래요.”
열한 개의 생산라인이 있는 봉제공장은 호찌민시에서 꽤 큰 사업체에 속했다. 직공들은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했고 여의치 않으면 오토바이 카풀을 했다. 차량 사이로 비집고 다니는 오토바이 때문에 택시 기사는 여러 번 경적을 울렸다. 강호는 택시의 뒷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바이어와 납기 문제로 호찌민 공장에 출장을 간 지 삼 일째였다. 김 부장이 보낸 메일을 열었다. 내일까지 제품 검사를 끝낼 수 있게 생산 일정을 확인하고 개인적인 부탁이라며 면세점에서 위스키를 좀 사다 달라고 했다. 검사 일정표를 보고 검토해야 할 사항을 핸드폰에 저장했다. 영지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면세점에서 살 게 있다면서 강호에게 브랜드명과 립스틱 호수를 보내왔다.
강호는 호찌민 공항 면세점에 들러 32년 산 위스키를 사고 Y 화장품매장으로 갔다. 화장품매장 계산대에는 줄이 길게 서 있었다. 강호는 시계를 쳐다보고 끝줄에 섰다. 팔짱을 끼고 가지런히 진열된 화장품을 눈으로 둘러봤다. 베트남 여자가 귀밑으로 내려온 단발머리를 뒤로 넘기며 립스틱을 발랐다. 어깨에 멘 가방이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그녀의 뒤태를 반이나 가렸다. 세라도 제 몸보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길 때는 작고 하얀 얼굴이 청초했었다. 강호는 생각에 잠긴 채 연한 웃음을 지었다. 차례가 되자 영지가 말한 립스틱 25호를 주문했다. 직원이 립스틱을 내밀며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비행기 안에서 립스틱 두 개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세라가 잠적하고 시간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갔다. 강호는 기내식을 먹다가 독한 녀석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때 303호에 올라가 직접 확인했어야 했다. 회사로 찾아가 그만둔 이유를 물었어야 했고, 통신사에 가서 위치추적이라도 요청했어야 했다. 방관하고 지낸 시간이 후회로 돌아왔다. 숨바꼭질이 지겨우면 돌아오겠지, 하며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할 만큼 했다는 영지의 말에 침묵으로 동의하는 게 아니었다. 일상으로 돌아가 세라 없이 영지를 만나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주말에는 동호회 사람들과 백패킹을 다녔다. 그사이 세라의 문자 함은 굳게 닫힌 비밀의 문이 되어버렸다.
영지도 남자를 만나고 몇 달 후 헤어졌다며 울고불고하는가 하면 늦은 밤에 술 먹고 전화해 집에 데려다 달라고 떼를 썼다. 이런 투정을 부려도 뒤끝은 없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세라가 늘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모든 일을 명확히 구분했다. 감정에 흐트러져 속내를 비치다가도 다음 날이면 이성적인 모습으로 차가우리만치 자기감정을 변호하고 나섰다. 영지가 번번이 되풀이하는 행동들이 세라에게는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강호는 옛일을 뒤척거리다 승무원에게 건네받은 주스를 바지에 쏟았다. 헐거워진 나사처럼 여기저기 흩어지는 감정들을 추슬렀다.
강호는 세라와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느꼈다. 누군가는 그 선을 조금씩 밟아 넘으려 했고 누군가는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일 년 전 마지막 모습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라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끝까지 물어봐 주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착륙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자 아스팔트를 긁어대는 굉음과 진동이 기내를 삼켜버렸다. 활주로에 안착하자 사람들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강호는 립스틱 하나를 주머니에 따로 집어넣었다.
캡틴은 김포공항을 빠져나왔다. 한쪽 어깨에 걸친 백팩을 양어깨로 짊어지며 세라를 뒤쫓았다.
“세라 씨, 그럼 가족들 잘 만나고 나중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봐요.”
세라는 켑틴과 헤어지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표정 또한 활기찼다. 전철 안에서 어린아이가 핸드폰 영상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 세라는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신발 앞코를 까닥였다. 아이의 불안한 음정과 박자에 웃음이 나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나가는 행상인의 사업이 망해 땡처리한다는 푸념도 귀담아들었다.
병원 앞 화단에는 팬지와 베고니아가 활짝 피어 있었다. 세라는 진료실 앞 대기자들 사이에 앉았다. 얼마 후 진료실로 들어서자 정 박사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오사카로 떠난다고 했을 때 정 박사는 찬성도 반대도 아닌 침묵을 택했었다. 여행에 필요한 비상약과 장기 복용 약을 처방해 주면서 어디를 가든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새로운 삶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었다. 세라는 정 박사의 시선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것을 느꼈다.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처럼 긴장됐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눈빛을 유심히 뒤쫓았다. 동공이 흔들리고 안면근육이 어색해지면 세라는 한층 위축되었다.
"혹시 증상이 심해지거나 새로운 증상 같은 게 있어요?"
"공부하면서 알바하고, 그래서 피곤한 것 말고는 딱히 없었어요."
정 박사는 세라의 심신 상태를 살피면서 몇 가지 검사를 하자고 했다. 합병증으로 올 수 있는 여러 증상은 통증 완화만 될 뿐 완치는 없었다. 환자에게 위로나 예의를 지키느라 기적이나 희망이란 말로 기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으로 적응시키는 게 환자나 가족에게 적합한 처방이라고 생각했다.
세라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동네는 어수선했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난립했고 길바닥엔 전단지가 나뒹굴었다. 공원 입구에는 시위대가 피켓을 들고 흔들어 댔고 시계탑 아래는 배드민턴을 치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간혹 뒤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백스텝을 하는 할아버지가 뒤섞여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에 누렇게 녹이 슨 하나 슈퍼의 간판도 몇 년째 똑같은 상태였다. 세라는 집 앞에서 손바닥을 문지르며 서성거렸다. 골목길로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엄마!
하마터면 정임을 입 밖으로 부를 뻔했다. 사람들 속에 정임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검은색 바지에 세라가 생일 선물로 사줬던 남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 반짝이는 커다란 큐빅 단추 때문에 멀리서 봐도 누군지 알아봤다. 썬캡을 쓴 슈퍼 아줌마와 배가 나온 세탁소 아저씨도 그대로였다. 동네 사람들이 가까이 오자 세라는 옆 동으로 몸을 숨겼다. 웅성대는 소리에 정임의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재개발 반대 피켓을 든 아주머니들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조율 중인 것 같았다. 그러다 작당이라도 한 듯 일사천리로 흩어졌다.
정임은 슈퍼 아줌마와 함께 공원 쪽으로 향했다. 세라는 잠복하듯 정임의 뒤를 따라갔다. 공원에는 시위에 참석하려는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강아지와 산책하던 여자나 뒤로 걷던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건너편 시위대에 합류한 남색 재킷만 눈길로 쫓아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군집했고, 정임과 비슷한 옷차림의 아주머니들이 몰려들자 정임을 놓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집 앞에서 정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위대의 소리가 줄어들더니 마이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임이 슈퍼 아줌마와 헤어지고 집으로 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피켓을 들고 다른 손엔 두부가 담긴 비닐봉지를 달랑거렸다. 세라는 화단에 앉아 있다가 급해 옆 빌라로 몸을 숨겼다. 조심스레 머리만 내밀고 다가오는 정임을 눈으로 확인했다. 방금 미용실에 다녀온 사람처럼 머리는 곱슬곱슬했고 걸을 때마다 잠시 멈춰 한쪽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정임이 빌라 현관으로 들어갈 때 세라의 입술이 떨렸다.
세라는 기운 없이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네 시간이 남아있었다. 버스 안내 전광판만 멍하니 올려다봤다.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택시가 회색 빌딩 앞에서 멈췄다. 세라가 빌딩 건너편에 있는 카페로 잰걸음에 갔다. 월든은 그대로였고 카페 사장도 민머리를 반짝이며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건너편 빌딩 앞은 복잡했다. 퇴근하는 사람들로 회전문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세라는 멀리서 회전문을 돌아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었다. 그 속에서 강호가 보였다. 짙은 남색 정장에 서류 가방을 메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세라는 강호를 보면서 그에게 문자를 썼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한 여자가 뒤에서 강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친근해서 장난기가 어린 그런 발걸음이었다. 강호의 어깨를 치며 놀라게 하더니 팔짱을 꼈다. 강호는 이력이 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의 장난을 받아 주었다. 스스럼없이 팔짱을 낀 여자는 마스크를 했음에도 환하게 웃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다. 영지는 여전히 명랑했고 거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