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임은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바쁘게 움직였다. 가스레인지에 국 냄비를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냈다. 세라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분주한 정임을 지켜봤다.
“엄마, 어디가?”
“머리 좀 묶으라니까.”
정임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으며 말했다. 세라는 입꼬리를 쌜룩 대며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어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딸려 나왔다. 침대 머리맡에도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떨어졌다. 고무줄로 세 번 돌려서 묶던 머리를 네 번이나 돌려야 했다. 한 주먹도 안 되는 꽁지머리를 매만졌다.
그사이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세라는 거실 베란다에서 빌라 현관을 빠져나가는 정임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엄마! 어디 가냐니까?”
정임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빨간색 점퍼를 입고 걸어가는 정임의 등에서 작은 배낭이 앙증맞게 달랑거렸다. 세라는 정임과 똑같은 옷을 입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슈퍼 아줌마를 발견했다. 정임은 며칠 전 슈퍼 아줌마와 남대문 시장에서 샀다며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그러면서 슈퍼 아줌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늘어놓았다. 두 사람이 남대문 갈치조림 식당에 갔을 때였다. 슈퍼 아줌마가 밥 생각이 없다며 뒤로 물러앉았다가 갈치조림이 나오자 참빗 모양의 가시만 발라 놓고 전부 먹어 치웠다는 거다. 한 번은 정임이 얼굴에 난 평편사마귀를 없애고 싶다고 하자 나이 들면 자연스레 생기는 거라면서 괜한 데 돈 쓰지 말라고 하더니 자신은 피부과에서 점을 싹 빼고 나타났다고도 했다. 정임은 지난 일을 회상하며 음흉한 여편네라며 침을 튀기며 말했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도 지금은 슈퍼 아줌마와 팔짱을 끼며 길 건너에 서 있는 관광버스를 타러 갔다.
식탁 위에는 정임이 새벽부터 애쓴 흔적이 가득했다. 세라는 어제 먹은 걸 게워냈더니 속이 허했다. 장조림에 넣은 메추리알을 손으로 골라 먹으며 영양제를 챙겼다. 국이 끓는 동안 밀물처럼 다가오는 어제의 기억 때문에 얼굴이 뜨거웠다. 강호가 그처럼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세라는 부인과 의사가 한 말에 잠시 이성을 잃었었다.
의사는 혈중난포자극 호르몬이 기준치 이상으로 높게 나왔다며 조기 폐경이란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무월경이 6개월 정도 지속되면 조기 폐경으로 확진하지만 3개월째 접어드니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불임이 아닌 조기폐경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노력으로도 안 되는, 임신 가능성이 완전 제로라는 뜻이었다. 겨우 스물아홉이고 결혼하고 아기를 갖고 단란한 가정을 꿈꾸는 평범한 나이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했고 노력한 만큼의 성과도 얻었다. 그런데 모두 거짓 같았다. 모든 운을 다 써버렸던 것일까. 연애, 사랑 그리고 결혼이란 달콤한 단어들이 그녀 인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기를 갖고 싶다는 바람은 여전했다. 가족은 한 번 생기면 사라지지 않는 내 것이니까.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들로 가득했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고 싶었다. 그때 강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강호에게 그렇게 말한 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폐경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마음이 조급했고 그게 강호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게 착각이었다. 어쩌자고 강호한테…….
“좋은 아침입니다.”
오수아가 버버리 체크 스카프를 매만지며 들어왔다. 뒤이어 세라가 출근해 자리에 앉았다. 김선형은 화장끼 없는 세라에게 안색이 안 좋다며 무슨 일이 있냐며 캐물었다. 김선형이 알고도 모른 척하는 무심한 태도가 미덕일 때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했다. 세라는 휴게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또각또각 굽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김선형이 세라를 위아래로 장난스레 훑었다.
“화장술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해, 안 그래? 수아 씨?”
“맞아요. 김 선배가 비비크림 바를 때 보면 정말 맞는 말 같아요.”
오수아가 손거울을 보며 히죽거렸다.
“뭐야, 수아 씨!”
김선형이 발끈했다.
“김선형, 오전까지 매출 현황 확인하는 거 잊지 마.”
세라가 김선형의 말장난이 더 이어지기 전에 잘랐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나 문자가 온 게 있는지 확인했다. 아침마다 날라 오는 날씨 정보 외에는 없었다. 강호의 SNS로 들어가 혹시 올라온 사진이나 스토리가 있는지 살폈다. 은행나무 숲에서 찍은 사진은 없었다.
세라는 퇴근길에 불 켜진 병원 앞에서 멈춰 섰다. 평소에는 불이 꺼져 있을 시간이었다. 망설이다가 정 박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아직 병원이라며 괜찮으니 들르라고 했다. 텅 빈 병원 로비는 조용하고 차가웠다. 어항에서 산소 공급 중인 물방울 소리만 간혹 들렸다. 정 박사가 알려준 대로 불이 켜진 1층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접고 세라를 반갑게 맞았다.
“몸은 좀 어때요?”
“얼마 전 부인과에서 진료받았어요. 호르몬 수치가 증가했다는데 조기 폐경이 올 수 있다고 해요.”
“흠, 그것도 증상이긴 한데.”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폐경 전에 아기를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 생리는 어때요?”
“3개월째 없어요.”
“음, 정확한 건 담당의와 확인해 봐야겠지만, 만일 임신이 가능하더라도 신중해야 해요.”
“왜요?”
“남들 다 해서 쉬워 보이지만 출산이라는 게 그렇지 않아요. 출혈도 심하고 더군다나 노화가 진행되면 아기를 낳고 돌보는 일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까요.”
세라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나라에 희귀 질환 환자가 얼마나 될 거 같아요? 그게 아마 80만 명 정도 된다지요. 이건 내가 위로하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수치로 나와 있는 거예요.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요? 무엇보다 본인 건강만 생각해요. 당장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니까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고.”
정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 한 가지 여쭤봐도 돼요?”
세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보세요.”
“전에 맡았다던 환자분은 어떻게 되셨어요?”
“흠……. 한 20년 됐으니까.”
정 박사는 잠시 멈칫했다.
“45세 되던 해가 마지막이었지. 그렇다고 세라 씨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때는 연명하는 방법을 몰랐으니까. 지금은 합병증을 잘 치료하면 오래 살 수 있어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선생님 처음 봤을 때 반신반의 했어요. 직접 진료하신 환자가 있다고 하시니 제 맘을 잘 아실 거 같아서요. 늦은 시간에 실례했어요.”
“그 환자 말이에요. 사실…….”
정박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천장을 쳐다봤다.
“내 누이였거든. 오라비가 의산데 해줄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다 지난 일이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되는군요.”
정 박사는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표정에서는 회한이 묻어났다. 세라는 정 박사의 가족사를 들춘 것 같아 미안했지만, 정 박사라면 자신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중요한 건 세라 씨 의지예요. 명심해요.”
정 박사가 사무실 불을 끄고 세라와 함께 나왔다. 조용한 복도에 세라의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정 박사는 세라의 구두를 보고 뭔가 생각이 난 듯 사무실로 돌아가 쇼핑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높은 구두 신으면 관절에 무리가요. 골다공증 수치도 낮던데 운동화나 낮은 신발을 신도록 해요.”
정 박사는 쇼핑백을 세라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세라가 쇼핑백을 받아 들고 정 박사에게 물었다. 그때 병원을 순찰 중이던 경비원이 정 박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정박사는 세라에게 먼저 가라며 경비원과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선생님…….”
세라는 멀어지는 정 박사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외근에서 돌아온 세라가 절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발목을 매만졌다.
“팀장님, 왜 그래요?”
“발목을 삐끗한 거 같아.”
채 상무와 일정에 없던 팔레트 공장에 갔었다. 채 상무가 김 사장과 점심 회동이 있다는 말만 했어도 팀원들과의 회의는 오후로 미뤘을 것이다. 그랬으면 회의 중에 채 상무를 급하게 따라 나가다 발목을 삐끗할 일도 없었다. 세라는 생각할수록 그녀의 독단적인 행동에 화가 났다. 김선형이 서랍을 뒤지더니 동전 파스를 꺼내 세라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고마워.”
세라가 의외의 표정을 짓고 발목에 붙였다.
“제가 그거 아무한테나 주지 않거든요. 그것만 알고 계세요.”
김선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렸다.
“선배, 그거 휴게실 구급함에 있던 거 아니에요?”
오수아가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김선형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샀다는 말은 안 했잖아. 뭐 문제 있어?”
“아니요. 저도 구급함에 있다고 단정 짓진 않았잖아요.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김선형은 오수아가 얄미워 죽겠는지 얼굴에 부채질했다.
“아, 그만들 해. 별것도 아닌 걸로 그래.”
세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홍천을 다녀온 이후로 강호는 연락이 없었다. 덩달아 세 명의 단체톡방도 조용했다. 퇴근 시간이 다 돼서 영지가 저녁이나 먹자며 톡을 남겼다. 해가 짧아져 저녁 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세라는 회사 근처에 있는 단골식당으로 갔다. 셋이 항상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아 삼겹살을 주문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
영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러다 겨울 오고 첫눈도 오겠지.”
세라가 테이블 위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카톡이 울리자 영지가 핸드폰을 들었다.
“강혼데, 이제야 끝났대.”
세라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희들 왜 톡을 씹어? 내가 손수 전화까지 하는 수고를 해야겠니? 설마 둘이 싸운 거야?”
“어? 아니, 싸, 싸우긴.”
세라는 괜히 메뉴판을 들추었다.
주인아저씨가 술병을 내려놓고 불판 위에 삼겹살을 올렸다.
“오늘은 총각이 없네?”
“좀 있다 올 거예요.”
영지는 강호 몫으로 수저와 젓가락을 냅킨 위에 세팅했다. 세라와 영지가 소주 한 병을 비울 때쯤 강호가 합석했다. 초췌한 얼굴에 수염까지 난 행색이었다.
“넌 왜 또 잠수 타는 건데? 백패킹이라도 갔다 왔어?”
영지가 강호에게 술잔을 건넸다.
“갑자기 출장이 잡혀서.”
“어머, 그랬어? 나 면세점에서 살 거 있었는데.”
영지가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자르려 하자 강호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세라의 잔이 비자 강호가 술잔을 채웠다. 여느 때처럼 고기를 굽고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셀프코너에 가서 반찬을 담았다. 술이 떨어지면 다시 시키고, 세라와 눈이 마주쳐도 침착하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영지의 말에 목청껏 웃기도 했다. 세라는 강호의 표정, 말투, 행동까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은근히 짜증이 났다.
영지가 화장실에 간 동안 서먹해진 공기가 두 사람 사이로 흘렀다. 강호는 술을 마시고 세라는 굳어서 딱딱해진 고기를 뒤적였다. 두 사람은 주어진 임무처럼 그것에만 열중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세라였다.
“출장 간 일은 잘됐어?”
“응. 뭐, 대충.”
“근데 왜 그렇게 얼굴이 상한 건데.”
세라가 강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넌 잘 지냈나 보네. 얼굴이 좋다.”
강호는 일부러 각진 말을 해놓고 후회했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두 사람 근처를 배회했다. 세라는 술을 마실수록 그날의 기억이 선명해져 벌거벗은 느낌이었다. 없었던 일처럼, 별 일 아닌 것처럼 지나가길 바랐지만, 오히려 자신이 그때로 돌아가 헤어 나오지 못했다. 강호가 사리분별 못하는 친구의 객기 정도로 치부했길 바랄 뿐이었다. 영지가 돌아오고 두 사람은 다시 고기를 구웠다.
김선형과 오수아는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근처 마트에 들렀다. 오수아가 딸기 한 팩을 요리조리 살피더니 계산대로 가져갔다. 김선형도 두유 한 박스를 들어 딸기 옆에 올려놓았다.
“같이 계산해 주세요.”
김선형이 카드를 꺼내 마트 직원에게 건넸다. 오수아는 뻘쭘해져서 지갑을 접었다.
“하여튼 다 그 힐 때문이라니까요. 저도 발목 인대가 늘어났었잖아요.”
오수아는 김선형이 계산하는 걸 지켜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팀장님도 동전 파스로 해결할 게 아니었네. 어쩌겠어. 알아서들 조심해야지.”
병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김선형은 로비에 있는 어항 속 열대어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5층에 내려 병실 앞에 붙은 이름을 확인했다. 오수아가 앞서더니 병실 문을 열었다.
“팀장님!”
누워있던 세라는 오수아의 등장에 깜짝 놀라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유난히 붉은 오수아의 얼굴이 겨울바람에 볼이 튼 어린아이 같았다. 손을 맞잡자 찬 기운이 세라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정임은 부산한 오수아를 쳐다보다 의자를 내주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의사가 뭐래요?”
오수아가 세라 옆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급성 염좌래. 인대가 손상됐대.”
“깁스 풀려면 이 주는 걸리겠는데요.”
김선형이 말했다.
“뭐 하러 왔어. 연말이라 바쁠 텐데.”
“팀장님 다리가 이 모양인데 와봐야죠.”
김선형이 코를 훌쩍였다.
“연말 분위기 아시잖아요. 남은 연차 쓰느라 부서별로 빈자리가 많아요.”
오수아가 거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밖에 추운가 봐. 자기 얼굴이 얼었어.”
오수아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며칠 전에 운동화를 신은 채 복사기 앞에서 채 상무와 딱 마주쳤잖아요.”
“운동화를 신고?”
김선형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정말? 그래서?”
세라가 궁금해하며 침대 머리맡에 등을 바짝 기댔다.
“평소 같으면 회사에 놀러 왔냐며 한마디 했을 텐데, 이상하게 그날은 쳐다보고 지나가는 거예요. 나중에 영업부 최 주임한테 들은 얘긴데, 간부 회의에서 팀장님 산재 얘기가 나왔데요. 아마 총무과에서 산재 신청할까 봐 채 상무한테 뭐라 한 것 같아요.”
오수아의 말을 듣고 김선형이 이어 말했다.
“하긴 사고는 기획팀에서 치고 총무과에서 산재 처리해야 하니 귀찮기도 하겠죠. 그래도 산재 신청할 거죠?”
“괜한 일로 여기저기 불려 가고 싶지 않아. 그 일 말고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돌아가자 병실 안은 조용해졌다. 정임이 스웨터 앞섶을 여미며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들어왔다. 시트를 새로 끼운 옆 침대로 올라가 다리를 쭉 폈다.
“목발 짚고 움직여도 되니까 집에 들어가서 자. 엄마 불편하잖아.”
“집에 가면 할 일도 없는데 뭘. 지금 사람이 없어서 일인실 같잖아. 괜찮아.”
“엄마도 참, 집처럼은 아니지.”
세라는 누워서 오른발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오른쪽으로 조금씩 당겨 자세를 바꿨다. 정임이 피곤했는지 코를 골았다. 세라는 정임의 얼굴을 빼꼼히 들여다봤다. 가끔 회사에서 만든 천연화장수를 만들어 갖다 주고는 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정임은 동년배보다 피부가 팽팽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껴 쓴다며 냉장고 깊숙이 넣어놨다가 유효기간을 넘겨 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세라는 그런 엄마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어떤 날은 정임이 검은콩을 저녁나절 내내 볶은 적이 있었다. 미용실에 가는 대신 집에서 머리를 염색하고는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한 달이 되기도 전에 흰머리가 눈에 띄게 올라왔다. 슈퍼 아주머니가 주전부리로 검은콩을 먹은 다음부터 흰머리가 줄었다는 말에 솔깃해했다. 그녀가 팔다 남은 콩을 챙겨주자 정임은 천연화장수를 갖다 주며 딸이 만든 거라고 생색을 냈다. 처음에 주전부리로 콩을 볶다가 어느 순간, 통통 튀는 콩알들 사이로 세라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화장품 회사의 팀장이니 외모도 신경 쓰일 테고 근래에 얼굴도 푸석해진 것 같아 뭘 해 먹이나 고민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세라는 정임이 볶은 콩을 내밀면 일부러 먹지 않았다. 자신이 먹지 않으면 아까워서라도 정임이 먹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검은콩을 먹네, 안 먹네, 아침부터 실랑이가 붙어 괜한 말다툼만 했다.
병실 창문 밖으로 고가도로가 보였다.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벽에 걸린 시계를 빠르게 비추고 사라졌다. 정임의 코 고는 소리에도 병실은 적막했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낮게 울렸다.
-자니?
강호였다.
-지금 퇴근하는데, 들릴까?
세라는 시계를 보고 망설였다.
-벌써 열 시야. 집으로 가.
-너무 늦었나?
-그날 일은 잊어버려. 내가 괜한 말을 했어.
그 후 강호의 답신은 없었다. 세라는 카톡 창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도 사라진 어두운 시간이었다. 새벽에 간호사가 수액 양을 확인하고 나갔다. 세라는 문 닫는 소리에 가만히 눈을 떴다. 세라의 핸드폰에 파란 불빛이 다시 깜박였다.
-나 할 말이 있어…….
몸을 뒤척여 어두운 창밖을 바라봤다. 강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시간이 늦었다고 핑계를 댔지만, 궁금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커튼을 젖히자 아침 햇살이 병실에 드리운 그늘을 밀어냈다. 배식 담당자가 식판을 정임에게 건넸다. 정임이 침대 테이블 위에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세라는 병실에 비치된 잡지로 눈이 갔다. ‘천지인의’라는 잡지 이름이 왠지 의학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내용을 훑다가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여진 페이지를 들췄다. 세라는 깜짝 놀랐다. 정 박사의 인터뷰 기사가 건강한 삶이라는 소제목으로 두 페이지에 걸쳐 실려있었다. 세라는 단숨에 읽고 다음 기사에 시선을 멈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엄마인 일리에스쿠 씨’라는 해외 기사였다.
곱게 화장한 할머니와 어린 여자아이가 포옹하는 사진을 커버스토리로 담고 있었다. 70세의 한 여성이 인공수정으로 딸을 낳았고 아이가 7살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해맑은 모녀의 사진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기사 말미에는 국내의 난자 냉동보관 시술에 대한 글이 소개되었다. 기사를 훔쳐보던 정임이 과일을 깎으며 다 늙어서 주책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세라는 일리에스쿠 씨의 주름 속에 피어난 웃음과 뽀송한 어린 딸의 콧잔등으로 퍼지는 웃음도 눈여겨봤다. 엄마의 말처럼 주책스러워 보이지도 않았고 아이에게 못 할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엄마와 세상에 둘도 없는 딸, 가족일 뿐이었다.
병실에 할머니 환자 한 명이 휠체어를 타고 입실했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커다란 짐 가방을 침대 위로 철퍼덕 올렸다. 묵직한 가방을 보니 하루 이틀의 살림이 아니었다. 정임은 남자가 묻기도 전에 침상을 올리고 내리는 방법과 개인 수납장의 비밀번호 설정하는 법을 알려줬다. 냉장고는 한 칸만 사용하라며 팔짱을 끼고 지켜 섰다. 남자가 그대로 따라 하자 흡족해했다.
회진 시간에 간호사가 들어와 침대 머리맡에 환자 이름과 나이가 적힌 이름표를 붙였다. 김예분/여/72세. 의사가 할머니의 무릎을 여기저기 만져 보더니 내일 오전에 수술할 거라며 금식을 당부했다.
“내가 산도 잘 타고 그랬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나 원 참…….”
할머니가 볼멘소리를 했다. 자신이 의정부 산녀라 불렸고 3년 동안 백 대 명산을 돌았다고 했다. 산을 타다 산삼을 캔 일이며 산악 구조대에 구조된 이야기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어느새 근심은 사라지고 홍조 띤 얼굴은 자기 부심이 가득했다. 정임은 할머니가 산삼을 캤다는 말에 빠져들었고,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세라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정 박사가 의심할 때도, 병명을 들었을 때도, 곧 폐경이 될 거라는 말도 남의 일처럼 거리를 두었다. 보지 않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승진하고, 순조로웠던 직장생활도 모두 공짜였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는 독감으로 자주 입원했었고 열 번이 넘는 면접 끝에 회사를 들어갔다. 잦은 야근이며 시제품 테스트로 팔뚝은 성할 날이 없었다. 그런 날들이 익숙해져 겨우 작은 평안에 이르렀는데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하루하루가 음습한 그늘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정 박사가 세라의 병실에 들렀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정임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정 박사는 가볍게 묵례하고 세라를 살폈다.
“오늘 퇴원하지요? 무리하지 말고 골다공증 약도 처방전에 넣어놨으니 함께 복용하도록 해요.”
정 박사가 병실을 나가자 정임이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뭐? 네가 골다공증이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예방 차원에서 먹으라고.”
세라는 얼버무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엄마, 저 선생님 잘 알아?”
“저 양반도 사연이 많더라. 미국 병원에 있었는데 여동생이 무슨 병으로 죽었대. 근데 그걸 못 고치고, 자기가 의사인데 그 한이 오죽하겠니.”
정임은 슈퍼 아주머니한테 들은 얘기라며 가져온 세안용품을 챙겼다.
“누이가 가고 나서 의사를 그만두고 노숙자 생활했다는 얘기도 있고. 몰라, 뭐가 진짠지. 하여튼 한국 와서 정신 차리고 개원한 거라고 하더라. 근데 슈퍼 여편네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세라는 침대 밑에 가지런히 놓인 흰색 컴포트화를 신었다. 얼마 전 정 박사가 준 쇼핑백을 열었을 때 상자 안에는 바닥이 실리콘으로 된 신발과 메모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간호사들이 종일 신어도 발이 편하다고 하니 신어봐요. 신으면 관절에 도움이 될 거예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식구가 단출하다고 해도 며칠씩 집을 비운 티는 어김없이 났다. 냉장고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화장수가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세라는 모조리 꺼내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다음날, 세라는 일찍 출근했다. 책상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인쇄물에서 올라오는 활자의 잉크 냄새, 휴게실에서 풍기는 드립 커피 향,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팀원들의 얼굴 모두 그대로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묻어 있는 회색 카펫까지 모두 반가웠다. 책상 위에는 개인 우편물과 홍보용 잡지들이 밀봉된 채 쌓여있었다. 채 상무가 인터폰으로 호출했다. 쉬는 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에 대해 몇 가지 지시사항을 내렸다. 세라가 방을 나가려고 하자 불러 세웠다.
“앞으로 신발은 자유롭게 신도록 팀원들에게 전달하고, 회사 내에서 어떤 사고도 용납하지 않으니 주의시키도록 해요.”
채 상무는 세라의 흰색 컴포트화에 눈길을 두다가 이내 거뒀다.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세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한 가지, 슬리퍼는 절대 안 돼요.”
채 상무는 억울한 듯 몸을 약간 떨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마지막 보루를 지키려는 결기가 느껴졌다.
퇴근 시간이 되자 가느다란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은회색 SUV 차량이 서서히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강호는 차 안에서 빌딩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세라가 보였다. 긴 코트에 운동화를 신고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몸을 한 컷 웅크려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강호가 짧게 클랙슨을 울렸다. 세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정류장으로 계속 걸었다. 강호가 창문을 내리고 세라를 불렀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세라가 강호를 발견하고 차에 탔다.
“거래처 갔다 오는 길인데 바로 퇴근하라고 해서. 다리는 좀 어때. 불편하지 않아?”
“많이 좋아졌어.”
세라는 옷에 달라붙은 눈송이를 털며 안전벨트를 매었다.
“당분간 출근 같이할까? 퇴근은 일정치 않으니까.”
“아니. 괜찮아. 아침에 많이 막혀.”
“좀 일찍 나오면 되는데.”
“애쓰지 않아도 돼.”
강호는 애쓴다는 말이 진심을 호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발이 굵어져 차량의 흐름이 더뎌졌다. 세라는 생각이 그물처럼 얽혀버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강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항상 내장탕만 먹는다던 부장과 점심은 뭘 먹었는지, 연차는 몇 개나 남았는지, 얼마 전 주문한 캠핑용 화목난로는 받았는지, 무슨 얘기라도 이 침묵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세라는 라디오를 켜고 볼륨을 서서히 올렸다.
강호는 전방을 주시한 채 운전에만 열중했다. 어느새 세라의 집 근처 공원에 다다랐다.
“영지 같으면 퇴근도 시켜달라고 했을 거야.”
강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나지막했다.
“무슨 뜻이야?”
세라가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좀 편하게 가면 안 되냐고.”
“괜찮다고 했잖아.”
“맘 좀 편하게 해 주면 안 돼?”
“네 맘이 왜 그렇게 불편한데. 너 때문에 다친 것도 아닌데.”
“그날 네가 한 말, 쉽게 지나칠 일은 아니잖아.”
“너 정말, 나 비참하게 만들래?”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호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그렇게 말하는 게 제정신이야?”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아니, 아니어도 상관없어. 남자들이 모두 너 같지는 않으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강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라의 얼굴이 폭발하는 분화구처럼 붉게 타올랐다. 세라는 차에서 내려 문을 세차게 닫았다. 여전히 한쪽 발을 절뚝거렸다. 강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따라 나가 다시 차에 태웠다. 그 후로 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눈발이 더 거세졌다. 노래마저 사라진 차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스치듯 들렸다.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우산이 서로 부대꼈다. 차도는 갑작스레 거세진 눈발만큼이나 혼잡스러웠다. 시내를 벗어나니 소복이 내린 흰 겨울이 고스란히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한참을 더 가서 차가 멈춘 곳은 외곽에 있는 한 모텔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