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너를 닮은 아이

by 조선희



세라는 샤워하다 말고 수증기로 뿌옇게 된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한참 동안 거울 속 눈, 코, 입을 찬찬히 훑어봤다. 영지가 알려준 대학 병원에서도 같은 진단명이 나왔다. 오진일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제 몸에 이상 반응이나 증상이 있는지 살피는 것은 세라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의사는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겪게 될 여러 증상에 대해 설명했다. 외모에 변화가 올 것이고 수반되는 증상들로 스트레스가 심할 거라고 했다. 대인기피증이 생기지 않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세라는 미친 듯이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뒤졌다. 오진을 경험한 환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예외적 사례라 해도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매시간 새롭게 올라오는 무수한 정보 속에도 그 병은 술래잡기하듯 꼭꼭 숨어있었다.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의사가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고 했다. 살면서 소액 복권 당첨은 물론 회사 야유회에서 제비 뽑는 운조차 없던 세라였다. 그런데 백만분의 일의 확률을 뚫는 운이 생기다니.


인터넷에서 본 환자들은 겨울로 접어든 메마른 나무 같았다. 움푹 들어간 눈덩이와 볼, 깊어진 주름 사이로 퀭한 눈동자가 건재한 그들의 정신과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커뮤니티가 있다고 해도 그들을 보며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세라는 노트북을 닫고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런 증상 없이 몇 주를 보내고 또 며칠 밤은 악몽에 시달렸다. 잠을 못 잔 것 외에는 육체적으로 불편한 구석도 없었다. 회사에서 일하거나 친구들과 수다와 술로 시간을 보낼 때는 환자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그날의 충격과 공포는 무장 해제되어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서늘한 바람에 겉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갈색 반점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쟁기질하는 농부의 거칠고 두꺼운 손바닥처럼 조금씩 딱딱해져 갔다. 의사는 처방받은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도 관성적으로 진행되는 경직화를 멈추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세라는 여차하면 회사는 그만두면 되지만 정임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희소병에 걸렸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임이 의사를 찾아가 멱살잡이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더 입이 다물어졌다. 불편한 얘기를 대신해 줄 다른 가족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혼자서 위로와 절망을 반복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진 않았겠지.


어릴 적 세라는 우리는 왜 다른 가족이 없냐고 물었다. 정임은 당황스러워하며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사진 속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가족의 존재를 설명하고 증명해 보였다. 세라는 진짜 가족을 보고 싶었다. 항상 같은 얼굴로 같은 옷을 입고 판에 박힌 그런 모습이 아닌, 말도 하고 화도 내고 때가 되면 모여 함께 밥 먹을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가족을 원했다. 가족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을 때 아빠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때마다 피 묻은 손을 침대 밖으로 힘없이 떨어뜨리던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은 온종일 장맛비가 퍼부었었다. 밤늦은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정임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에 잡히는 대로 우산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엄마, 어디가?”


마루에 앉아 리코더를 불고 있던 어린 세라가 뛰어나가는 정임을 보고 따라나섰다.


정임은 슬리퍼를 신고 정신이 반은 나간 듯한 표정으로 돌아와 세라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산을 손에 들고 펴지도 않았다. 세라는 영문도 모른 채 한 손에 리코더를 들고 덩달아 빗속을 달렸다. 감기라도 걸릴까 봐 비 오는 날이면 우비에 우산까지 챙겨주던 정임이 처음으로 비를 맞게 한 날이었다. 아빠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던 길이란 것도 알지 못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정임이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들고 허겁지겁 아빠 이름을 댔다. 간호사가 피가 잔뜩 묻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출근할 때 아빠는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명한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빠의 파란색 티셔츠는 걸레 조각처럼 앞섶이 갈라져 피에 물들어 있었다. 정임이 붉은 옷 조각을 들고 울부짖었다. 세라는 아빠의 붉은 소매단을 움켜쥐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화난 듯 소리쳤다.


“아빠는 파란 옷을 입었단 말이야! 이건 아빠가 아니라고!”






은회색 SUV가 병원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강호는 기어 레버를 P에 넣고 차창 밖을 내다봤다. 세라가 화단 턱에 앉아 있었다.


“유세라!”

세라는 이어폰을 끼고 콘크리트 바닥에 코가 닿을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강호는 차에서 내려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세라의 시야에 흰색 나이키 운동화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어폰을 둘둘 말아 가방 속에 집어넣고 강호의 시선을 피하며 차에 탔다. 침묵시위라도 하듯 창밖만 멀거니 쳐다봤다. 강호는 더 묻지 않고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시간 괜찮지? 드라이브 갈래?”

“……그러든가.”


세라는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평일이면 버스와 승용차로 혼잡했던 도로는 한산했고 인도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는 연한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세라가 창 쪽으로 기대어 잠이 들었다.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회색 펜스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졌다. 얼마 후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하이패스 소리에 세라가 눈을 떴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여기가 어디야? 배고프다.”

세라는 내비게이션으로 몸을 기울여 목적지를 봤다.

“아까 병원은 왜 갔어? 눈이 더 안 좋아졌어?”

강호가 세라를 곁눈질했다.

“눈? 어, 안과에 갔었는데.”

세라는 머뭇댔다. 차마 산부인과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의사가 뭐라는데?”

세라는 대답 대신 창문을 반쯤 내렸다. 찬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흐트러뜨렸다.

“날은 좋은데, 갈 데는 없고, 노안이라고 하고, 좀 짜증이 났어."

세라는 얼버무리며 머릿속을 맴도는 정 박사의 말을 다시 집어넣었다.


강호는 홍천 이정표가 보이고 얼마 안 가서 은행나무 숲길로 들어가는 자동차 행렬에 합류했다. 그곳은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아는 사람만 찾는 여행지였다. 이제 가을이면 사람도 차도 북적이는 명소가 되었다. 강호는 행렬을 빠져나와 민물매운탕 간판을 내건 식당에 주차했다. 식당 안은 손님들로 붐볐고 운 좋게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매운탕을 주문하니 한상차림이 푸짐하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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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아주머니는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메기, 빠가사리, 피라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고기 이름을 알려줬다. 사람들이 얼마나 물어봤던지 이골이 난 것처럼 보였다. 아주머니가 국자로 휘젓자 탕 속에 잠겨 있던 작은 물고기의 까만 눈알이 국물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세라는 징그러운 생각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주머니가 다른 테이블로 가자 강호는 국자를 들어 생선을 국물 속으로 가라앉혔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 뚜껑이 들썩거렸다. 매콤하고 달큼한 냄새만으로도 허기진 배가 채워졌다.


“다른 거 시켜줄까?”

“아니. 그냥 먹을래, 나 잘 먹어야 해.”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정 박사가 한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한 그릇을 더 시켜 강호와 나눴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꾸역꾸역 입속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강호가 천천히 먹으라며 물 잔을 건넸다. 세라는 입맛이 없어도 끼니를 꼬박꼬박 챙겼다. 정 박사는 긴 싸움이 될 거라고 했다. 어쩌면 끝없는 모래사막을 맨발로 걸어가는 외롭고 힘든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 잘 먹고 잘 자고 운동도 꾸준히 해야 한다. 규칙적인 식사와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합병증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을, 밥을 삼킬 때마다 떠올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은행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자동차가 줄어들었다. 인근 길가에 주차하고 두 사람은 무리에 섞여 천천히 걸었다. 지천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은행나무 잎이 사방에 깔려 흙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강호는 깃발을 든 중국 관광객들이 옆으로 지나가자 세라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농장의 입구에 있는 표지판 앞에 섰다. 지병이 있던 아내를 위해 농장 주인이 은행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했다. 바람이 불어 은행잎이 봄꽃처럼 날렸다. 노란 나비가 나무에서 피어났고 노란 눈송이가 소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온통 노란 세상을 등지고 카메라 렌즈를 향해 웃었고 어떤 커플은 서로 부둥켜안고 셀카를 찍었다. 노부모를 모시고 온 중년 부부도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을 찾아 돗자리를 폈다. 세라는 눈이 시큰거렸다. 떨어진 낙엽의 부유물이 눈 속에 들어간 것 같았다. 강호가 보기 전에 얼른 눈물을 훔쳤다.


어린아이가 은행잎이 한가득 쌓여있는 땅바닥을 콩콩 뛰었다. 아이의 아빠가 공룡 소리를 내며 뒤에서 으르렁대며 쫓아다녔다. 아이는 자지러지듯 도망치며 좋아했다. 아이의 아빠는 창피함도 무릅쓰고 괴성을 지르며 해맑은 얼굴로 아이만을 쫓았다. 세라는 아이와 같이 맨바닥을 콩콩 뛰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에 그랬듯이 아빠가 달려와 어깨를 와락 잡을 것만 같았다. 퇴근길에 치킨을 사 들고 두 팔 벌려 안아주던 아빠의 모습이 날리는 은행잎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이가 뒤따라오던 아빠에게 붙들려 배꼽을 보이며 까르르 웃었다.

강호가 사진을 찍자며 핸드폰을 꺼내 세라 옆에 가까이 붙어 섰다. 세라는 카메라를 보고 웃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를 보고 있었다. ‘나도 아이를 갖고 싶어…….’


해넘이가 시작되고 어두워진 국도는 모든 사물을 삼켜버릴 듯이 짙어졌다. 도로 위 자동차의 붉은빛이 선명해졌다. 단출한 가족이어서 형제자매가 많은 친구가 늘 부러웠다. 결혼하면 아이를 많이 낳아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싶은 바람도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돌연변이 유전자는 소박한 꿈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 삶의 구석까지 마수를 뻗쳤다. 일상적인 움직임조차 의욕이 필요했다. 런던베이글뮤지엄 오픈런에 성공하고 인근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보고, 집에 가는 길에 생초콜릿을 사가도 텅 빈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는 국도변에는 심심치 않게 모텔의 네온사인이 보였다. 교통방송에서 흐르는 클래식이 잠시 끊겼다. 창밖을 보던 세라가 말했다.


“강호야.”

“응?”

“아기를 갖고 싶어.”

갑자기 그랜저가 차선을 변경해 끼어들었다. 강호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클랙슨을 눌렀다. 그랜저는 비상등을 몇 번 깜박이더니 붉은 불빛만 희미하게 남겨놓고 멀어져 갔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나도 아기를 갖고 싶어. 너를 닮은 아이면 어떨까.”

강호가 국도변에 차를 세웠다.

“지금 뭐라고 한…….”

“진심이야.”

세라는 강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미쳤다고 해도 할 말 없어.”

“무슨 말이야. 도대체.”

강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냥 더 늦기 전에, 너 좀 빌리면 안 될까?”

“먼저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게 순서 아니야?”

“넌 나랑 사귈 마음이 없잖아.”

세라가 고개를 떨궜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마음이 있었으면 그때 우리가 사귀었겠지.”


강호가 쉼터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피지 않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세라는 꿈쩍도 안 하고 차 안에 머물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분풀이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면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막과 침묵이 휩싸인 공기는 인화성이 강한 물건이 옆에만 있어도 불 붇을 것 것 같았다. 세라는 속이 울렁거렸다. 낮에 먹은 음식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차가 속도를 낼수록 속이 메슥거렸다. 결국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강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강호…… 우, 우욱.”


세라는 강호를 부르려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을 떼면 시트 위에 모두 게워낼 것 같았다. 강호가 창백해진 세라의 얼굴을 보고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래? 속이 안 좋아?”

강호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세라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먹은 걸 토했다. 강호가 세라의 등을 두드렸다. 토사물이 사방으로 흩어져 강호의 흰 운동화에 튀었다.


“너 오늘 진짜!”


새벽 한 시에 알람이 울렸다. 10분 후에 토트넘과 레알 마드리드 축구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강호는 알람 해제 버튼을 눌렀다. 축구 경기를 볼 생각이 없어졌다. 잠도 오질 않았다. 세라가 아기를 낳고 싶다고 했을 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강호는 생각할수록 황당한 생각에 뒤척였다.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에 거래처세림물산에 전화한다는 걸 세라에게 잘못 걸었다. 상대방의 낮은 목소리에 거래처가 아닌 세라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안부만 묻고 금방 끊을 요량으로 어디냐고 물었다. 축 처진 목소리를 들으니 거래처는 잊고 드라이브나 가자는 말이 서슴없이 나와버렸다. 모든 게 즉흥적이었다. 세라는 종일 다른 생각에 잠겨 함께 있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가끔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강호는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강호와 사촌 동생 시호는 둘 다 물을 좋아해서 방학이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함께 수영장을 다녔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방학에 시호가 가평의 한 계곡에서 물놀이하다가 익사했다. 수심이 깊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 시호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 외숙모는 현장에서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들의 장례식과 아내의 입원을 감내했던 외삼촌은 이를 악물며 담담하게 처신했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며 아내를 다독였다. 장례식장에서 시호를 보내면서 외삼촌은 말초 신경만 자극해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시호의 영정을 보고 한마디도 못하고 끝내 터질 듯한 눈빛으로 악에 받쳐 울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세라의 눈빛이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건 세라의 화법이 아니었다. 장난기가 제거된 건조한 말들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농담이었다면, 그렇게 발끈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대했어야 했는데 당황한 끝에 화를 내고 말았다. 결혼의 순서를 운운한 건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 언젠가 결혼하겠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학 때는 세라를 마음에 두고서 사랑과 우정이라는 어쭙잖은 선에서 헤매기만 했었다. 그러는 동안 세라와 영지는 습관적으로 묶여있는 하나의 덩어리라고 생각했다. 뒤척일 때마다 세라의 말은 모두 물음을 던졌다. 그때 사귀었을 거란 말은 더욱 그랬다. 내게 그런 말을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기억은 없다. 마치 세라를 거절했다는 의미처럼 들려 강호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니 억울한 생각마저 든다. 베개 밑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호야 오빠, 자?


강호는 카톡을 확인하고 모로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카톡이 다시 왔다. 자기가 아쉬울 때면 오빠라고 부르는 영지였다. 이럴 때면 가족 같은 친구라는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오빠야, 어디냐 아. 나 데리렬와.

강호는 이불 킥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강한 비트가 방안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 영지! 또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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