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백만분의 일의 확률

by 조선희


세라는 책상 위에 쌓인 우편물 더미에서 누런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발신처에 경신대학 주소가 찍혀 있었다.

그제야 두 달 전쯤 모교에서 했던 인터뷰가 생각났다. 기획 시리즈로 졸업생의 사회진출 성공기를 연재하는데 세라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성공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웠고 새 브랜드 론칭때문에 바빴기에 고사했었다. 영지가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도 아니고 인터뷰가 하나의 이력이 될 거라며 부추기는 바람에 인터뷰를 응했다. 이번 달 회지에 실린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화제의 인물 챕터 아래 ‘경신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사진과 기사가 빼곡했다. 뉴트럴 컬러의 정장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기획자가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했을 뿐인데 세라는 자신의 또 다른 페르소나를 보는 것 같아 어색하고 몸이 근질거렸다. 성공한 동문을 소개하는 취지에 맞게 세라는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경신대학 출신이 업계 1위인 엘라화장품의 브랜드 매니저로 성공했다면 광고 효과는 기대할 만했다. 인터뷰했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똑똑


세라는 회전의자를 천천히 돌려 앉았다. 회색 카펫 위로 빨간색 에나멜 하이힐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채 상무가 팔짱을 끼고 세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라는 급하게 동문지를 감추고 책상 밑에 벗어놓은 하이힐로 갈아 신었다.


“론칭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

“네. 상무님.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라가 고개를 살짝 숙였을 때 채 상무의 구두에 생로랑의 금장 로고가 반짝였다.


부서는 가을에 출시할 새로운 아이섀도를 기획 중이었다. 아이섀도는 같은 계열의 색상이라도 펄이나 색의 농도에 따라 발색이 달랐다. 채 상무가 주시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테스트를 통과 못 하면 판매 일정에 차질이 생겨 세라는 예민한 상태였다. 세라는 채 상무가 갑자기 자리에 오면 긴장한 나머지 두통을 느꼈다. 발색 테스트를 하느라 팔뚝이 남아나질 않아도, 김선형이 피부가 성한 날이 없다고 투덜거려도, 그런 두통보다는 나았다. 세라는 오후 회의를 끝내고 테스트한 부위를 클렌징폼으로 씻었다. 클렌징을 해도 말끔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손을 씻고 있는 오수아를 흘끔 쳐다봤다. 그녀의 팔뚝은 이미 뽀얀 살구색으로 돌아왔다. 세라는 클렌징을 한 자리가 벌겋게 붓자 다른 팀원이 눈치채지 않게 연고를 넓게 펴 발랐다. 예전에 없던 증상이었다.


채 상무는 화장품회사의 이미지에 맞는 외모와 품위를 지키기 위해 직원들에게 지속적인 관리를 요구했다. 그래야 자사 제품이 신뢰를 얻는다는 논리였다. 그녀는 외적인 스타일에서도 다른 임원들과 달랐다. 현란한 주얼리로 치장하기보다 빨간색 립스틱을 고수했고 립스틱은 매일 바뀌는 원색의 하이힐과 맞물려 강렬한 포스를 자아냈다. 복장도 유별나게 챙겼다.


오수아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니트와 레깅스를 입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였다. 채 상무는 한 손에 드립 커피를 들고 오수아를 위아래로 쳐다봤다. 코즈모폴리턴은 도움이 되냐고 물었다. 회사에서 뷰티트렌드를 참고하라고 직원들에게 정기 구독해 주는 잡지 중 하나였다. 그녀는 오수아의 옷차림을 보고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오수아는 채 상무의 시선을 느끼며 보풀이 올라온 소맷자락을 뒤로 숨겼다.


며칠 후 테스트는 별 탈 없이 통과했다. 세라는 팀원들과 자축하기 위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채 상무가 거래처와 선약으로 불참한다는 희소식을 전해왔다. 그 편에 법인카드라도 보내면 좋았겠지만, 카드는커녕 아침 회의에 늦지 말라는 당부만 돌아왔다. 세라와 팀원들은 회사 근처 삼겹살집으로 갔다. 단골 고깃집은 전화 한 통이면 좌석 예약부터 세팅까지 알아서 해주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세라의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화로에 술을 엎질러 식당 안은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남자는 술에 취한 듯 제 자리에 서서 비틀거렸다. 사람들의 찌푸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일행 중 한 명이 일어서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세라는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마시고 속이 메스꺼웠다. 김선형이 술잔을 다시 돌리며 막내에게 눈치를 줬다. 막내가 수줍게 고기 한 점을 들고 세라 옆으로 다가왔다.


“저, 팀장님. 이거…….”

세라는 막내의 행동에 김선형을 쏘아봤다.

“김선형! 이런 거 시키지 말랬지.”


김선형은 막내의 애정이라며 너스레를 떨다가 세라의 표정이 굳어있자 고기를 대신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급히 화제를 바꿨다. 채 상무는 술자리에 올라 오는 단골 메뉴였지만, 그녀가 하이힐 페티시즘 같다는 말은 이번에 처음 나왔다. 자기가 하이힐을 좋아한다고 부서원들까지 하이힐을 강요하는 건 독선이라고, 김선형이 여자를 대변하는 건 의외였다. 채 상무가 남자라면 이해하겠지만, 같은 여자끼리 너무하다는 말이었다. 여자 팀원들은 그럼 그렇지,라는 시선으로 그를 째려봤다.


“상무님이 남자였다면, 하이힐을 신으라는 건 괜찮다는 거예요?”

오수아가 김선형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여자보다 남자가 그러는 게 자연스럽다는 거지…….”

김선형이 말끝을 흐렸다. 세라는 본전도 못 찾는 그를 보고 혀를 찼다.


논쟁이 끝나갈 때쯤 세라는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취한 건 피곤한 육체뿐만은 아니었다. 팀원들의 얼굴이 볼록렌즈로 잡아당긴 듯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정신을 차리려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렸다. 사람들 얼굴이 멀쩡하게 보이다가도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흐려졌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꺼풀에 힘을 주고 똑바로 떴다. 김선형이 세라에게 벌써 취한 거냐며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세라가 힘없이 쓰러졌다.


“어, 어…… 왜 그래요? 팀장님!”


김선형이 세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팀원들이 몰려들어 세라를 감쌌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모두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 너무 피곤했나 봐.”

세라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팀원들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자, 주목!”


김선형은 입에 지퍼를 닫는 손동작을 했다. 평판을 중시하는 채 상무가 알게 되면 좋을 게 없었다. 애초부터 직원들의 입을 막자는 얘기였다. 세라는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을 먼저 빠져나왔다.


버스에는 세 명의 손님만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 창밖만 내다봤고 버스도 깊은 적막 속에서 엔진 소리만 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만 바쁘게 도로를 걸었다. 하나 슈퍼의 덜컹거리는 가게 문 사이로 불빛이 삐져나왔다. 깜박거리는 가로등이 어두운 밤하늘에 엉켜버린 전선줄 사이로 희미하게 비쳤다. 세라는 슈퍼에 들러 맥주 두 캔을 샀다. 걸을 때마다 비닐봉지에 담긴 맥주가 달랑거렸다. 한적한 골목길에 힘겨운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현관 도어록 열리는 소리에 정임이 자다 깬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늦었네. 밥은 먹었니?”

“깼어? 응. 회식해서 배불러.”

정임은 회식이라고 해도 항상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세라는 엄마와 밥을 빼고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입이 짧은 탓에 잠재적으로 자신의 레이더를 벗어나면 세라가 굶는다고 여기는 듯했다.다옷을 갈아입다가 낮에 연고를 바른 부위를 들여다봤다. 붓기는 가라앉았고 감쪽같이 제 살로 돌아왔다. 머리를 올려 묶고 욕실로 들어갔다. 졸린 눈을 치켜떴다. 거울을 보다가 다리의 힘이 맥없이 풀렸다. 바닥에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쿵!


정임이 욕실에서 빗겨 나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문을 열어젖혔다. 세라가 욕실 바닥에 한쪽 무릎이 닿은 채 엎드려 있었다. 실수로 미끄러졌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정임은 못내 의심쩍은 얼굴로 문을 닫았다. 세라는 욕조에 걸터앉았다. 술기운에 몸을 못 가누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실수로 넘어진 것도 아니었다. 넘어지는 순간 필라멘트가 끊어진 것처럼 온몸이 두 개로 쪼개지는 느낌이었다. 뾰족한 무릎에 동그란 멍이 생겼다. 발갛게 부어오른 무릎을 보고 있으니 문득, 등에 난 점이 생각났다.


세라는 퇴근하고 카페 월든으로 갔다. 강호와 영지가 항상 앉던 자리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라가 가방을 툭 내려놓고 쓰러지듯 앉았다.


“아, 피곤해.”

“론칭 끝났다며, 아직도 바빠?”

영지가 자리를 옆으로 살짝 옮기며 말했다.

“휴, 말도 마. 보고서도 작성하다 그냥 뛰쳐나왔어.”

“뭐 마실래?”

강호가 물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라가 소파 등받이 깊숙이 기댔다. 천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달린 작은 조명들이 끝내지 못한 보고서의 목차처럼 보였다.

“이게 뭐 게?”

영지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손에 들고 흔들었다. K 워터파크 무료 이용권 세 장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영지는 종종 무료 쿠폰을 가져왔는데 회사 대표 앞으로 온 초대권이나 관람권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비서들 차지가 될 때면 보람을 느낀다고 자랑했다. 강호가 픽업 대에서 주문한 커피를 가져왔다.


“간 김에 속초도 들러서 바다도 보고 올까. 너도 일 때문에 스트레스 많았잖아.”

강호가 세라 앞에 커피를 놓으며 말했다.

“나도 티켓 어렵게 가져왔거든. 세 장이나 챙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영지가 삐죽거렸다.

“알지, 우리 대학 졸업한 후로 영지 덕에 무료 관람은 원 없이 하고 있잖니.”

세라가 웃으며 영지를 달랬다.






워터파크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막바지 물놀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인공 풀은 사람들의 머리가 파란 물빛을 까맣게 덮을 정도로 바글거렸다. 선베드에 누워있는 비키니 여자들은 마지막 여름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강호와 일행이 여자들 앞을 지나갔다. 홀터넥 비키니 여자가 강호를 쳐다보며 옆에 있던 핫팬츠 여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영지는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다. 강호에게 바짝 다가가 팔짱을 꼈다.


“왜 그래?”

강호는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는 영지에게서 몸을 피하며 말했다.

“같이 가자고.”

영지는 뒤돌아 세라를 보고 눈을 찡긋 감았다. 그리고 여자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은근히 즐겼다. 영지의 옆 가슴이 강호의 몸에 붙었다 떨어졌다. 영지의 행동에 당황한 건 힐끔거리던 여자들이 아니라 뒤따라오던 세라였다.


사람이 붐빌 시간을 피해 일찍 샤워장에 들어갔다. 세라가 샤워를 끝내고 속옷을 입고 있을 때였다. 영지가 세라의 등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너 여기 점 있었어?”

"어디?”

영지는 세라의 등에 난 반점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큰 점이 있네, 예전에 못 본 것 같은데.”

“아, 동전만 한 거?”

“동전은 무슨, 손바닥만 한데."

"손바닥만 하다고?”

영지는 등에 난 점을 잘 볼 수 있게 손거울을 갖다 댔다.


세라는 속초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갈색 점이 떠다녔다. 내비게이션이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고 안내했다. 어둠이 바깥 풍경을 삼켜버렸지만, 간혹 들리는 파도 소리가 바다가 눈앞에 있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 방파제에 파도의 하얀 포말이 부서질때면 바다의 실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세라는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티셔츠를 벗어 등에 거울을 들이댔다. 종이 위에 엎질러진 커피처럼 피부에 얼룩진 갈색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세계 지도의 한구석에 있는 작은 섬나라 같았다. 살아있는 생명처럼 꿈틀대며 조금씩 커졌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강호가 바닷가에 가자며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세라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를 따라나섰다. 일박이라 옷을 안 챙겼다던 영지는 하얀색 프릴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화장기 없이 핑크빛 립스틱을 옅게 바른 얼굴은 금방 샤워를 마친 것 같았다. 세라는 건어물 가게 유리창에 세 사람이 비췄을 때 블랙진에 맨투맨티셔츠를 걸친 자신이 머쓱했다. 삽시간에 바닷바람이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영지의 원피스 자락도 흰 깃발처럼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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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가 막 지났다. 바다는 도시보다 깊고 어두운 시간으로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집어등 불빛이 검은 바다에 걸어놓은 꼬마전구처럼 빛났다. 몇몇 사람이 모래사장에서 폭죽을 터트리자 작은 불꽃이 밤하늘에 떴다가 여러 조각으로 퍼졌다. 경계가 사라진 하늘과 바다, 그 사이로 파도가 들썩거리다 비릿한 냄새를 뿜고 달아났다. 강호가 먼바다를 응시하더니 방파제에 올라섰다. 묵직하고 둔탁한 바람이 주위를 돌며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강호의 얼굴이 어둠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세라는 영지의 하얀 원피스 자락이 들썩일 때마다 신경쓰였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이 크게 휘돌았고 원피스가 펄럭거렸다. 강호가 보다 못해 방파제에서 내려와 겉옷을 벗어 영지의 허리에 묶었다. 세라는 마음속에 뭔지 모를 불편함이 모래알처럼 밟혔다. 올올이 흩어진 머리카락에 진득한 바다 냄새가 배었고 끈적임은 덤으로 따라왔다. 강호의 팔을 꽉 붙들고 있는 영지의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 붉게 보였다. 세라는 먼바다를 바라봤다. 모래사장에서 불꽃놀이를 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방파제 위로 올라갔다. 편의점에 다녀온 강호가 맥주와 안주 몇 가지를 벤치에 내려놓았다. 오징어 버터구이를 잘게 찢어 비닐 포장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맥주 캔을 따서 세라 쪽으로 밀었다. 영지가 목말라하며 맥주를 가로챘다. 바람이 거세졌다. 방파제 위에서 불꽃놀이를 하던 사람들도 하얀 포말이 모래사장까지 넘나들자 하나둘 자리를 떴다.


아침 뉴스에서 태풍 소식을 전했다. 시간을 앞당겨 서울로 출발하기로 했다. 강호가 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닭강정이 유명하다며 시장에 들르자고 했다. 영지는 어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라는 강호가 내장탕과 선짓국만 찾는 부장과 점심 먹는 게 곤욕이라고 투덜대던 게 생각났다. 평소 기회비용을 운운하며 맛집을 찾아다니는 건 시간 낭비라고까지 말하던 그가 굳이 차를 돌려서 맛집을 찾아가는 게 의아했다.


상행선에 있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등이 줄줄이 들어왔다. 영지는 뒷좌석에서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다. 세라는 하품하는 강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다음 휴게소에서 교대할까?”

“괜찮아. 근데 안과는 갔다 왔어?”

“응. 근데 어떻게 알았어?”

“전에 눈이 시리다며 안과 간다며.”

세라는 지나가며 한 말을 강호가 기억하는 게 놀라웠다.

“뭐래?”

“어, 노안이래.”

“노안? 장난치지 말고.”

강호는 차선을 바꾸며 말했다.

“정말이야…… 노안이래.”

세라는 정작 안과에 갔던 일을 잊고 있었다. 눈 영양제를 먹으라는 의사의 처방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라는 좌석 깊숙이 몸을 누이고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었다. 와이퍼가 천천히 움직이다 가속이 붙었다. 정오인데 주위는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서울에 도착할 즈음 비는 그쳤다. 강호는 영지를 먼저 데려다주고 세라의 집 근처에 차를 세웠다. 세라가 차에서 내리자 강호가 따라 나와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안에는 매콤 달콤한 수제 닭강정 냄새가 진동했다.


“어머니께 갖다 드려.”

“이거?”


강호는 캠핑용 나무상자 위에 올려놓은 닭강정 상자를 꺼냈다. 세라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들고 강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병원 내부는 오래된 외관과는 달랐다. 로비에 들어섰을 때 크림색 바닥 타일이 천장에 달린 전등을 고스란히 비췄고, 중앙에는 커다란 고무나무 화분과 벽걸이형 어항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항 속 열대어들은 박제된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세라는 혈압과 당뇨를 정기적으로 검사하는 정임을 따라온 적은 있었지만, 혼자 진료를 받기 위해 온 건 처음이었다. 간호사는 피검사와 문진을 마치고 내과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라며 오른쪽 복도 끝을 가리켰다. 진료실 앞에는 마스크를 쓴 채 기침하는 아이와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뒤에 두 노인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 티브이를 봤다. 할아버지는 간간이 코까지 골며 꾸벅꾸벅 졸았다. 간호사가 진료실에서 나와 환자의 이름을 불렀다. 졸고 있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진료실로 들어갔다. 남처럼 앉아 있던 할머니가 작은 천 가방을 움켜쥐고 할아버지를 쫓아 들어갔다.


핸드폰에서 수신음이 울렸다. 오후 회의가 한 시간 뒤로 미뤄졌다는 김선형의 문자였다. 세라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하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간호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면 자신을 부르지 않을까 눈을 떼지 못했다.

“유세라 님.”

간호사가 그녀를 불렀다.


의사는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넘기며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했다. 의사 가운 오른쪽 가슴에 정영국 박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정 박사가 코끝에 걸린 두꺼운 안경 너머로 세라를 쳐다봤다.

“음…… 두통이 있고 손발이 뻐근하고…….”

정 박사는 검사 결과를 유심히 살폈다.


“점이 생겼다고 그랬죠?

“네.”

정박사가 한참 검사 기록지를 훑었다. 세라는 침을 삼키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좀 더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네? 무슨 병이라도 있나요?”

세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자는 거예요.”


정 박사가 몇 차례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정밀검사를 받아보자고 했을 때 세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안이 온 것도 그렇고, 두통과 어지러운 증상이 빨리 호전되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처방전 대신 진료의뢰서와 대학 병원의 명함 한 장을 달랑 받아 들고 근처 카페로 갔다. 안경을 쓰고 진료의뢰서를 살폈다. 갈겨쓴 의학 전문 용어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질병코드 난에 적힌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14096.


정 박사가 준 명함을 꺼내 자세히 봤다. 서일 대학 병원의 선명한 마크 위에 작은 글씨의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희소병 전문 치료 재단 과장 오명한.


세라는 회의 자료를 마무리하고 기지개를 켰다. 창밖은 컴컴했고 불이 꺼진 사무실은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잡지와 화장품 샘플은 그대로 두고 가방만 챙겨 나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내다봤다. 하루를 짊어진 지친 얼굴이 맥없이 눈만 껌벅거렸다. 간절기가 돌아오면 방아쇠 수지증이 재발했다. 정형외과에서는 날씨와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간절기마다 찾아오는 감기같았다. 병원에 가도 손이 붓는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신 스트레칭하고 손가락 마디를 쥐락펴락해야 감각이 돌아왔다. 기계처럼 뻑뻑하다고 느낄 때면 어릴 때 아버지가 읽어주던 걸리버 여행기가 떠올랐다. 소인국 사람들에게 결박당한 걸리버처럼 보이지 않는 소인들이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뼈마디를 단단히 묶는 것 같았다.


세라는 불현듯 가방에서 진료의뢰서를 뒤적였다. 질병코드를 찾아 인터넷 검색창에 쳐봤다. 의학 논문과 전문 백과 사이트에 기재된 여러 개의 기사가 연관 검색어로 떴다. 그중에 어느 한 블로그에 포스팅된 기사를 클릭하니 ‘시간의 역행’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따라 나왔다. 유전자, 세포분열, 염색체, 체내 세포 같은 의학 용어만이 가득했고 난해했다. 계속 스크롤다운 하니 비교적 쉽게 설명된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병증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고 그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졌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심장은 요동쳤고 눈으로 보는 낯선 정보가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검색하느라 급기야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오전 휴가를 내고 아침 일찍 대학 병원으로 출발했다. 주머니에 명함이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버스 기사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기상캐스터가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라며 들뜬 기분을 전했다. 밖은 정말 그래 보였다. 하늘은 높았고 햇살이 따사로운 가을 날씨였다. 오진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어쩌면 오진의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 안에서 바라보던 청명한 공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한기가 손끝에서 시리게 부서졌다. 세라는 이미 겨울이 시작된 것 같았다.


병원은 한쪽에 펜스를 둘러치고 건물 확대 공사가 한창이었다. 정 박사가 소개한 오명한 교수는 두툼한 손으로 검사 기록지를 넘겼다. 세라는 의자에 앉으면서 요의가 느껴졌다. 입술도 메말라 침을 삼키며 입술을 적셨다. 긴장한 탓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조차 떼지 못했다. 일 초가 일 분 같은 침묵이 흘렀다. 고요를 깬 건 의사가 아니라 바깥에서 들리는 포클레인 소리였다. 창문으로 뾰족한 햇살이 들어와 세라의 얼굴을 뜨겁게 달궜다. 세라는 눈을 찔끔 감았다. 의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의자를 돌려 세라와 정면으로 마주 앉았다.


“설문지에 적으신 거 말고 지금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가요?”

“없는데요.”

“갈색 반점이 있다고 했지요? 그건 언제부터 생긴 거죠?

“제가 본 건 삼 개월 정도 됐어요. 그때는 동전 크기 정도였어요.”

“어디 한번 봅시다.”

세라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상의를 브래지어까지 말아 올린 다음 등 뒤가 보이게끔 돌아앉았다. 의사는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통증이 있는지 물었다.


“아직 단단하진 않군요.”

“그럼 딱딱해 지는 건 가요?”

“피부 경화증이라는 건데요. 진피 내에 아교질의 축척이 많아지면서 피부가 거칠고 두꺼워지는 것을 말해요. 피부의 한 부분만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만일 내장기관으로 퍼지는 전신 경화증이라면 얘기는 달라지죠. 다행히 국소 경화증으로 보이네요.”

“그럼, 괜찮은 건가요?”

세라가 일말의 희망을 잡은 것처럼 물었다.

“손발의 경직도 있다고 하셨지요?”

“네, 아침에 일어나면 그래요.”

“혈액순환의 문제기도 하니 적당한 운동도 하시고…….”

세라는 미간에 힘을 주며 의사의 말에 집중했다.

의사가 자세를 고쳐 앉고 잠시 뜸을 들였다.

“혹시 조로증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우리가 흔히 조로증이라고 하는 건 허치슨-길포드 증후군입니다. 주로 소아들에게 나타나죠.”


의사는 물 한잔을 마시며 이어갔다.


“그런데 베르너증후군이라고 성인조로증도 있어요. 백만분의 일 확률로 그 증상이 성인이 된 후 나타나는 연구 사례가 있지요. 이를테면 사춘기 때 노화가 시작되고 이삼십 대에 노화에 따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늦게 시작된 만큼 급격한 노인성 질환이 생길 확률이 높은데, 유세라 님 경우…… 베르…….”


순간, 세라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금붕어처럼 뻐금거리는 의사의 입 모양만 보였다. 블라인드를 통과하지 못한 햇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땅을 파헤치는 포클레인 소리가 잔인하게 들렸다.


“유세라 님, 물 좀 드릴까요?”


조금 전 아득했던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사장의 소음조차 절망에 귀 기울이듯 갑자기 조용해졌다. 등골에 식은땀이 났다. 물 한잔을 내미는 의사의 손을 잡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세라는 한겨울을 관통하는 것처럼 모든 게 얼어붙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받아들이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의사는 깊은숨을 내쉬며 병증을 자세히 설명했다. 헬리케이즈는 DNA 복제나 복구에 관여하는 효소인데 이 유전자를 만드는 8번 염색체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유전자 돌연변이가 세라의 체내에서 발견됐다는 것이다. 학계에 보고된 통계자료를 봤을 때 안면 주름이 많아지거나 백내장, 탈모, 골다공증과 같은 증상이 수반될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예까지 드니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세라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치료는요?”


세라는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천천히 물었다. 그러다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의사는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는 만큼 정기검진을 통해서 추적관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세라는 진료실을 나와 우두커니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았다. 병의 위중함에 비해 주의 사항은 간단했다. 타박상이나 상처로 인한 염증, 피부 궤양이 생기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는 것이다. 지금껏 살면서 멍이 들거나 가벼운 찰과상이 얼마나 많았는데, 이제부터 이런 것에 삶과 죽음이 갈라진다는 게 말이 돼? 의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손에 쥐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벽에 기대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니야. 그냥 감기처럼 시간이 해결해줄수도 있어.'


복도 끝에서 두 살 남짓의 아기가 기저귀를 찬 엉덩이를 뒤뚱대고 걸어 다녔다. 아기는 걷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일어나 중심을 잡고 뛰기 시작하는데 점점 속도가 붙더니 결국 바닥에 배를 깔고 엎어졌다. 세라가 아기에게 다가가려 하자 아기 엄마는 의자에 앉아서 일어나라는 손짓만 했다. 세라는 그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안타깝게 쳐다봤다. 아기는 엄마 눈치를 보고 슬그머니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아기에게도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마음이 부글거렸다.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세라는 내과 간호사실로 갔다.


“진료 기록서와 영상 사본을 좀 받고 싶은데요.”


상담 창구에서 오래 기다린 끝에 두툼한 봉투 하나를 받았다. 검사 기록지와 진단서, 영상 복사본을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영지야, 저번에 갔던 병원이 어디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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